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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Feb 25. 2021

입 꾹 닫고 싶어 지는 회사 면담

공감 능력을 갖춘 자들과의 면담이 그리워지는 순간

2021년 O월 O일 오전 9시.


새로운 HR 담당자로부터 면담 제안이 들어왔다. 그 담당자는 현재 이 회사의 분위기가 너무 경직되어 있으며, 직원들이 입을 굳게 다물다가 홧김에 퇴사하는 경우가 많다며 전 직원들과 1:1 면담을 통 고충 개선과 더불어 밝은 직장 분위기를 만들어 내겠다는 포부를 내비쳤다.


그의 적극적인 행보에도 대부분 직원들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이미 여러 차례 본인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내비친 이들의 보직이 하루아침에 변경되거나, 타의에 의 갑작스럽게 퇴사하는 것을 여러 차례 지켜봐 왔기 때문일 것이다.


직장을 다니는 이유가 단순 자아실현이면 좋겠지만 대부분 경제적인 요인이 크다. 매달 빠져나갈 카드값과 통신비 외 각종 세 들을 떠올리자면 차라리 나 혼자  감고 참는 게 마음 편할 수도 있겠다. 굳이 입 밖으로 본인이 참고 있는 불만을 말해보았자 듣는 이에 따라 완전히 와전되거나 불만만 가득한 놈으로 낙인찍혀 미움받게 될 것이 분명하니까.


그날 오후 5시. 그와의 면담 일정이 잡혔다. 과연 어떤 종류의 면담이 이루어질지 살짝 궁금했지만 그동안 데인 상처들이 많아 큰 기대를 하지 않기로 한다.




약 8년 전 첫 회사에 재직할 때였다.

나는 모든 일에 의욕이 앞서 있던 사회 초년생이었다. 독특한 디자인이 가미된 소품이나 가구 등을 판매하는 회사다. 규모는 작지만 알록달록한 소품들과 통유리 창을 가진 깔끔한 사무실 인테리어는 입사 초반, 과중한 업무들도 견뎌낼 수 있을 만큼 나에게 큰 기쁨을 주곤 했다. 매일 같이 야근을 하던 상사들은 항상 퀭한 눈을 한 채 무표정한 표정으로 업무를 알려주었다.


업무에 적응하고 주위를 돌아보니 매일같이 바빠서 남아 일하고 있다고 생각한 상사들이 사장, 이사의 눈치를 보기 위한 야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팀장은 30대 초반의 여성이었는데 늘 사장과 이사의 눈치를 심하게 보며 줏대 없는 모습을 보였다. 그녀의 업무지시는 하루가 멀다 하고 바뀌길 반복했다. 항상 열정을 부르짖 디자이너 출신의 사장은 팀장 이하 직원들에게 늘 "야근은 열정이야! 나 때는 얼굴에 핏줄이 터질 때까지 일했어."라는 멍멍이 소리를 자주 내던지곤 했다. 본인의 감정을 이기지 못한 날은 팀장급들에게 인신공격들을 일삼으며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그의 짓밟음에 이미 익숙해져 버린 그녀는 퇴근 시간마다 사장과 이사의 방을 기웃거리며 그들의 동태를 살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늘 방을 떡하니 지키 집에 가 않곤 했는데 그런 상황이면 그녀는 "저녁 먹고 갈래?"라 야근 압박을 주곤 했다. 저녁을 먹고 돌아온 그녀는 할 일없이 멍 때리며 웹서핑을 하거나 의미 없는 업무자료 잠시 펼쳐 보며 핸드폰만 만지작 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일부 직원몰래 게임을 하며 시간을 죽이다 가기도 했다. 우리는 그렇게 밤 11시 12시까지 의미 없이 시간을 축내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야근 수당은 당연히 없었다.


당시 갓 사회생활을 시작해 어리바리했던 나는 미련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 의문과 분노를 지닌 채 약 5개월 정도를 참다가 팀장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어쩔 수 없이 업무적으로 발생되는 야근에 대해선 감내하려 하지만 단순히 눈치 보기 위한 야근을 원하지 않습니다. 제시간 안에 일을 다 끝내고 퇴근하고 자기 계발도 하고 운동도 하면서 제 시간을 쓰고 싶어요. 매일 밤 11시 12시까지 야근해서 건강도 많이 안 좋아졌고요."


