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사원의 상처는 유리에게 의문을 주었어. 지금은 꿈일까, 현실일까.
"새벽에 다친 거에요"
내가 말하자 부서의 모든 남자 사원이 다가왔어.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그럴 만 하지. 여자 목에 이런 상처가 났다는데. 얼른 팀장에게 내 몰골을 보이고 집에 가야지. 애초에 회사를 올 필요도 없었긴 했는데 이참에 골치 아픈 일도 넘기려고. 어제저녁에 그 대형사고를 팀장이 나한테 맡긴다잖아. 그걸 어떻게 다 해. 아침에 문자를 받았을 때, 차라리 다친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지. 착한 유리 씨가 대신 맡겠지. 그런데 이 남자는 도대체 출근하고 어딜 갔는지 보이질 않아. 어서 집에 가서 푹 쉬고 싶은데. 끝까지 눈치가 없다니까.
“야, 너는 지금 후배가 이렇게 다쳤는데 어딜 갔다와. 괜찮냐는 말도 안 해?" 남자들이 핀잔 주는 말이 들려. 그 남자가 온 거야. 멀찌감치 유리 씨가 걸어오는게 보여. 마치 오줌 지린 꼬마 아이처럼 삐죽삐죽 걸어오는 꼴이 못마땅했지. 그만 보면, 왠지 모를 심술이 나.
“괜찮아요?”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어. 나는 따졌지. “대리님, 괜찮아 보여요? 여자 목에 이런 게 생겼는데.” 고개를 틀어 그 남자에게 목을 내밀었어. 유심히 내 상처를 보다 딴생각에 잠긴 듯 머리를 저어. 무슨 뜻이야 정말.
“그렇죠. 장난 아니죠? 딱지가 붙으면 안 되는데, 흉터가 남아요. 새벽에 병원을 갔기에 망정이지. 그 정신에 내가 어떻게 찾아 갔나 몰라. 아, 이것 때문에 아파서 병원 갔다 오고 선 지금까지 한숨도 못 잤어요. 너무 따가운 거 있죠, 오늘 안 나오려다 그래도 내가 대리님께 일 맡기기는 싫어서-”
이 남자는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았어. 그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딴생각을 해. 화가 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아프다는데. 관심이 있기는 한 걸까. 어제도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으면서, 막상 이렇게 말 걸면 남처럼 대한다니까. 이럴 때면 정이 뚝 떨어져. “제 말 듣고 있어요?”
"여신님.”
여신? 무슨 소리야. 남자의 볼이 붉어졌어. 그리고 처참한 표정을 짓고 있지. 귀여워 보여. 마음이 복잡해졌지. 오늘 그 남자 꿈을 꾼 것이 우연은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아니, 그.” 유리 씨는 말을 잇지 못해. 갑자기 그 옆의 남자들이 수군거리잖아. 내가 무마했어. “왜 그렇게 봐요,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왜 쓸데없이 그런 말을 해서, 저한테 뭐 잘못한 일 있어요?” 나는 그 남자를 다그쳤어. 무안을 주는 건 조금 미안하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아니, 그 상처 어떻게 된 거야?" 그 남자가 말을 돌려.
“그러니까 대리님, 제가 꿈을 꿨는데 진짜 이상한 꿈이었다니까요. 꿈에서, 아……” 꿈 이야기를 하려다, 멈췄어. 지금 이 상황에 이런 말을 해서 좋을 게 없잖아. 그냥 말하지 않기로 했어.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지.
“꿈?” “아니에요. 목이 아파서 말하기도 힘드네요.” 마침 팀장이 보였고 나는 사정을 말하고 일을 그 남자에게 떠맡기는 데 성공했어. 유리 씨에게 직접 말하진 않았지. 굳이 싫은 부탁을 눈 앞에서 할 필요는 없으니까. 날 싫어하게 되면 어떡해. 얼른 회사를 얼른 떠났어. 그 남자가 돌아볼 만 한데, 멍하니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네. 이제 정말 끝이야. 택시를 타면서도 나는 꿈에 나왔던 그 남자를 생각하고 있었어. 그런데 택시 안 냄새가 고약해. 비린 소변 냄새. 마치 누가 애완견이라도 데리고 탔다가 사고를 친 것처럼.
