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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레쏭 Jun 23. 2024

결정적 순간

The Decisive Moment


때의 의미

때가 있다.


얼마 전 재미있는 배민의 채용 광고를 보았다. 보자마자 ‘역시 배민이구나!’ 싶었다. “모든 건 때가 있다”는 문구가 이렇게 재치있게 쓰일 수 있다니 말이다. 이 포스터를 보니 배민에서 일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때’란 무엇일까? 어떤 일을 하거나 누구를 만나거나 그 ‘때’라는 건 정말 중요하다. 어떤 시기에 어떤 일을 하고 누굴 만나서 하는 게 인생의 방향을 바꾸기도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좋지 않은 결과나 힘든 시기를 겪었을 때 그 ‘때’는 그럴듯한 변명이 되기도 한다. ‘다 때가 아니었다’라는 말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때’는 내가 결정할 수 없는 걸까? 누군가가 정해놓은 운명이라 내가 바꿀 수 없는 걸까? 나도 내가 이민을 결심했던 그때를 생각해 보았다.


배달의 민족 채용 포스터




직장인 대표 거짓말

이 회사 때려치운다!


조선비즈 https://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7/08/2013070802056.html


직장생활을 막 시작한 신입은 모든 게 신선하고 새롭다. 한두 해가 지나가고 연차가 쌓여가면 만나는 사람도 활동 반경도 사무실 반경 10m를 벗어나지 않는다. 무서운 현상이지만 같은 사무실 생활을 하다 보면 생김새도 비슷해진다. 가족이 닮는 것처럼 먹는 것과 생활 패턴이 비슷한 꼴이 되어간다. 나와 꼴이 비슷한 사람들과 매일 같은 일을 하면서 나누는 대화의 주제도 어제와 오늘이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내일도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뭐 크게 다르지 않은 직장인이다. 매일 출근하면 동기 중 하나에게 반가운 메신저가 온다. "커피 한잔?" 그럼 우리는 늘 가던 그 카페에서 카페인 그득 담긴 아메리카노를 시킨다. 커피를 시키고 기다리는 사이 옆 부서 A 대리도 아래층 D 사원도 삼삼오오 짝을 지어 옆 테이블에 앉는다. 금세 그 카페는 회사 사무실 모습과 같아진다. 우리는 곧 어제 일은 얼마나 힘들었는지 누가 나를 괴롭혔는지 일과 사람, 불만, 고민에 대해서 두서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어느새 그 자리는 '누가 누가 가장 힘든가!' 대회 경연장으로 변한다. 그리고는 곧 모두가 경쟁이라도 하듯이 '그만두기' 허세를 부린다. 우리는 모두 안다. 결국 그 배틀을 하는 그 누구도 그만두지 않으리란 것을 말이다. 각 연차별로 하는 말들은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입사 3년 차까지 동기 모임

"야! 난 오래 안 다녀! 곧!" 


입사 5-8년 차 일에 독이 바짝 올라올 때

"00이 때문에 못 살겠어!" "내가 무서운 게 아니야! 더러워서 내가 그만둘 거야!" 


입사 8년 차 이상 미래가 걱정될 때 하는 말

 "난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있어!" "그런데 준비가 필요해!" "재테크만 성공하면 그만둘 거야!"



결정적 순간


결정적 순간 | The Decisive Moment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생 라자르 역’ ⓒHenri Cartier-Bresson/매그넘 포토/유로크레온

프랑스 사진작가 카르티에 브레송은 1952년 '결정적 순간'이란 제목의 사진집을 냈다. "누구에게나 결정적 순간은 있다.'라는 말은 사진에 관한 한 가장 유명한 표현이 됐다. 그는 카메라 렌즈가 맺는 이미지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사물의 절정의 순간을 우연히 잡아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거짓말하던 직장인 10명 중 한 명은 진짜 떠나는 결심을 하게 된다. 이 실행하기 어려운 거짓말을 그들은 어떻게 결심을 하는 걸까? 애당초 나갈 사람들은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있다가 사직서를 던지는 게 아닐까? 물론 사람마다 그 결심의 순간이라는 건 각양각색이다. 어떤 유형으로 한정 짓기에는 사바사 (사람 by 사람) , 케바케(케이스 바이 케이스)다.


나도 거짓말을 매일 하던 사람이라서 그 결심이라는 게 너무나 어려웠다. 왜냐하면 딱히 경정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스스로 그때를 정하지 않으면 결심하지 않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이라는 제한을 두었다. 신입사원 때는 그게 5년 뒤 30이었고, 30이 되었을 때는 '40'이라는 데드라인을 만들었다. 그 뒤로 '40'이라는 숫자를 주홍글씨처럼 새기고 살았지만, 정작 나의 나이 37-8세가 될 때까지 그만두어야 결정적 이유를 스스로 찾지 못했다. 어차피 나가도 비슷한 형태의 일을 할 테고,  현재의 직장은 나에게 더 안락하고 편안하다. 내가 선을 넘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 같지도 않다. 반면, 여기서 노선을 바꾸거나 다른 회사로 가게 되면 나는 다시 0부터 시작해야 하는 고난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갈팡질팡 하던 나에게도 '결정적 순간'이 포착되었다. 