순종적인 성향의 직원들로만 조합된 그 조직에서 나와 같이 주장을 하는 조직원은 처음이었던지 그녀는 어쩔 줄 몰라했다. 당시의 나는 아침 9시 출근 후 밤 11시 혹은 새까지 지속되는 야근을 반복하다 못해 온갖 건강 악화를 겪고 있었다. 몸에는 두드러기가 미친 듯이 올라왔고 위경련에 자주 시달렸다. 퇴근시간마다 반복되는 그녀의 "저녁 먹고 갈래?"는 명치를 세게 치는 듯한 고통을 주었다.


그녀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려 대며 아무 말이나 내뱉기 시작했다. 퇴근하고 병원에 가야 할 땐 본인에게 말하면 사장에게 보고 후 야근을 하지 않도록 해주겠다는, 마치 근무시간 밤 11시로 정해져 있다는 듯한 황당한 제안을 했다. 그녀의 아무 말 대잔치 "네가 아직 어려서 모르나 본데 이런 게 사회생활이야."라는 꼰대어로 마무리되었다. 당시 '꼰대'라는 단어가 활용화 되던 시기가 아니라 나는 그녀를 오직 '세뇌된 자 '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2012년도 혹은 2013년도였는데 열정이란 명목하의 노동착취, 그리고 라테는 말이야 등의 꼰대 행위 등이 지금 보다 더 무지하게 만연했던 때였다.


"이런 게 사회생활이야."라는 나보다 나이가 더 많고 직장생활을 더 많이 한 여자의 논리 없는 말에 나는 옳지 않다는 의문을 품으면서도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세뇌가 이래서 무섭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사장에게 막말과 모멸감을 지속적으로 들으면서도 의문을 품지 않고 똑같은 정신적 폭력을 다른 누군가에게 행하고 있는 그녀가 불쌍해 보이기도 했다.


면담 같지 않은 길고 긴 면담을 끝낸 날, 나는 퇴근시간에 가방을 들고 당당하게 그녀에게 인사했다.

"퇴근하겠습니다."

그녀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모니터만 바라보았다.


다음 날 나는 퇴직 의사를 밝혔다. 그녀는 나를 잠시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사장님, 이사님하고 얘기하고 퇴사해도 되는지 말해줄게."라는, 마치 "우리 엄마 아빠한테 물어볼게."와 비슷한 아이 같은 말을 했다.


잠시 뒤 돌아온 그녀는 "사장님, 이사님이 네가 더 다녔으면 좋겠대."라며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까지 너처럼 일 잘하는 직원은 없었어."라는 사탕 발린 회유를 속삭였다.


그날 이사는 나를 직접 불러 타일렀다.

"O팀장이 야근하라고 했니? 나는 야근하지 말라고 하는데 걔가 그렇게 너희를 괴롭히는구나. 야근하지 마 나는 직원들이 야근하는 거 싫어."

항상 전날 야근을 했는지 팀장을 통해 감시하며 이상한 사내 문화를 주도하였던 인물 중 하나였던 이사는 내가 느낀 불합리함이 모두 나의 팀장 탓이라는 뻔한 거짓말을 일삼으며 위선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서 나라는 직원에게만은 앞으로 야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특별한 혜택을 주겠다고 했다. 웃음이 나왔다. 야근을 하는 게 당연한 사항이 아닌데 나에게만 어떠한 특별혜택을 주는 것 마냥 선심 쓰듯 제안하는 행태가 몹시 불편했다. 또 이러한 사장, 이사의 끝없는 세뇌에 꼭두각시처럼 악역을 자처하고 있는 팀장의 무지함 화가 났다.


당장에라도 박차고 나오고 싶었지만 첫 회사에서 1년도 채우지 못한 채 나오게 된다면 이도 저도 안될 것만 같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우선 나에게만은 어떠한 회유책을 제안하는 듯 하니 몇 개월만 더 참아 1년은 채워 보자며 스스로를 토닥였다. 일은 평소와 똑같이 진행했고 퇴근시간에 맞춰 마무리했다. 퇴근시간이 되면 눈치 보는 행동은 하지 않고 영혼 없이 앉아있는 동료들을 뒤로한 채 업무를 정리하고 퇴근했다.


