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세계 4 신호등의 주술

태양은 지지 않았어. 풍성한 금발을 흩날리며 유리를 빤히 쳐다볼 뿐.

by 류인환

신호등은 있었어.


벼락 맞은 나무처럼 허리가 끊어진 채 널브러졌어. 콘크리트 피부 표면이 바스러진 부위에선 철심이 튕겨 나와 날 선 뼛조각을 드러냈어. 잔해는 마치 대형 생물의 시체와 같아서, 누군가 신호등이 처참하게 죽어버렸다 말해도 유리는 고개를 끄떡일 것 같았지. 생물은 아무래도 자동차에 부딪힌 모양이야. 진회색 아스팔트 위 유리조각이 성운처럼 흩뿌려진걸 보아, 차는 이미 폐차장으로 실려갔을 거야. 바닥에 긴 목을 늘어뜨린 생물의 눈은 잘게 쪼개졌어. 마른 핏덩이 같은 붉은 램프 유리조각으로. 간간이 스파크를 번뜩이는 그 깨진 눈은 유리에게 외치는 듯했어. 나는 아직 살아있다. 그리고 할 말이 있다 라고. 유리는 한동안 신호등이 건네는 말을 듣고 있었지. 그 바람에 횡단보도 중점에서 오랫동안 발이 묶여버린 거야. 유리 뒤를 따랐던 사람들도 그와 함께 서 있어.


“총각, 아까 전에 보셨어요? 차가 들이받은 것 같던데.” 중년의 여성이 유리에게 말을 걸었어. “아니요” 그가 대답하자, 일제히 사람들이 말을 퍼붓기 시작했지. “그래요? 나는 그냥 뛰시길래 따라 뛰었지. 여기 교통 장난 아니잖아요. 돌아가기도 너무 멀고.” “나도 언제 지나가야 할지를 모르겠더라고요. 다들 뛰길래 따라 뛰었지. 근데 이렇게 횡단보도를 신호등이 넙적 덮치고 있어서야 어디 겁나서 넘어가겠어? 불꽃도 튀고. 언제 터질지도 모르잖아.”


“교통경찰도 없고 뭐 하는 건지.”“도대체 누가 신호등을 저렇게 처박아 논거야. 정신머리 하고는.” “아 정말, 오도 가도 못하게 됐네.” “아줌마, 그냥 횡단보도 밖으로 돌아가면 되잖아요. 다들 가요.” “지금 차가 사방에 빽빽하게 서 있는데 어떻게 넘어가요? 차를 밟고 갈 수도 없고."


삑-삑.

경적이 한번 울렸어.


한참 수다를 떨던 사람들은 사방으로 고개를 펄럭였어. 처음. 누군가의 경적이 울린 후 십여 초 쯤은 볼륨이 꺼진 듯 고요했어. 횡단보도의 사람들도 눈을 크게 뜬 채 움직이지 않았지. 사거리를 사방으로 뒤덮은 차 떼의 웅장함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빠져나갈 구석도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야. 곧, 사방에서 경적소리가 터져! 번개 친 뒤 뒤늦게 울부짖는 천둥소리처럼.


빠-빠빠빠 빠빠빠빠빠빠빠 빠앙.


어디를 보든, 차들은 사람들을 고리처럼 둘러 방벽을 쳤어. 차 중에는 집채만 한 트럭도 있고 만원 버스도 있어. 수많은 헤드라이트와 차창 안 사람들 눈빛이 이루는 위압감에, 엄마 손을 잡았던 대여섯 살 어린아이는 과자봉지를 떨어뜨리고 울기 시작해. "아아. 이게 뭔 일 이래." "어떡해 우리, 저기 이봐요. 여기 아이가 있어요." “이차들이 제정신인가, 왜 사람 앞까지 밀고 들어와?” “어머, 저기 저 사람들 봐. 정말 갇힌 거 아냐?”


경적 소리는 더욱 커져서 아이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아. 찡그린 표정과 헐떡이는 입술만 울음을 표현했지. 갇힌 사람들은 서로의 말소리조차 알아낼 수 없었어. 과장된 연극처럼 눈을 크게 뜨고 춤추듯 손을 펼칠 뿐이야. 횡단보도 바깥. 인도에는 사람들이 어느새 수십 명이 모였어. 그리고 재난현장 보듯 놀란 표정으로 손가락질 해. 유리는 주위를 둘러보았어. 차들은 어느새 사거리 모든 방향 지평선 뒤로부터 밀려오는 중이야. 색색의 살찐 바퀴벌레들이 아스팔트를 메운 것처럼.


전쟁이 시작되었어!


성미를 다스리지 못하는 차들은 슬슬 페달을 밟아. 사이사이로 제 몸을 비트는 몇몇의 차들을 계기로 무리는 정렬을 잃어버렸어. 초원의 물소들이 우왕좌왕하며 날뛰는 모습처럼. 무리는 부풀어올라. 아이가 떨어뜨린 과자는 밀려온 타이어에 바스러져 가루가 되었어. 횡단보도 안 사람들은 어느새 서로 등을 맞대고 원을 그리게 되었지. 아이는 울음을 그쳤어. 대신 엄마 품에 안겨, 눈을 크게 뜬 채 침을 연신 삼킬 뿐. 사연 있는 급한 차들이 억지로 제 길을 가려 몸을 더욱 뒤흔들기 시작해. 그리고 사람의 발을 짓눌렀지.


결국 누군가 다쳤어. 사람들은 흥분했어. 무심코 신호 없는 무법의 횡단보도에 발이 묶인 십여 명의 사람들. 그중 급한 사연 있는 몇 사람들이 반격했어. 차들 사이로 비집고 빠져나오려 안간힘을 쓰다, 차체를 밟고 올라간거야! 밟힌 차들의 문이 열리고. 그를 계기로 문 안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언쟁을 벌이기 시작했어. 그들 중 몇은 멱살을 잡다 주먹을 휘둘렀어. 사람들을 말리다, 별안간 날아오는 주먹에 맞아 코피를 흘리고, 바닥에 쓰러지는 사람도 있어.


"제발 좀, 집에 가자고요!"


평소 소리를 질러본 적 없는 유리의 고함은 어색해. 얼굴이 새빨개졌지. 그때 사이렌 소리가 울렸어. 구급 대원과 교통경찰이 뒤늦게 달려와. 그들은 거침없이 차체를 밟고 사이드미러를 부서뜨리며 현장을 향해 오는 중이야. 하지만 곧 훼손된 차량 주인들이 항의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또 실랑이를 벌여.


유리는 주저앉았어. 담배 피우듯 매연을 뿜어대는 자동차가 눈앞의 그를 거슬린다는 듯 쳐다봐. 헤드라이트를 피해 고개를 돌리자 이번엔 차 안에서 노려보는 운전수들의 따가운 눈총이 보여. 그는 고개 숙여 지면을 쳐다봤어. 짓눌린 타이어가 보여. 그것은 배기구를 통해 유리에게 으르렁거리는 중이야.




sunshine 복사본.jpg 태양은 아직 지지 않았어. 풍성한 금발을 흩날리며 유리를 빤히 쳐다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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