나의 결정적 순간

평범한 그러나 결정적 야근


막연했던 나의 이직 허세를 현실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 결정적 순간은 언제였을까? 나도 잊고 있었던 그 순간을 끄집어내 보았다. 전략을 수립하고 기획하는 부서에서 일하던 나는 늘 연말이 바빴다. 새로운 해가 오면 또 그 전략이라는 걸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매년 12월이 직장인들의 농한기이지만 나에게는 일 년 중 가장 바쁜 농번기다. 매년 오는 1월이지만, 나는 새로운 전략 문서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날도 전략문서를 어떻게 쓸지 고민하던 중 10년의 전략을 분석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10년 치의 전략문서의 방향성과 어떤 액션 아이템들이 있었는지를 모두 찾아보았다. 그런데 결과가 충격적이었다. 지난 10년간 문서의 핵심 키워드가 거의 바뀌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표현, 문구들은 조금 달라졌을 수 있지만 10년 전 문서의 내용을 그대로 내년 전략 문서라고 해도 크게 손색이 없었다. 그 말은 곧 실행이 없었다는 것이다. 문서는 문서로 끝났을 뿐이었다. 나는 여기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오늘도 내가 키보드로 치는 이 글자들은 생명력 없이 죽은 문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말이다. 혹자는 그게 대기업의 생리라고 말할 수도 있다. 아마추어처럼 왜 그러냐고 말이다. 물론 나도 그걸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평소와 같았던 그날 그 새벽에 그 사실이 왜 그렇게도 새삼스럽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나는 일을 할 때 누구보다 빨리 배우는 Fast Learner라는 평을 듣고 살았다. 잘해서가 아니라 나는 배우는 걸 좋아한다. 그게 내가 좋아하는 일이면 더 미친 듯이 한다. 가방끈이 길지 않아도 특별히 똑똑하지 않아도 직장생활을 그럭저럭 한 건 바로 이 배우는 습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지금까지 움직이게 한 건 ‘성장’이라는 엔진이었다. 그런데 그날 밤 나는 변하지 않았던 10년간의 문서를 보며 나의 성장 시계가 멈추는 느낌을 받았다.


그 일을 함께한 다른 동료에게는 그저 평범한 농번기의 또 한 번의 야근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결정적 순간이 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어디에 서 있어야 내가 더 성장할 수 있는지 그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좀 더 바깥세상과 가까워질 수 있는 부서로 조직 이동을 준비했다. 이직을 향한 사전 준비가 시작된 것이다.




준비에 필요한 것


각찰:覺察


누구나 이런 결정적 순간은 온다. 그 순간을 나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하려면 그 결정적 순간이 타인 또는 외부 환경에 의해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 결정적 순간은 내가 그때를 알고 정해야 한다. 나는 이를 각찰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각찰은 불교 용어로 ‘일의 기미를 알아차린다’ 또는 ‘생각을 알아차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나의 순간은 남이 아닌 내가 정해야 한다. 남에 의해 정해지면 본전 생각이 많이 나고, 감정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그 거지 같은 00 때문에, 아주 0 같은 상황 때문에 나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지 말자! 그 손해는 고스란히 내가 입는다. 만약 감정적으로 결정을 할 것 같으면 결정을 잠시 보류할 것을 추천한다.


이직은 아주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준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도 이직의 순간에는 정말 많은 감정들이 몰려온다. 아쉬움, 슬픔, 억울함, 고마움 등의 이유로 눈물을 흘린다. 믿기 어려울 수 있지만, 퇴사 전 한 달간은 매우 센티멘털한 기간을 보낸다. 운전하다가 이별 노래만 들어도 내 이직을 말하는 것 같아서 울고, 길 가다가 갑자기 신입사원 때가 생각나서도 울고, 동기 선후배들에게 인사를 하다가도 갑자기 눈물샘이 차 오른다. 그리고 흐르는 눈물을 막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이직의 과정에서 감정적인 순간은 필연적으로 오기 때문에, 이직 준비를 그 수많은 감정들로 소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살면서 몇 번 안 올 수 있는 그 결정적 순간을 멋진 계획으로 연결시키는 일은 매우 차갑게 진행되어야 한다. 물의 온도를 갑자기 바꾸기 어려우면 서서히 움직이는 방법도 있다. 40도에서 30도로 그리고 20도, 마지막에 냉수마찰로 끝내는 것이다.


나는 결정적 순간 이후 이직을 실행하기 위해 3단계 계획을 준비했다.


1단계: 외부와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는 현업 부서로 옮긴다. 당시 나는 본사 스태프 부서에 있었기 때문에 바로 옮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당시의 이력은 다른 회사에서 매력적으로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2단계: 회사 밖 네트워크를 만든다.


3단계: 나랑 어울리는 일을 찾는다. 나의 이직의 대상은 회사가 아니라 일로 정했다. 이렇게 결심의 순간을 기반으로 계획을 세우고 나니 하루하루가 다르게 느껴졌다. 준비를 위해서 할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계획한 일이 하나씩 이루어졌을 때 나는 회사 밖으로 발을 한 걸음씩 내딛고 있었다.


지금 거짓말을 몇 년간 하고 있다면? 나의 결정적 순간을 정해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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