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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Jan 21. 2021

30대 직장인의 장래희망

"넌 꿈이 뭐니?"

"커서 뭐가 되고 싶니?"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지."

"하고 싶은 게 뭔지 찾는 게 중요하단다."


어릴 때부터 숱하게 듣던 말들.

나도 내 꿈과 장래희망이 명확하길, 내가 공부하고 싶은 분야가 명확하길 바랐다.


초등학생인 나의 장래희망은 몇 차례 바뀌긴 했으나 꽤나 명확했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리고 글을 끄적이는 게 어린 나의 즐거움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1999년도)  '다달 학습'이라는 문제집에 내가 쓴 시가 실린 뒤로 나는 크면 무조건 '책'을 만드는 사람이 되리라 생각했다. 당시 글쓰기를 배우러 다니던 글짓기 교실 선생님은 50~60대의 차분한 분이셨고 나는 그 분과 있으면 마음이 따듯해졌다. 말씀이 별로 없으셨고 내가 원고지를 빽빽하게 채워나가 글 검사를 받으러 나갈 때 짧게 한 두 마디 해주시는 말이 전부였으나 항상 고쳐야 점 지적하기에 앞서 칭찬을 먼저 하시는 분이었다. 글짓기 선생님의 직업이 뭐냐고 물어봤을 때 '아동문학가'라는 답변을 들었고 선생님은 직접 만든 동화책도 있는 멋진 분이 이었기 내겐 동경의 대상이었다. 연스럽게 나의 첫 장래희망 또한 "아동문학가"가 되었다. 내가 그런 분께 글쓰기를 배운다는 사실에 당시 어린 나의 마음은 항상 설레었다.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어느 순간 글쓰기 수업을 더 이상 다니지 않는 대신 피아노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계란을 잡듯이 손을 동그랗게 오므리고 동당 동당 피아노 건반을 누를 때 행복함을 느꼈다. 그때부터 초등학교 3~4학년 시기의 나의 꿈은 '피아니스트'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 꿈은 체르니 과정에서 조용히 접었다. 어려운 곡들을 접하면서 나는 더 이상 즐겁지 않았고 싫증을 내었기에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었다. 성인이 된 지금 젓가락 행진곡 정도는 칠 수 있기에 후회는 없다. (생각해보면 당시 피아노 학원에 가던 즐거움은 학원 앞에서 팔던 500원 컵떡볶이 가 더 컸던 것 같다.)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생 때부터는 명확하지 않은 내 장래희망에 대해 조바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장래희망이 뚜렷한 다른 친구들만 멋진 직업을 가진 성공한 어른으로 성장할 것 같은 두려움. 난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아이 었다는 생각과 사생대회에서 못해도 금상에서 장려상은 받는 아이니 이 재능을 살린다면 나도 성공한 어른이 될 것 같았다. 예고, 미대에 진학해야겠다! 그럼 '만화가'가 될 수 도 있고 '동화 삽화 작가'도 될 수 있겠지! 그렇게 나는 입시미술학원을 다니기 시작했고 초반에는 꿈을 포기하지 않겠다며 매일 밤 일기를 끄적이고 다짐했으나 석고상 아그리파와 줄리앙을 그리면서 점차 행복하지 않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칼로 4B연필을 깎아내면서도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맞을까' '내가 정말 미대에 가고 싶은 걸까'라는 고민은 날로 커졌고 중학교 3학년 초반 나는 예고 진학 준비를 포기하고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생각해보면 그 고통을 이겨내면서 까지 노력할 만큼 원치 않았던 장래희망이었던 것이다.


현재의 나는 내가 차마 더 채우지 못했던 예술혼, 멋진 미술 실력은 훌륭한 많은 예술가분들의 전시를 종종 보러 다니는 것으로 간접적으로 느끼고 갈망을 채우곤 한다. 또한 가끔 노트에 그림을 끄적이고 친구의 생일날 편지에 웃긴 그림을 그려 웃음을 선사해주 정도의 간략한 그리는 행위를 즐기고 있다.






