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세계 13 심해

'부글-부글' 물방울 소리가 들려와.

by 류인환

팀장이 걸어오고 있어. 주위의 동료들은 잡담을 멈췄지. 정지된 분위기에 유리도 숨을 죽였어. 지금은 오전 열 시. 블라인드를 걷은 창문에서 이른 햇살이 쏟아져. 사무실 한쪽 벽은 전부 유리창으로 덮여 있어서 등을 밝힐 필요가 없었지. 오히려 너무 밝아서 유리는 발가벗겨진 느낌이 들었어. 그래서 어둠을 켤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 오늘따라 눈부신 이곳은 다른 세계 같아. 하늘 위 신들이 사는 세상처럼.


팀장은 발걸음을 떼기 전. 의자에 아직 몸을 파묻고 있을 때부터 유리를 쳐다보고 있었어. 그리고 팔걸이를 잡아 쥐고 몸을 일으켰지. 유리는 생각했어.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지금 팀장에게 햇살 후광이 비춰져. 백광을 뿜는 검은 형체는 양 손에 짓이겨진 서류를 움켜쥐고 다가오고 있어. 보폭은 너무도 느려서 걸음마다 유리를 잘근잘근 곱씹는 느낌이야.


모두들 분노를 감지했어. 발걸음 말고는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아. 유리가 두 손바닥을 허벅지에 올려두고 침을 삼키는 찰나에, 팀장은 서류를 유리 얼굴에 던져버렸어!


감은 눈, 검은 세상. 그 앞에 흰 천이 살랑거려. 그 와중에 유리는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본 장면이 떠올랐지.


백색 눈이 덮인 산속에, 백색 깃털을 휘날리는 올빼미가 소리 없이 날아와 쥐를 덮친다. 아름다운 올빼미 꽁무니에서 서서히 갈색 갈고리 발톱이 드러나, 쥐의 살갗을 뚫어 쥔다.


살짝 뜬 눈. 갈라진 시야로 떨어지는 서류를 보았어. 여러 겹의 조각보처럼 그 천들은 각각의 모서리를 깃털처럼 꼬리치며 시야를 뒤덮어. 글자가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해. 양재. 정체. 9시. 문서에는 문신처럼 글귀들이 빽빽하게 적혀있었어. 부러진 신호등이 떠올라. 팀장은 유리가 거기 있었다는 걸 눈치챈 것일까. 그것이 이처럼 화를 낼 일인지 의문이 들었지.


"유리. 왜, 처리 안 했어." 팀장이 유리에게 말했어. "네?"

"사거리 건. 왜 처리 안했냐고! 지금 클레임 장난 아니잖아. 감시카메라 녹화 내역은 요청했어?" "네?"


팀장은 손이 다시 한번 치켜 들었어. 소매를 걷어 올린 부장의 팔뚝에 힘줄이 돋아났지. 미간의 주름처럼.


"저, 부장님. 그 건 양대리 담당입니다. 목을 다쳐서 어제 병가를 냈고요." 건너편 사원이 말했어.


“뭐?" 팀장은 이를 드러내다, 이내 입술 안으로 감추고는 나지막이 말했어. "아……. 그랬었지. 내가 자기들한테 말을 안 했네. 미안하네. 유리 씨. 정말 미안하네. 내가 미쳤나 봐.”




이후. 팀장은 오늘 하루 종일 자리에만 앉아있었어. 회의도, 식사도 하지 않았지. 모니터 흰 창만 바라볼 뿐. 그러다 종종 등을 굽히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어. 큼직한 두 손 사이로 보이는 얼굴 주름은 마치 찡그리는 듯 우는 듯 일그러져. 책상에 닿은 팔꿈치 옆엔 두통약 포장지가 흩뿌려져 있었고 그 옆에는 가족사진 액자 하나와 히말라야에서 찍었다는 젊은 부장의 사진 한 장이 붙어 있어.


부장은 얼굴을 덮은 손 사이로 연신 유리와 나머지 직원들을 쳐다봐. 자신의 돌발 행동이 스스로를 옥죄는 듯 말야. 퇴근시간이 되자 부리나케 도망치듯 가방을 들고 떠났어. 유리에게 들릴 듯 말 듯 오늘까지 무슨 일을 해야 하든 책임질 테니 지금 집으로 바로 들어가 쉬라는 말과 함께.


덕분에 그는 여유롭게 버스정류장으로 향했어.

늘 그렇듯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팀원들에게 등을 돌린 채로.


