미지의세계 9 노예들

여사원은 꿈 속에 나타나 유리에게 몸짓했어. 어서 내게 달려와달라고.

by 류인환

유리 머릿결을 쓰다듬는 그 여자 얼굴에서 더는 감정이 보이지 않아. 언젠가부터 기계처럼 표정 없는 눈을 한 채 정해진 방향으로 쓰다듬는 걸 알게 됐을 때 유리는 생각했어. 혹시 난 그녀의 먹이일 뿐이며, 잠시 후엔 교미 후 머리 뜯어 먹히는 수컷 사마귀처럼 애정의 대가를 치르게 되지 않을까. 그녀가 한 번 더 말을 걸었어. “그렇지 않니?”


유리는 대답하지 않았어. 거인은 이내 손길을 멈추고, 그를 노려보더니 일어섰어. 말을 듣지 않는 애완견을 단호히 혼내려는 듯. 그때 그의 옷이 벗겨졌어. 유리 몸을 걸친 건 그녀의 두껍고 긴 머리카락이었어! 유리는 발가벗겨졌어. 머리카락이 물결처럼 부드럽게 유리의 전신을 긁고 빠져나갈 때, 가진 모든 것을 그녀에게 빼앗기는 기분이었지. 왜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을까. 무슨 말이라도 했어야지. 유리는 후회했어. 그녀는 저 멀리, 다른 거인들이 있는 테이블로 전신주처럼 긴 다리를 교차하며 걸어가는 중이야.


유리의 목은 톱니바퀴가 걸린 듯 느리게 돌아가.


눈은 감기지 않고 주변 풍경은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해. 테이블에 앉아있는 모든 거인들이 그를 쳐다보고 있어. 거인들은 천을 걸친 게 아니야. 그들은 온몸이 털로 뒤덮여 있었지. 도망쳐야 해. 전에 보이지 않던 풍경들이 점차 보였기 때문에.


거인들의 테이블 아래에는 유리처럼 조그만 사람들이 헐벗은 채 서로 부둥켜안고 있어! 다시 눈에 힘을 주고 바라봤어. 수백 명쯤 되는 소인들은 육중한 테이블을 제 등살과 팔뚝으로 떠받치고 있어. 거인들의 노예임이 분명해. 그들 중 한 여자는 테이블 꼭대기까지 올라가 있었는데, 뺨이 유리 테이블에 닿을 정도로 사람들 사이에 끼어있어. 거인들의 손이 테이블에 부딪힐 때마다의 충격. 그녀는 그것을 전신으로 받아내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어. 망치로 못을 찍어 박는 것처럼. 그 여자 노예와 눈길이 마주쳤어. 유리를 쳐다보곤 반색하며 괴로운 표정으로 미소 지어. 사무실의 옆자리 여사원이야! 곧 유리는 그 노예의 노동에 합류해야 했지.




유리는 지금 벌거벗은 단신으로 일어섰어!

십여 마리의 거인들도 일어섰어.


거인의 동작은 매우 느려. 유리는 그 사이 도망칠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그들의 눈빛에 발이 묶였어. 감정이 보이지 않는 그들의 표정은 맹수 같아. 거인들의 동공은 커지더니 흰자위를 뒤덮었어. 그리고 기둥 같은 다리를 뻗어 거대한 발바닥으로 지평을 박찼어! 땅에는 지금 운석이 떨어지는 듯 거인들의 발자국이 곳곳에 파여. 굉음과 함께 터져 나오는 돌덩이들은 거대한 유리 테이블을 지탱하던 노예들에게 던져졌어. 지면에서 솟아오르는 유성에 비명 지르며 제각기 흩어지는 작은 인간들은 살길을 찾으려 도망쳤어. 그 바람에 유리 테이블은 바닥에 떨어져. 산산이 조각난 유리 조각은 비수처럼 노예들에게 던져졌어. 몇몇의 노예들은 떨어지는 날카로운 단두대에 살이 베이고. 풀밭에 피를 내뱉어.


빌딩 같은 거인들이 달려오는 모습. 유리에게 영상을 판독하는 일처럼 느리게 보여. 그들의 팔다리가 거대해서 느려 보인게 아니야.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는 순간이라서. 아드레날린이 온천수처럼 분출되고 평소보다 빠르게 고동치는 심장, 그리고 맥박보다 배는 빠르게 움직이는 동공 때문이야. 몸이 굳었어. 허벅지가 뜨거워진 채. 공중에서 떨어지는 무수한 흑색 유리 파편 사이 저 멀리 여사원이 보여! 목에 거대한 유리 파편이 박힌 채 죽어있었지. 곧 유리도 죽음을 맞이할 거야.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어.



뻑. 벼락 소리에 눈을 떴어.


거대한 다리가 유리 앞에 깊숙이 박혔어. 그 여자야! 여느 거인보다 몸집이 컸어. 두배가 되는 장신에 그만큼의 팔다리로 작은 거인들을 밀쳐내. 나가떨어지며 드넓은 초원을 단번에 흙 파인 황무지로 만드는 검은 거인 떼들. 그들은 다시 그 갈색 여인에게 달려들어. 유리는 마비된 입으로 힘겹게 외쳤어.


‘내 주인에게 손대지 마!’




IMG_20141011_185325.jpg 여사원은 꿈 속에 나타나 유리에게 몸짓했어. 어서 내게 달려와 대신 노역해달라고.


keyword
이전 08화미지의세계 8 붉은 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