내가 야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업무가 누락되거나 문제가 발생하진 않았다. 그렇게 몇 개월이 더 지나 그 회사에 재직한 지 1년 정도가 될 때쯤이었다. 팀장은 다시 야근도 하또 다른 업무를 더 맡아 진행하라고 지시했다. 권고사직당했던 동료 A까지 거론하며 그의 일을 나에게 다 맡게 해 주며 경험을 키우게 해 주려고 그를 내쳤는데 이렇게 우리를 배신하는 것이냐는 상식적이지 않은 말들을 계속 내뱉었다. 이쯤 되면 몸도 괜찮아진 것 아니냐는 비아냥 거림도 덧붙이며. 


개선이 불가능해 보이는 그녀의 불쌍한 세뇌된 마인드 그리고 그 조직의 근본적인 폐해에 혀를 쯧쯧 차주고 싶었다. 더 이상 화가 나지도 않았고 울분을 토하며 개선을 바랄 만큼 일말의 애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이미 해탈한 상태였고 객관적으로 바라본 그 조직과 리더들은 그저 상식적이지 않을 뿐이었다.


나는 두 번째 퇴사 의사를 밝히며 여전히 "사장님, 이사님에게 가능한지 확인해 볼게."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말했다. "퇴사는 제 개인 의사가 중요합니다. 인수인계 기간까지 잡아 1달 기간 두고 말씀드린 거니 O월 O일자까지 근무하겠습니다."


몇 개월 전 그녀의 말도 안 되는 태도에 씩씩 거리 얼굴을 붉혔던 나는 차갑고도 차분해져 있었다. 나는 그 뒤 그들이 형식적으로 진행한 퇴사 면담에서 필요한 말 이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퇴사하고 좋은 곳 가면 감사 선물을 보내라는 이사의 황당한 농담에도 웃어주지 않았다. 윗사람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던 팀장은 내가 마지막 퇴근을 하며 인사를 건네던 날도 눈을 마주치지 않고 모니터만 바라볼 뿐이었다. 마지막까지 실망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곳에서 보낸 1년간의 시간들이 덧없게 느껴졌다.


그 회사는 약 1년 뒤 다른 곳에 합병되었고, 당시 마음을 나누던 일부 동료들 또한 학을 뗀 채 연이어 퇴사다. 친하게 지내던 동료와는 어린 나이에 잊지 못할 경험을 해서 우리가 독해질 수 있었다며 당시의 전우애를 바탕으로 한 우정을 몇 해 동안 쌓아가고 있으니 긍정적인 요소가 전혀 없었다고 할 수도 없겠다.


이렇게 첫 번째 직장을 힘겹게 퇴사한 뒤 몇 개월의 공백 후 규모가 꽤 큰 화장품 회사에서 약 3년 가까이 근무하게 되었다. 새로운 조직의 팀장은 불필요한 말을 아끼고 상대방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능력을 갖춘 40대 여성이었다. 체계적이고 상식적이었다. 업무에 감정을 싣지 않으려 늘 노력했으며 불필요한 야근은 지양해야 한다며 항상 직원들에게 보다 나은 근무환경을 위해 함께 노력해 줄 것을 당부했다. 누군가 야근을 자주 하는 모습이 보이면 어떤 업무로 인한 잔업이 많은지 확인 후 조정해주려 했다.


전 직장에서 크게 데인 덕분인지 새로운 직장에선 큰 불만 없이 지낼 수 있었다. 간혹 업무가 과중하게 몰리는 등의 스트레스를 받곤 했는데 그녀와의 주기적인 면담을 통해 효율적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었다. 상사인 그녀에게 감정적인 하소연은 절대 하지 않았지만, 직장 생활을 하며 발생할 수 있는 크고 작은 고민들에 대해 자주 상의하곤 했다. 항상 출 퇴근길 책을 들고 다니고 생각이 많아 보였던 그녀는 말수가 없었지만 적당한 유머 감각을 갖추었으며 배려심이 많았기에 늘 편안했다.


