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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 Sep 14. 2022

형태가 있는 것은 부서진다.

Ep.123 김현창 - 아침만 남겨주고



가을이 왔다. 이유도 없이 헛헛하고 공허함이 밀려 들어오는 계절. 근래 많이 바쁘다는 핑계로 내 감정과 머릿속을 글로 정리한 바 없어, 몇 년 전 써두었던 글을 꺼내온다. (냉장고 속 맥주처럼, 이럴 때 기존에 써오던 글이 있으면 꽤나 든든해~) 이 글이 쓰였던 계절도 가을이었다. 올해 가을은 그리 헛헛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무엇인가를 ‘선호’한다는 건 ‘노력’으로는 조금 어려운 시기가 온다.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걸 따라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온전히 내 것으로 가지기엔 어려움이 있다. 수많은 노래와 영화를 추천하고 받지만 그럼에도 본인에게 맞는 노래와 영화는 일정 부분 취향이 있고, 만끽할 수 있는 영역이 제한돼 있는 것처럼. 노력을 할 순 있지만 딱 맞는 건 노력 외 영역이 필요했다.


오늘, 바다 같은 마음 한 켠에 꽤나 큰 플라스틱 조각이 들어왔다. 좋아하던 사람과 이어지지 못했고 그 방향은 순전히 일방향이었다. 나는 좋아했고, 그녀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처음 마주하는 크기도 아니거니와, 내 나이에선 며칠만 지나면 이내 원래대로 돌아온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요 며칠이 애매할 뿐.


역시나 좋다는 감정은 그 시작점이 노력이어도 그 이후엔 노력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절실하게 느낀다. 그래서 한 사람이 좋아진다는 건 생각보다 크고도 대단한 일. 좋아하는 감정은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저절로 된다. 내 의지와 행동과는 달리 나도 모르게, 스며들고 모든 행동이 부자연스러워진다. 갈 곳 잃은 손과 어쭙잖은 배려들. 정말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이 당연하다. 수많은 경험 끝에 조금이나마 자연스러워진 척 연기를 하게 된다.


반대로, 누군가 날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머리론 이해가 된다. 내가 못나서가 아니라, 인연이 아닌 것이다. 사람이 좋고 싫은 것엔 큰 이유가 없다. 작은 이유로 좋아지고, 작은 사유로 싫어진다. 노력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부분에 마음 쓰는 일은 상황을 결코 나아지게 만들 수 없다. 이를 너무도 잘 알고 있고 이해도 하지만, 가슴이 알기까진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많은 감정 중 유일하게 사랑만은 이해하고 해석해도 정리가 잘 안 된다. 그녀를 알게 된 시간은 내 인생 점 하나에도 못 미치는데, 온몸이 이에 반응한다니.


생각해보면 매년 이런 유사한,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비슷한 일을 겪고 나서야 겨우 그 생각이 났다. 오늘 하루를 온전히 어둡게 만든 이 기억도 언젠간 까마득히 잊히고 지워짐을 잘 알고 있다. 단지 시간이 필요할 뿐.


https://youtu.be/ciDT-csnX20


너의 밤은 부서지기 쉽고
가끔은 밤새 가라앉기도 해
그걸 보는 내 마음은
너를 따라 헤매어요

나를 찾지 않아도 돼요
나는 여기 옆에 있으니
뒤척이는 밤일 거라면
내 밤이라도 가져가 줘요


形あるものはいずれ壊れる

형태가 있는 것은 언젠가는 부서지기 마련.


일본에선 속담처럼 쓰이는 말이라는데, 이런 상황에선 참 와닿았다. 모든 형태들은 언젠간 부서진다.

아끼던 그릇도,

좋아하는 꽃도 사람도,

사랑하는 부모님도 나도.

지금 내 곁을 지키는 물건도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해봐야 10년도 더 된 것이 없었다.

모든 것들은 스쳐가고 부서진다. 잠시 곁에 머물렀다 떠나갈 뿐.


그래서 부서지기 전까지는 열렬히 사랑하고, 부서져도 너무 크게 아파하지 말 것. 형태가 있는 모든 것은 부서지기 마련이니. 오늘 부서짐은 또 다른 형태를 위한 시작이라며 부서진 오늘을 삼켜 넘긴다. 글을 쓰니 한결 마음이 나아진다.


좋아하는 사람과 가을에 헤어졌던 몇 년 전 이야기. 그 상대는 누구인지 얼굴조차 잘 기억에 나지 않는다. 여느 경험과 같았듯 그 시절의 글과 계절감만 남아있다. 아니 오히려 글을 보고 그때가 떠오른 정도이니, 사실상 아무것도 아닌 사이와 인연이 됐다.


사랑을 흔히 열병에 비교하는데, 가장 적확한 표현이라 생각한다. 뜨겁게 타올라 전부였던 시절이 있었고, 이내 평화로울   뜨거움이 전혀 가늠도 되지 않고 무감각해지는 열병. 나이와 상관없이 그런 사람은 있다.


올해 가을은 여느 가을보다 무던하고 평화롭기를. 나의 감정을 계절 탓하지 않도록. 사랑 충만한 가을이 찾아오기를.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줄여서 수플레)' 다섯 명의 브런치 작가가 매주 수요일마다 본인의 에세이가 담긴 음악을 소개하는 읽고 쓰는 라디오입니다. 잠들기  이름 모를 누군가가 추천해주는 노래를 듣고 싶으셨던 분들, 즐겨 듣는 노래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본 적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매주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주시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음악에 조예가 깊거나 전문적으로 음악에 대해서 잘 아는 '음. 잘. 알'들은 아닙니다. 그저 음악을 좋아하고 혼자만 듣기엔 아까운 나의 플레이리스트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일 뿐이죠. 비가 오는 날엔 비 오는 날 듣기 좋은 음악을, 너무 추워서 어딘가에 숨고 싶을 땐 숨어 듣기 좋은 음악을 한 편의 글과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글에 담긴 노래를 들으며 천천히 읽어 내려가시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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