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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레쏭 Jul 11. 2024

1km 달리는 방법

RUN YOUR BEST RACE

마흔이라는 퇴사의 시기를 정했을 무렵이다. 퇴사를 기념하기 위해 또는 퇴사를 하고 잠시 휴지기를 가질 수 있다는 설렘 때문일까? 버킷 리스트에 있는 몇 가지를 시도해 보고 싶어졌다. 나에게 퇴사라는 것이 너무나 큰 변화이기 때문에 큰 변화를 하기 전에 작은 도전들을 먼저 해보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마치 예방접종을 하듯이 말이다.



아주 오래된 도전


그중 하나가 오래 달리기였다. '고작 달리기가 도전이라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달리기는 나의 오랜 바람이자 약점 같은 것이다. 어릴 때부터 나는 오래 달리기를 싫어했다. 100m 달리기는 반에서 1-2등 가끔은 전교에서 가장 빠르게 달릴 수 있는 스프린터였지만, 오래 달리기는 내 스타일이 아니였다. 그리고 못 하니까 가장 싫어하는 운동이 되어버렸다. 물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필라테스, 요가, 인터벌 트레이닝, 크로스핏까지 각종 운동을 좋아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사람이지만, 오래 달리기는 내 인생에서 영구 제외된 운동이었다. 왜? 그냥 잘 못하니까....


참 이상했다. 100m를 전력질주하는 건 괜찮은데 600m를 달리기 위해서 100m를 뛸 때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심장이 밖에서 뛰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느낌이 너무 싫었다. 오래 달리면 숨을 거의 쉴 수가 없고 한 걸음을 떼는 것도 힘들게 느껴졌다. 그런 내가 오래 달리기를 시작했다. 나의 달리기 혐오에도 불구하고 시작하려고 하는 이유는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안 할 것 같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내가 못 한다고 생각했던 무언가를 해낸다면, 다른 종류의 도전을 할 때도 자신감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이상한 생각을 했다.


당시에 코로나가 장기화되면서 달리기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늘었다. 유행처럼 러닝 크루들도 많아졌고 러닝을 한다는 게 힙하고 트렌디하게 느껴지는 분위기였다. 때마침 지인이 하고 있는 40대 이상 중년 여성이 중심의 러닝 크루를 발견했다. 초보 수준에 맞게 체계적으로 알려준다고 하고, 크루 멤버가 나와 비슷한 연령대라 체력적인 면에서도  '내가 뒤쳐지진 않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거다. 혼자는 어려울 것 같으니 저 힘을 빌어서 시작해 보자!"


초보 느낌


내 생각은 큰 오산이었다. 체력 테스트를 하는 첫날 나의 기대는 그냥 절망감으로 바뀌었다. 테스트는 트랙 8바퀴 3.2km를 돌면서 시간을 체크하는 것이었다. 뒤처지는 게 싫어서 처음부터 전력질주로 선두로 나갔던 나는 한 바퀴를 돌고 이미 하위 그룹에 있었다. 그리고 거의 꼴찌로 결승점을 통과했다. 당시 3.2km를 완주한 시간은 25분을 넘었다.


테스트 이후 주 3회 혼자서 달리기를 연습하고 매주 토요일 새벽에 모여서 트레이닝을 받는다. 그러나 나의 달리기 거부증은 나아지질 않았다. 여전히 숨이 너무 차고 한 걸음 한 걸음 떼는 그 순간들이 고통스러웠다. 매번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과 싸웠다. 달리는 걸 그만둘 이유는 백만 가지가 되고 멈추는 건 너무나도 쉬웠다. 그렇게 1킬로미터를 뛰기까지 몇 번을 달리고 서고를 반복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면 나만 힘든 것 같았다. 멤버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분은 하나도 힘들어 보이지가 있았다. '아니!!! 이 아줌마들이 왜 이렇게 잘 달리지?' 마스크를 쓰고 달리는데 하나도 숨이 차 보이지도 않았다. 턱스크를 하고 달리는 건 나뿐이었다. 나는 그 달리기 고수들을 보면서 부러워했다. 그 부러움은 나도 할 수 있다는 오기 같은 걸 발동시켰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달리는 능력은 오기로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말이다. 나는 그 모임에서 가장 초보 단계의 사람들과 같이 훈련을 시작했다. 괴로워하는 나를 보다가 운동을 전공한 남편은 한 마디를 더 거들었다. "내가 전공자로 이야기해 줄게. 원래 맨 몸으로 하는 운동일수록 타고난 신체능력을 극복하지 못해! 당신은 달리기와는 거리가 먼 몸을 타고난 거야! 너무 자책하지 마!" 나를 위로하려고 했던 그의 말이 더 화가 났다. 난 정말 노력해도 되지 않는 것일까? 정말 초보가 된 느낌, 아주 오랜만에 느낀 이 '초보'의 느낌이 불편했다. 지금의 실력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고수들을 따라잡기 어려울 것 같고, 숨은 턱까지 차 오르는 게 딱 신입사원 때 업무를 처음 받았을 때 힘겨운 그 느낌이었다. 