내 인생 두 번째 회사의 팀장인 그녀와의 면담은 부담스럽고 걱정되기보다는 항상 설레는 순간이었다. 면담을 한다고 해서 모든 부정적 상황들이 해소되진 않았다. 하지만 그녀 진심이 담긴 공감과 더불어 해결방안을 모색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로가 되어 다시 힘을 낼 수 있게 되었다.




대부분의 직장에선 주기적으로 다양한 종류의 면담이라는 것을 진행하는데 면담자가 누구냐에 따라 나라는 인간은 표현에 적극적인 일원이 되기도 하고, 입을 앙 다문 속을 알 수 없는 일원이 되기도 한다.


회사에선 절대 속마음을 내비쳐선 안된다고들 한다지만 내가 스트레스를 극도로 받아 극단적인 퇴사를 떠올릴만한 상황이 된다면 적극적으로 어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순간 최대한 감정적이지 않되 이성적인 방식으로 업무적인 것에 초점에 맞춰 내 의사를 표현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의견을 제시할 때 누군가는 본인의 일이 과중해질 것을 우려하여 커다란 방어벽을 치며 전혀 상관없는 대답만으로 일관한 채 관심한 태도를 보인다. 또는 지금 본인 혹은 다른 이들이 더 힘든 상황이라는 것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하거나 다들 참고 다닌다라는 공격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반면 또 다른 누군가는 당장 해결을 해주지 못하더라도 충분한 공감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곤 한다. 사안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부당함에 밤잠 설치며 쌓인 울분을 누군가 이해해 주었다는 느낌에 큰 위로를 받아 종종 다시 일할 의욕이 샘솟기도 한다. 




2021년 O월 O일 오후 5시.


고충 개선으로 밝은 직장 분위기를 만들어 내겠다는 자신감으로 가득 찬 HR 담당자와 면담을 시작했다.


그는 힘들거나 속상한 그 어떤 사소한 것이라도 숨기지 말고 본인에게 다 말해 달라고 요청한다. 아직 그라는 사람의 성향을 파악한 상태가 아니기에 나는 충분히 문제가 될 만한 사안들에 대해선 말을 아낀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해서 본인에겐 솔직해도 되니 제발 말을 해달라고 한다. 다들 말을 안 꺼내서 답답하다는 불평을 하며.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내가 앉은자리의 물리적 불편함을 언급하며 다른 빈자리로 이동하는 것이 가능할지에 대해 물어본다. 그는 잠시 고개를 끄덕 이는 듯하더니 갑자기 본인이 앉은자리에 대한 불평불만을 하기 시작한다. 먼지가 엄청 많고 소음이 심하다며  "환경이 다 맘에 들 수는 없는 거니까요."라는 내가 어렵게 꺼낸 고민을 굉장히 하찮은 것인 것처럼 취급하는 말까지 덧붙이며. 차라리  말고 이동하는 건 어려운 상황이 솔직하게 말해주는 게 나았을 것이다. 얼핏 보기에 단순해 보이는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본인이 많은 결재받기 위해 얼마나 번거로워 질지 굳이 일일이 설명하려는 그에게 "그저 가능한지 여쭤본 거였어요. 뭐든지 말씀해도 된다고 하셔서요."라고 웃으며 대답했다. 그 또한 잠시 멋쩍게 웃어 보이며 "그럼요 그럼요 다 말씀하셔도 돼요."라는 속마음과 충분히 달라 보이는 대답을 덧붙인다.


다소 관련성 없는 논리들을 확대해 펼치거나, 나의 고충 파악보다 본인의 고충 나열하는 것에 집중하 면담 시간을 채워나가는 그를 바라보며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직원들이 왜 말을 아꼈는지 너무나도 잘 알 것 같았다.


공감 능력을 갖추지 않은 자와의 면담은 지루하고 답답하다. 공감을 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도 보이지 않는 이에게 말을 많이 꺼낼수록 의도와 상관없 부정적인 낙인에 찍힐 것이 분명하다.


입을 잠시 닫고 회의실 창밖을 바라보며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린다.




[이미지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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