그 이후 고등학생부터 대학생 그리고 20대 직장인 시기를 거치는 동안 나에겐 별다른 뚜렷한 장래희망 이 없었다. 어른들이 정해놓은 궤도에서 크게 안 벗어나면서 학업 활동을 마친 뒤 나를 채용해주는 회사에 입사해서 (물론 회사에 입사를 하고 퇴사를 하고 중간에 이직을 하는 과정 또한 고난과 인내의 순간들이었다) 스스로 수입활동을 해서 사고 싶은 물건을 사고, 취미생활을 하고, 가끔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선물을 하는 것에서 소소한 기쁨을 누렸다. 그러면서도 계속 불안했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이렇게 나는 꿈도 없이 목적도 없이 나이만 들어가려나.



내가 정확히 하고 싶은 직업이 뭔지, 무슨 일을 좋아하는지, 언제 행복한지 잘 모르다 보니 회사생활은 항상 지옥이었다. 회사에서 지시하는 업무들이 나의 전부인 양 해석했고, 업무가 남들에게 멋져 보이지 않는다면 나도 하찮은 사람인 것만 같았다. 즉 회사 내에서 자아실현을 하려 했고 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했으니 불행했던 것이다. 도피성 퇴사와 이직을 자주 떠올렸다. (물론 상식 이하의 행동을 하는 소수의 사람들로 직장생활이 고통스러운 상황도 많았지만)


괴로울 때마다 나와 비슷한 상황의 작가들이 쓴 글들을 읽었다. 책이고 인터넷 글이고 보이는 대로 많이 읽었다. 그 결과 외부적인 평가와 사회적 기준에 의해 내 가치를 인정받으려 하기 전에 우선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잘하는지 찾기로 했다. 


생각해보면 괴로웠던 회사생활 속에서도 내가 잘하고 즐거워하는 일을 깨달을 수 있는 요소는 많았다.


예로, 디자인 용품을 만드는 소규모 회사에 재직 중일 때 제품 중 일부에 문제가 있다는 잘못된 정보가 보도된 적이 있었고  당시 온라인 몰에서 발주를 담당하던 나는 긴급상황에 사이트 공지문을 직접 작성했다. 당시 이사님은 내가 쓴 공지문이 너무 마음에 든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외에도 나는 업무 논의를 할 때 전화보다 이메일 문의를 선호했다. 말보다 글로 내 의사표현을 하는 것이 더 자신 있었으며 내가 직접 작성한 글 양식이 업무적으로 활용될 때 소소한 희열을 느꼈다.


회사생활을 7년 정도 하면서 그저 한 달에 한번 찍히는 월급 정도로 내 가치를 판단하고 있을 쯔음, 심각한 슬럼프에 빠졌다. 회사 외의 일상생활 속에서 내가 잘하는 것들을 찾기 위해 필라테스, 요가 등 운동도 해보고 캘리그래피를 배우기도 했다. 그러다 깨달은 것은 내가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갔을 때 나를  스스로 치유하는 방법은   다이어리에 아무 글이나 끄적이는 행위라는 점이었다.(한번 쓴 글은 추후에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다신 보진 않곤 했지만)


그 이후 부담 없이 글을 쓸 수 있는 채널을 고심하다가 가입만 되어있고 10년째 아무 글 없는 네이버 블로그를 떠올렸다. 20대에 내 정체성을 찾지 못할 때 내가 가장 관심 있어하던 항목은 옷과 신발 등 패션 아이템들이었다. (지금도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관심이 많다) 그렇게 내가 착용하는 옷, 새로 구매한 신발, 가방 등에 대한 리뷰를 캐주얼하게 올리기 시작했다. 처음 한 문장을 적기까지 많은 두려움이 있었는데 막상 적고 나니 아무것도 아니었다. 패션 외에도 내가 자주 가는 카페, 식당 등에 대한 글도 쓰곤 했는데 글이 50여 개가 쌓이고 나니 점차 나는 주말을 이렇게 보낼 때 행복한 사람이었구나, 이런 옷을 입고 이런 음식을 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지 라는 걸 깨달았다.