걷뛰 전략


이 벅차기도 하고 힘겹기도 한 느낌은 스타트업 이민 초반에 느낀 감정과 같다. 내가 그동안 회사에서 배우고 익숙하게 일을 처리한 방식들이 이 세계에서는 하나도 들어맞지 않았다. 보고서만 잘 쓰고 선후배들과 잘 지내고 윗사람이 시키는 걸 잘하면 일잘러가 되었는데 이곳은 그 방정식이 거의 통하지 않았다. 보고서를 쓸 일도 없고 기획이 아닌 실행이 더 중요한 세계였다. 그동안 나의 강점이라고 믿었던 무기들을 쓸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었다. 내가 잘 모르는 전쟁터에서 익숙하지 않은 도구들로 싸워야 하는 게 초보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이 불행 중에 다행인 건 오기가 발동했고 동시에 내가 다시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그때 처음 달리기를 시작하던 나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맞아!! 나 처음에 1킬로미터도 못 뛰었잖아! 스타트업 세계에 먼저 '적응'이란 걸 해 내야 '성공'을 말할 수 있어. 일단 적응을 해야 해! 달리기라는 새로운 세상에 내 몸을 맞추는 것처럼!"


다시 달리기 이야기로 돌아가서 내가 1 킬로미터도 채 달리지 못하고 걷다 달리다를 반복하는 모습을 보면서 코치가 다가왔다. 그리고 한 가지 방법을 제안했다. 지금부터 1킬로미터를 나누어서 걷기와 뛰기를 반복하라고 했다. 오롯이 달리는 건 그다음 단계라고 말이다. 걷뛰 전략은 아주 심플하다. 1킬로미터를 100미터 단위로 나누어서 걷기와 뛰기를 반복한다. 1단계는 900 미터를 걷고 100m를 뛴다. 2단계는 800미터를 걷고 200미터를 뛴다. 이렇게 100미터를 걷고 900미터 뛰기를 완성하면 자연스럽게 1 킬로미터를 완주할 수 있다.


말도 안 돼 이게 된다고??


결국 이 작은 성공 경험이 나를 계속 뛰게 했다. 걷뛰 전략으로 1km씩 늘려가던 나는 결국 러닝 크루들과 10킬로미터를 완주했다. 어느 순간 나도 마스크를 쓰고 숨을 헐떡이지 않는 그 멤버들 사이에서 함께 뛰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처음 하는 일은 누구나 서툴다. 잘 되지 않는 게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경력이 있는 우리는 시간이 없고 팔리는 '얼굴'이 있기 때문에 그 잘 되지 않음을 견디지 못한다. 그러나 이직하거나 직업을 바꾼 당신은 다시 초보가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힘을 적당히 빼고 걷뛰 전략을 세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적응하기 전에 스스로 포기할 수 있다.


1km의 힘


우리는 1킬로미터를 10번 달리면 10킬로미터가 되는 이 간단한 산수를 너무나 쉽게 잊고 산다. 커리어의 변화에 있어서도 1킬로미터에 집중해야 한다. 내가 1킬로미터를 달릴 수 있다면, 조금씩 늘리는 건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멀리 내다 보고 견고한 어떤 목표를 세울 수 있다면 가장 좋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러기 쉽지 않을 수 있다. 그럼 안 된다고 포기해야 할까? 억지로라도 만들려고 노력해야 할까? 그러기 위해서는 힘이 참 많이 들고 가령 그 목표가 잘못된다면 나는 헤어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른다. 떠나고는 싶지만, 바꾸고는 싶지만 그 목표 지점이 명확하지 않다면,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이 아니라 1킬로미터 앞의 목표를 세우기를 추천한다. 그 1킬로미터가 모이면 10킬로미터가 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읽은 [일하는 마음]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비슷한 생각이 적혀 있어서 깜짝 놀랐다. 저자도 달리기와 관련해서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리고 첫 번째 이직을 준비하던 중 저자는 직장인이 아닌 그 무언가로 살고 싶었는데 100% 바꾸기는 어려워서 자신만의 1킬로미터 트랙을 만들고 어떻게 다르게 살 수 있을지에 대한 것들로 채웠다고 한다.


단거리 목표가 채워지면 장거리 목표는 자연스럽게 맞춰진다. 중요한 건 방향만 맞추어 가면 된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이 누군가에게 변화의 순간을 제공하거나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를 바랐다. 그럼 나는 몇 번의 1킬로미터를 뛰었을까? 나는 이제 스타트업 이민 후 3년 정도가 시간이 지났으니 1달을 1km라고 한다면 1년이면 12km, 3년이니 36km 정도를 뛰었다. 매달 작은 목표를 세우고 하나씩 완성하는데 의미를 두기 시작했다. 첫 달은 노션과 슬랙으로 일하는데 익숙해진다. 다음 달은 보고서를 쓰지 않고 실행을 하면서 배운다. 그다음 달은 책이 아닌 시장과 고객에 대해서 배운다. 고객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실 대기업에서 있다 보면 end user를 만날 기회가 거의 없기 때문에 그 일이 가장 어색하고 불편해진다.


그 1km들이 모여서 무엇을 이루었나 생각해 봤다. 새로운 사업영역을 만들기 위해 2년간 많은 삽질을 했다. 이 땅인가 저 땅인가 삽을 들고 열심히 팠던 것 같다. 그리고 이제 막 PMF를 거쳐 시장에 선보일 수 있는 서비스가 탄생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모자란 부분이 더 많고 모든 것이 완벽하지 않다. 좀 더 확실해 진건 이 세계에서 살아남는 룰을 알게 되었고 조금 더 긴 호흡으로 뛰게 되었다는 점이다. 


내가 최초의 1km를 만들지 못했다면 그 뒤는 없었을 것이다. 

기억하자! 처음부터 10km를 뛰는 건 어렵다. 어쩌면 새로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내 속도에 맞춰서 최초 1km를 뛸 수 있다면,  1km씩 늘려가는게 더 빨리 10km를 뛸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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