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괴물이 되어간다고 어머니는 말했다.
지팡이를 하나만 짚고 다닐 땐 그래도 사람처럼 보였을 거라고. 하지만 지팡이 두 개를 짚거나 또는 유모차를 끌게 되었을 때, 이건 정말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고 휠체어나 사륜 전동차를 타는 것이 보기에는 그럴듯해도 그나마 남아있는 다리 힘이 점점 더 빠져나가는 기분이라며 이렇게나마 걸을 수 있을 때까지는 버텨보겠다고.
굽은 허리와 닳아진 무릎관절은 불편한 자세로 속옷을 갈아입어야 하며 대소변도 급해진다. 거들어 주려하면 아직은 혼자 할 수 있다며 손을 뿌리친다. 육체는 하루하루 산산조각이 되어 가지만 말씀은 여전히 꼿꼿하다.
어머니께서 17년 전 칠순을 맞이하던 때 했던 말이 생생하다. 생신 전날 밤, 잠자리에 들며 나는 어머니의 손과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엄마, 이젠 우리 걱정은 내려놔. 작년보다 몸이 작아지고 주름은 더 늘었잖아.” 어머니는 내 손을 마주 잡고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야야, 사람들이 걱정해서 늙을 것 같으면 우리는 이십 대나 삼십 대에 이미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야. 너야말로 내 걱정은 말고 하나뿐인 네 아들의 앞길을 잘 살펴 주거라.”
작년 봄, 어머니는 내 집에 오시어 17박 18일을 머무셨다. 아버지가 계실 때는 머무름이 길어야 3박 4일이었다. 이제 혼자되신 장모님과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싶다며 남편이 모셔왔다.
머무는 동안 새벽잠이 없는 어머니의 방문을 자주 두드렸다. 함께 가벼운 간식을 먹으며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중에 우리 사 남매를 가질 때의 태몽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전설 같다. 어머니 꿈속의 큰 물고기와 용이, 그 빨간 앵두가 태중의 아기로 변신한 것이 바로 나였으며 우리 형제다. 기고 서고, 걸음마를 떼던 아가들이 자라 머리가 굵어지면서 불확실한 열정으로 암울해지거나 거칠어져 가는 아이들. 그 시절, 어머니는 고삐 풀린 자식들의 사춘기와 함께 더 다루기 힘든 매사에 까다롭고 날카로운 아버지의 고집까지 다독이느라 편할 날이 없었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어머니만의 마음 다스리는 독백이 생기더라고. ‘순간을 참으면 하루가 편하고, 하루를 참으면 백날이 편안하며, 죄는 지은대로 가고 공은 쌓은 대로 가며 물은 제 길로 간다.’는 옛말을 머리와 가슴이 탁해질 때마다, 자식들에게 엄마라는 이름을 바로 세우고자 새기고 또 새겼다고. 그 세월을 보내고 나니 손자 손녀가 시집 장가가는 것까지 보게 되었다고.
오신지 열흘쯤 지나고 노을 지는 창가 쪽에 누워 어머니는 노래를 하나 불렀다. 나도 옆에 누웠다. 노래는 유행가도 아닌 각설이 품바 타령이었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왜 하필 그런 노래를 부르냐고 했더니 어머니는 웃음기를 머금고 이렇게 말했다.
이 노래가 지금 노인들과 닮았다며 늙은 부모는 각설이와 다를 바 없다며 자식들에겐 잠깐 들려 밥이나 한 끼 먹고 가면 서로가 편하다며 이야기는 이어졌다.
어머니가 시집오기 전, 친정 동네엔 마을을 도는 거지들이 많았으며 그 시절엔 나병환자들도 함께 섞여 다녔는데 나병을 앓는 젊은 여자가 아기를 등에 업고 다니는 모습은 더 비참했다고. 동네에 좋은 집안의 아들이 불치병이 들어 스스로 뛰쳐나가 그들과 함께 구걸하는 것도 보았는데 그들이 가까이 다가올까 두렵고 무서워 얼른 밥 한 덩이를 바가지에 덜어주고는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고.
그리곤 이렇게 다시 이어갔다. 지금 시대는 발달된 의술로 수명은 연장되고 구십에서 백세로 이어져, 요양원 보호 시설이나 그럴듯한 이름의 실버타운이 유치원보다 늘어나는 현상이 어머니는 슬프다고 했다. 노인들은 자식들에게 귀찮은 존재로 남겨지기 싫어 스스로 시설로 들어가기도 하며, 구부정한 몸으로 고향집에서 노부부가, 또는 홀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너희들이 이 늙은 괴물을 아직은 좋은 마음으로 대해주니 고맙다고 했다. 그러나 자식들에게 한 번씩 들르는 일이 재물의 많고 적음을 떠나 부모가 오래오래 살면 각설이가 되는 기분이 든다고 했다. 각설이 타령은 엄동설한에 죽지 않고 살아나 봄이 되면 동네를 돌며 구걸해야 하는 처절함, 그들은 부끄러움까지 비천하여 신명 나는 가락으로 뻔뻔함을 위장했지만 그들만의 양심선언이 아니겠냐고. 고통받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인식하지 못할 것 같다고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고 했다, 노랫말 속엔 책으로만 입으로만 인생철학을 말하는 사람들보다 고단함과 덧없음이 타령 안에 있으며, 가락은 단조 로우나 목숨을 이어주는 밥 한 덩이의 소중함이 진하게 배어있다고. 그리곤 어머니는 웃으며 다시 타령으로 돌아갔다.
“얼시구 씨구 들어간다 절시구 씨구 들어간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웃자고, 놀자고 하는 노래며 이야기지만 나는, 스스로 괴물로 변했다고 말하는 어머니가 좋다. 나는 어머니가 주무시던 방에서 자주 잠을 청한다. 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어머니의 눈으로 나 자신을 들여다볼 때가 있다. 지나온 생의 전부가 한순간처럼 여겨진다. 어찌 어머니께 밥 한 끼 잘 차려드린다고 효가 되겠는가. 어머니는 지나온 삶을 도란도란 나누고픈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아버지가 계실 때는 늙음도 감당이 되었지만 홀로 되니 그 옛날에 마음 다스리던 독백도 힘을 잃었으며 아침이면 다시 눈이 떠지는 지금이 괴롭다고 했다. 왜 자꾸만 살아지느냐고.
굽은 허리와 쌍지팡이로 다리가 네 개, 유모차에 의지할 땐 다리가 여섯까지 늘어나는 괴물이 되어버린 어머니. 그 안에 내 모습이 설핏 겹쳐지곤 했다.
내려가신지 몇 달 후, 어머니는 큰 용기를 내시어 다시 서울에 오셨다. 수술하자고 말씀드릴 때마다 늘 나이가 너무 많다는 이유를 대며 하지 않겠다던 엄마였다. 마음을 먹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혈압도 정상이며 당뇨도 없고, 다른 장기에 이상이 없으니 수술해도 된다는 담당의사의 말씀을 듣고, 두 무릎에 인공관절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재활의 고통은 엄청나게 컸지만 오랜 세월 통증에 시달린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스스로 괴물이라고 했던 어머니. 이제는 통증에서도 각설이 타령에서도 벗어나 남은 세월 동안 편안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