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공원을 헤매고 돌아다닌 이야기
1986년 9월,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고 철암에서 인천으로 전학을 당했다.(내 의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당했다'는 말이 맞다.) 내 기억으로 그해 서울 아시안게임이 있었고 대학생들은 사과 모양의 채류탄에서 나오는 가스를 마시며 정권에 대한 비판을 이어가고 있던 시기였다. 집회를 하는 곳과 꾀 거리가 있는 중학교 교실에서도 사과 냄새를 맡을 수 있었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집회를 위해 모였는지는 짐작이 간다.
우리 가족이 탄광촌인 철암에서 인천으로 오던 날이 기억난다. 밤 기차를 타고 온 우리 가족은 청량리에 새벽쯤 도착했다. 나는 청량리역에서 인천으로 오면서 처음으로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은 1시간 30분을 달렸고 5분마다 서울에 있는 역에 멈춰 섰다. 드디어 인천에 도착했다. 인천은 생각보다 넓고 커 보였다. 처음 보는 것들도 많았다. 4차선 도로를 처음 봤고, 가로수가 크게 자라고 있는 모습도 처음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중학생인 나에게는 신기해 보였다.
나는 성인이 되고 나서 가끔 동인천역을 지나 자유공원을 가곤 했다. 자유공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라는 존재의 가치가 있는 곳이라고 백과사전에 적혀있다. 인천 중구 송학동 1가와 전동, 북성동 3가에 걸쳐 있다고 쓰여 있고 인천역에서 응봉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고도 했다. 어렵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동인천역이나 인천역에서 내려 차이나타운으로 올라가면서부터 자유공원이다. 동인천역과 인천역의 철길은 자유공원을 둘레길 삼아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공원 정상에는 맥아더 동상과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이 있다. 그리고 공원과 가까이 있는 차이나타운은 가족들과 가끔 들리는 곳이다.
내가 처음 자유공원을 방문한 것은 중학교 3학년 졸업앨범을 찍기 위해서다. 3학년 전체가 자유공원으로 모였는데 나는 인천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친구가 없었다. 혼자서 사진을 찍기 위해 자유공원을 방문했다. 어설픈 사진을 찍고 내려온 기억이 자유공원에 대한 내 첫 기억이다.
내가 전학한 중학교는 철암의 중학교와 달랐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학생들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 친구를 못살게 괴롭히는 아이들이 있기도 했고 의자를 집어던지는 아이들도 심심치 않게 눈에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중학교를 무사히 졸업했고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새로운 친구들이 생겼고 중학교의 그들과는 달랐다. 기독교를 아주 독실하게 믿는 기독교인들이었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중창단에 입단했다. 중창단은 10여 명 정도의 인원으로 구성되었는데 교회에서 어렵다고 생각하는 노래를 부르는 게 주목적이었다. 나는 지원하는 아이들이 많지 않아 손쉽게 중창단에 입단하게 되었다. 중창단은 매일매일 지겹게 노래 연습을 했고 1년에 한 번씩은 교회를 빌려 연주회를 가졌다. 나는 1학년과 2학년, 2번의 연주회를 가졌다.
중창단은 고등학교마다 있었다. 학교마다 있는 중창단들은 또 다른 사조직을 만들었는데 선교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나 역시 선교단에 가입했고 거기에서도 교회에서 부르기 어려운 노래들만 모아 불렀다. 중창단보다 인원이 많았기 때문에 나는 입만 벌리는 일이 많았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2학년 중반쯤 누군가의 의견으로 선교단의 취지에 맞게 선교를 하기로 결정했다. 선교단은 매주 토요일 6시에 자유공원에서 1시간씩 교회에서 부르는 노래를 부르기로 했다. 그렇게 다시 찾은 곳이 자유공원에 있는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이었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이만한 장소도 없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자유공원을 방문하지만 그때도 동인천과 자유공원은 가족과 함께 들려서 쉬거나 데이트하기에 좋은 장소였다. 우리는 탑 아래서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교회에서 부르는 노래를 불렀다. 노래가 끝나면 공원 여기저기를 활보했다. 20명이 넘는 남녀가 모였으니 얼마나 시끄러웠겠는가. 정해진 시간이 지나고도 공원 곳곳을 몰려다니면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수다를 떨었다. 모임이 끝나면 자유공원을 내려와 동인천의 칼국숫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고등학생이 보기에 양은 많았고 가격은 합리적이었다. 물론 친구들과 이렇게 다니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가끔 공부도 했다.
시간이 흘러 군을 제대하고 취업을 했다. 차가 생겼고 내가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발이 하나 더 생기니 인천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기 쉬웠다. 나는 벚꽃 필 무렵이면 동인천역과 인천역 철길을 따라 나 있는 국도를 달렸다. 벚꽃이 핀 자유공원을 한눈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시절 추억 때문이었을까. 자유공원에 피어있는 벚꽃을 볼 때마다 그때의 친구들과 함께 있었던 시간이 그립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가 들어 찾은 자유공원은 길이 조금 정비되었고 공연을 위한 시설물을 제외하고는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중학교 3학년 처음 공원을 방문했을 때 있었던 매점도 그대로 있고, 기상관측을 한다고 하는 관측소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나만 자유공원에 추억이 있는 것은 아닌 듯싶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고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모였던 장소도 자유공원 근처였고, 그들과 가끔 약속을 잡는 곳은 늘 동인천이었다. 남자들 몇 명이서 식사를 하고 찾는 곳은 자유공원에 있는 카페였다. 거기서 어김없이 추억의 수다를 떨었다.
벚꽃의 꽃말이 누구는 중간고사라고 한다. 중간고사 무렵 벚꽃이 피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벚꽃의 꽃말을 추억이라고 말하고 싶다. 꽃이 필 무렵 친구들과 함께 있었던 공원의 흔적과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은 나의 추억이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PS
내가 제법 글을 쓸 줄 안다는 건 최근에 깨달았다. 학교를 편입하고 글쓰기 수업을 듣고 중간고사(젊은 여성의 인내에 대한 글)와 기말고사(지금 이 글) 리포트로 글을 썼다. A+로 표시되어 있었고 세 자릿수 아라비아 숫자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