뚜벅 뚜벅. 오늘의 긴장에 너덜거리는 팔다리를 풀어주려 느슨히 걷던 유리는 곧 떠날 것 같은 버스를 발견하고 달려갔어. 창 밖이 잘 보이는 좌석에 앉자마자 버스는 급히 발진했고, 그는 반작용으로 좌석 밑으로 파묻혔지. 어지러워. 며칠 전 창문을 열고 잠들었기 때문일까, 감기 기운이 있었지. 어서 집에 가 이불을 덮고 푹 자야 해. 버스 안 라디오 채널에는 나지막이 노래가 흘러나와. 창밖에 보이는 도로를 배경으로 유리는 뮤직비디오 주인공이 되는 놀이를 했지. 노래가 끝나면 그는 현실로 돌아왔고 곧 다음 노래의 주인공이 되었어, 그리고 정적. 그리고 또 다른 사연. 그리고 정적.




부글-부글.

물방울 소리가 들려와.


어두운 버스 안에서 바라보는 바깥 세상은 어느새 밤. 노랗게 빛을 발하는 가로등. 그리고 차들의 붉은빛이 행렬을 이루고 있어. 직선의 항로를 따라, 몸은 빨려 들어가는 듯 맥없이 가속해. 판단하건대 버스가 빨라지기 보다 그새 감기 기운이 심해진 것이야. 눈은 지나가는 빛들을 따라가지 못했는지 점들은 선으로 둔갑했어. 마치 우주 속 웜홀을 통과하는 듯.


머리가 지끈거린 탓인지 유리는 몸이 기울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어. 그가 신음을 내뱉으며 엉덩이를 살짝 들고 다시 고쳐 앉았을 때.


버스는 수직으로 떨어지고 있었어.

유리는 몸이 굳었어.




그가 하강한다고 느낀 이유는 지금 밑바닥으로 침잠한다는 생생한 체감 때문이야. 떨어지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어. 안전벨트에 온전히 의지한 채 이를 악물었지. 틈 사이로 신음이 새어나와. 고개를 돌리기도 벅차. 힘겹게 창 밖을 보았어. 빛들은 여전히 유성처럼 선으로 떨어지고 있는 중이야. 속도마저 가늠할 수 없었지. 유리는 생각했어. 추락 끝에 나는 죽는 거야. 버스 안에서 잠시 조는 동안 버스는 궤도를 이탈해 어느 절벽에서 추락하는 중일 수 있어. 아니면 대교를 건너다 강에 빠져 매몰되는 중일지 몰라. 어쨌든 떨어지는 시간이 지속될수록 살아남을 확률은 떨어지는 거야. 유리는 좌석에 묶인 채 죽음 앞에 대기하게 되었어. 암흑 속에서 환청이 들려.


왜, 안했냐고. 제정신인가. 미안하네. 정말 미안하네. 내가 정신이 나갔었나 봐. 여신? 내가 그렇게 보이나요? 그렇다면, 이것 좀 대신해줘요. 그럴 수 있잖아요. 너는 옆 사람이 아프다는데. 인정머리 없기는. 하여간. 잘 하고 있나 봐.


그들은 암흑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유리에게 말을 걸었어. 그는 온몸이 굳어버린 채 그저 언어를 유령처럼 몸으로 받아 흘려낼 뿐이야. 유라는 혹시 자신이 이미 죽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했어. 이미 거대한 관에 눕혀졌고, 그들은 정장을 입은 채 관을 둘러싸고 입술을 번뜩이며 속삭이는 중일지 몰라.




턱.


부딪히는 소리에 눈이 떠졌어. 지금 유리는 살아있어. 버스 실내등이 켜져 있어. 유리 말고는 아무도 없어. 피부 감각이 돌아오자, 자신이 여전히 수직으로 기울어 있다는 걸 알아챘지. 차가 고꾸라져 바닥에 부딪힌 거야. 깨진 운전석 차창 너머 흙 바닥이 보여. 떨어진 충격에 비해 차는 멀쩡해. 안전벨트를 풀었어. 손은 느려.


털컹.


풀어진 고리는 물컹한 소리를 내. 유리는 아래로 떨어졌어. 곧바로 앞 좌석에 부딪힐 걸 각오했는데, 부드럽게 다리를 배 쪽으로 당겨 좌석을 딛고 일어설 수 있었어.


깨닫게 되었어. 여기는 물 속이란 걸.


버스는 수직으로 밑바닥에 꽂혀버렸어. 차창 고리를 잡아 몸을 열린 창 밖으로 끌어올렸어. 깜깜한 바깥에 붉은 불빛 하나가 어른거려. 빛은 점점 커졌지. 그리고 여러 점으로 나누어졌어. 눈이 어둠에 제법 적응하자 빛의 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어. 그것들은 밤길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아니야. 붉은 반점을 발하는 무수한 해파리들의 행렬. 무리는 유리의 동공에 붉은 잔상 몇 자국 남기고 다시 사라졌어.


여기는 심해야.

보글-보글 물방울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곧 유리는 숨이 막혔지. 이곳은 바다 속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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