어느 순간 블로그에 작성하는 리뷰 혹은 패션 아이템에 대한 글이 아닌 나의 감정을 정리하는 글을 써보고 싶었다. 즐겨 읽던 브런치 앱에 2개의 글을 어렵게 적어보았다. 작가 선정 전이라 발행은 안되었지만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브런치에는 정말 많은 작가들과 훌륭한 분들이 많지만 남들을 따라가는 것보다 내가 의식하지 않고 담담하게 적고 싶은 주제를 기록하고 싶었다.


감사하게도 브런치 작가 선정으로 나는 글을 발행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처음 월급을 받았을 때보다, 자격증을 따거나 수상을 했을 때보다 내가 좋아하는 일로 첫 번째 단계를 밟았단 생각에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글을 전문적으로 배우 않아 글을 전개가 매끄럽지 않을 수도 있고 배워가야 할 점이 많겠지만 꾸미지 않고 내 감정과 내 일상을 담담하게 적어나가는 글을 적고 싶다.






31세의 지금 내 나이.

어릴 땐 이때쯤이면 장래희망을 이미 이룬 어른이 되어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현재의 나는 지금도 하고 싶은 일을 지속하여 고민하고 꿈꾸던 일이 때론 사라졌다가 다시 스멀스멀 떠오르기도 한다. 글을 쓰는 작가 혹은 패션 에디터, 필라테스 강사, 따듯하고 꿈을 잃지 않는 엄마, 내가 좋아하는 아이템으로 꾸린 온라인 쇼핑몰 사장님 등.

어릴 때와 비교하자면 현실적인 요소와 대조하여 실현 가능성 여부를 따지는 꽤나 계산적인 어른이 되었다는 거겠지만.


최근 나의 장래희망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 결정적인 이유는 나의 엄마였다.

좋아하는 취미생활과 학문이 뚜렷했음에도 우리 삼 남매와 남편을 위해 한 가정에서 주부라는 어려운 역할을 30여 년 동안 해낸 그녀, 사실 엄마의 꿈이 뭔지 잘 몰랐고 관심을 가질 여유도 없었다 당장 내 꿈이 뭔지 몰랐기에.


엄마는 내가 대학생이 된 순간부터 엄마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하루 24시간을 그 누구보다 바삐 보냈다.

대학생 때 취미로 서예를 접했고 꾸준히 붓을 놓지 않았던 그녀, 어릴 때 엄마 따라 서예대회나 전시회를 자주 쫓아다니곤 했던 기억이 있다.


그녀는 근 7~8년 정도를 하고 싶었던 학문으로 석,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작품 활동을 꾸준히 했다. 어린 시절처럼 꿈에만 매진할 수 있는 시기도 아니었고 자식들의 보호자 역할, 혼자 계신 할머니의 딸 역할, 건강상으로 수술을 하는 등 감당하기 벅찬 상황임에도 엄마는 그 어느 때보다 생기 있어 보였다.


'꿈' 이 주는 힘이 얼마나 큰지 엄마의 두 번째 개인전을 치르면서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꼭 직업적이나 일에 대한 희망인 '장래희망' 이 아니더라도 어떤 가치를 중요시 여기고,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 중심을 잡는 것만으로도 일상 속 삶이 더욱 풍요롭게 느껴진다는 것을 느낀다.


난 지금도 어린 시절처럼 장래희망이 계속 바뀌고 있는 30대 직장인이다.


삶의 목적성은 유지하되 10대, 20대 때 보다 더 많은 '장래희망'을 가지고 꿈꾸고자 한다. (다만 현실적으로 금전적 요소를 더 이상 무시할 나이가 아니기에 꾸준히 수입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마음속엔 많은 장래희망을 품고 꿈꾸고 노력할 것이다.)


어느 순간 내 주위의 사람들은 서로에게  '꿈'과 '장래희망'에 대해 묻지 않는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묻게 된다면 부담스럽고 무례하게 느낄 수도 있기에 묻지 않지만,

우리 모두 하고 싶은 일을 꿈꾸고 행복을 위해 노력할 가치가 있는 존재들이기에 꿈을 가진 모든 이들을 마음속으로나마 조용히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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