아무튼 내 꿈 얘기 말이야.
그 남자와 나는 발가벗고 있었어. 둘만 벗고 있는 것은 아니었어. 수백 명이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여서, 당시에는 아무렇지 않았지. 넓은 들판에 단 둘이 있었다면, 우린 아담과 이브였겠지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발이 묶인 노예였지 뭐야. 원숭이들이 우리를 부려먹고 있었지. 몸집이 무척 컸어. 우리에 대한 배려가 조금도 없어서, 참 많은 사람들이 괴물들의 발걸음에 벌레처럼 짓밟혀 죽었어. 우리는 무엇 때문인지도 모른 채, 거대한 발이 쏟아져 내리는 걸 보고는 기겁할 뿐이었어. 거인들의 걸음을 피해 도망치다, 커다란 테이블을 발견했어. 괴물들의 것이라고 확신했지. 상식을 넘는 크기였거든. 웬만한 건물 같은 테이블은 고대의 신전처럼 웅장했어. 그때 문득 생각이 든 거야. 그 괴물들이 앉아있는 테이블 안으로 숨어 들어가면, 적어도 짓밟히지는 않겠다는 것. 테이블은 육교처럼 거대한 철제 프레임으로 이루어졌고 흑색 유리판이 올려져 있었어. 유리는 매우 두꺼워서 나 같은 소인 정도는 그 아래에 숨어 있으면 보이지 않을 것 같았지.
철제 다리에 힘겹게 올라갔어.
유리 넘어 괴물들의 얼굴이 보였어. 두꺼운 유리에 일그러진 그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너무 거대해서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어. 검은 털로 뒤덮인 원숭이. 얼굴은 인간이었지. 원시의 그것보다는 아주 세련된 얼굴. 그들은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었어. 오히려 벌거벗은 내가 원숭이 같았지. 철제 프레임이 서로 연결되어 둥지처럼 앉을 공간이 넉넉한 지점에 걸터앉았어. 드러누웠다는 게 맞겠다. 나에겐 틈마저 무척 넓었으니까. 몸을 뉘어 유리 너머로 원숭이들이 말하는 것을 지켜보았지. 유리 윗면에 놓인 찻잔 아래쪽으로 몸을 반쯤 숨긴 채로. 점점 그들의 말이 들리기 시작했어.
“여왕은 이제 정신이 완전히 나갔어.”
“그러게, 애완동물 따위에게 저렇게 집착하잖아. 이제 우리는 그 여자에게 아무것도 아니야.”
“여왕이 역할을 하지 않으니, 우린 지금 왕이 없는 거야. 새로운 왕을 뽑자고. 여왕은 감염된 거나 마찬가지야. 자기학대와 정신을 소모하는 늪에 빠져버린 거지.”
“저 벌레 같은 걸 봐. 오늘로 여왕이 굶은 지 일주일이야. 계속 저렇게 앉아 있었어. 그녀에게 이젠 정신도, 마음도 없어.”
“애완동물 따위에게 정신을 지배당하다니, 이젠 그녀가 평생 이룩한 권위도, 역할도 없어졌어. 벌레가 그 여자를 이미 죽여버린 거야.”
원숭이들은 의자를 끌며 다들 일어났어.
귓속에 나보다 더 작은 소인이 들어가 고막을 찢어내는 듯한 소리로. 의자가 테이블에 부딪히는 충격에, 거의 추락할 뻔했지. 귀퉁이에 수직으로 매달려 있었어. 그리고 보았지. 굉음과 함께 거대한 원숭이들이 붉은 원숭이에게 달려가는 것을. 붉은 원숭이가 여왕인 듯 했어. 다른 원숭이보다 더욱 크고 털도 풍성했거든. 모피를 온몸에 두른 귀족 여인 같았지. 검은 원숭이들보다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었어. 하지만 어딘가 야위어 보인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아마도 원숭이들이 말했듯이 지금 심적으로 고통스럽기 때문일 거야.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아무런 감정이 보이지 않았거든. 몹쓸 남자 때문에.
여왕은 터벅터벅 걸어갔지. 휑한 눈빛 그대로 자신에게 달려오는 거대한 원숭이들을 향해. 자신의 목숨이 어떻게 되는 상관 없었나 봐. 그러다, 원숭이들이 자신을 스치고 달려간다는 걸 깨닫는 순간 여왕이 눈을 떴어. 자신 대신 벌레를 죽이려고 한다는 걸 눈치챈 거지. 원숭이들은 차마 동족을 죽일 수 없었던 거야. 그때도 달 같은 여왕의 눈에는 아무것도 없었어. 그러다 슬픔이 바닥에서부터 차오르더니, 점점 끓어올라 분노로 변해버린 거야. 여왕은 몸을 돌려 달려가서는 검은원숭이들의 머리를 잡아채기 시작했어. 그 벌레 같은 인간을 구하려고 동족을 죽이기 시작한 거야.
세상은 난장판이 되어 버렸어.
천둥 치는 검은 하늘과 핏물이 흐르는 땅 뿐이었지. 높은 테이블 프레임 아래에서는 노예들이 서로를 밀치며 도망가고 있어. 그중 재수없는 몇은 날아가는 거대한 원숭이들의 몸뚱이에 짓이겨지고 말았지. 대지에 흐르는 핏물과 시체 조각은 모두 노예의 것이었어. 노예들 중 하나가 나를 발견하고는 내 쪽으로 뛰어왔지. 거인들의 싸움에 밟히지 않으려고 개미처럼 테이블로 기어 오고 있었어. 그걸 본 다른 노예들 역시 떼로 모여 기어 오기 시작한 거야. 제 아무리 거인의 테이블이라고 해도 감당할 수 없었지. 테이블은 휘청거리다가 이내 쓰러졌어. 우리는 모두 공중에서 추락했어. 흑색 유리 테이블이 바닥에 부딪히고 말았는데, 사방에 거대한 유리조각이 유성처럼 흩뿌려졌지.
마치 교통사고 현장처럼. 사거리. 횡단보도. 신호등.
내게 있지 않은 일들이 떠올랐어.
망상에 사로잡혀 미처 알지 못했는데, 내 목에 거대한 유리조각이 박혔어. 그대로 넘어졌지. 죽어가는 사람들 더미에 짓눌린 채. 죽는다는 건 섬뜩한 일이지만, 당시에는 평온했어. 목에서 피가 스며 나오는 느낌이 따뜻해 일어나고 싶지 않았어. 어서 죽어서 이 황량한 세상을 벗어나고 싶었던 거야. 거인들의 정원과 노예의 삶을. 이곳에는 아무도 날 쳐다보지 않았거든. 서러웠어. 이 세상의 자연은 거대한 원숭이들의 고함에만 비를 뿌리고, 여왕과 그 ‘벌레'라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 때문에 죽음에 휩쓸리게 되는 노예들. 그리고 우리들은 살기 위해 서로를 밀쳐낼 뿐이잖아. 내가 소리 없이 죽는다 한들 누가 슬퍼하겠어. 내 옆.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쓰러진 빛나는 여왕과 비교될 뿐이야. 여왕이 미워졌지.
그때 그 남자가 보였어.
내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지. 나를 보며 울부짖고 있었어. 기뻤어. 그 죽어가는 짧은 순간 동안 그 남자의 슬픔으로 축복받았기에. 아쉬웠다면, 내 곁으로 도착하기 전에 눈이 감겼다는 것뿐. 나는 감은 세상에서 따뜻한 피의 촉감에 데워진 채, 그 남자 품에 안겨진 나의 시체를 상상하며 죽었지. 맨살과 맨살로.
눈을 떴을 때. 나는 살아 있었어.
밝은 새벽.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 베개가 피로 적셔 있는 걸 보았어. 그리고 주위에는 깨진 전등 조각이 흩뿌려져 있었지. 자는 사이 전등이 떨어진 거야. 정말로 죽을 뻔 했었지. 그때 그 남자의 우는 얼굴이 떠오른 거야. 그래서 굳이 오늘 회사를 나왔어. 그 남자 얼굴을 보고 싶어서. 혹시 내 다친 모습을 보고, 정말 꿈처럼 울어줄지, 아니면 적어도 예의 상 안타까운 시늉이라도 해 줄지 확인하고 싶었지. 이제 알게 되었어. 그 남자는 나를 위해 슬퍼하지도, 신경 쓰지도 않는다는 걸. 꿈 덕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