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에 표기한 '깍두기' 란 무를 네모나게 썰어 양념에 버무려 만든 김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어느 쪽에도 끼지 않는 (혹은 못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단어이다.
어린 시절 놀이터에서 술래잡기나 얼음 땡 등의 놀이를 할 때, 게임의 룰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친구나, 또래보다 어린 동생들이 있는 경우 '깍두기'라는 특권을 부여해주곤 했다. 놀이터의 깍두기들은 술래나 벌칙자에 속하지 않는 대신 큰 책임감 없이 놀이를 즐길 수 있도록 보호받곤 했다.
20여 년 전 놀이터에서 주로 듣던 '깍두기'라는 단어를 직장 내에서 듣게 될 줄이라곤 생각도 못했다. N과장을 만나기 전까진.
직장 생활을 하며 내게 어이없는 상황을 가장 많이 선사해주었던 이는, 이직 후 만난 옆자리 N과장이었다. 그는 30대 후반의 남성이었으며, 내가 인지하고 있는 '과장'이란 직급의 의미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업무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직접 처리하지 못하는 일이 허다했다. 그가 처리하지 못하는 일들은 같은 팀 동료들이 답답한 나머지 대신 처리해주고 있었고, 어느 순간 그러한 분위기는 당연시되곤 했다.
이직 후 회사와 업무에 적응하는 것보다 N과장이 잘못 처리해서 발생한 사고를 뒷수습하는 것이 더 힘들었다. 관련 없는 타 업무를 하다왔다기에 그가 질문을 할 때마다 업무 내용을 정리해 설명해주었지만, 그는 전혀 메모를 하는 등의 노력도 보이지 않았고 심지어 다음날 다시 동일한 질문을 번복하곤 했다.
동일한 질문에 지쳐 "어제 말씀드린 대로 진행하시면 됩니다."라고 반응하면, 그는 "제가 정신이 없어서요, 그럴 수도 있죠 뭐." 라며 못난 변명을 늘어놓곤 했다. 누군가에게 업무적으로 도움을 받거나, 피해를 주는 것에 대해 그는 항상 당연하다는 태도를 유지했다.
그는 항상 엉망으로 작성한 보고서를 팀장에게 제출하곤 했는데, 회피 성향이 다분한 팀장은 그의 업무 미숙과 무책임한 태도를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기보다 다른 팀원들에게 그의 엉망인 보고서를 수정하게 하거나 대신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어느 날, 그가 해야 할 일을 며칠 동안 처리하지 않아 피해를 받던 A 동료와 나는 N과장에게 업무를 제때 처리하길 요구했다.
담당자별 업무를 명확하게 정리하여 표로 작성했고, 그 자료를 바탕으로 최대한 이성적으로 그리고 너무나도 당연하기에 다른 이들에겐 언급한 적 조차 없는 내용들에 대해 요청했다.
"N과장님이 담당하시는 업무들을 기간 안에 처리해주시길 바랍니다."
N과장은 본인이 업무를 제 때 처리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한 장황한 변명을 늘어놓은 후 망언을 내뱉었다.
"아 그럼, 그냥 절 깍두기라고 생각하세요!"
그는 양심도 책임감도 없는 태도로 뻔뻔하게 자신을'깍두기'라고 칭하며 상황을 피하려 했다.
"깍. 두. 기 요?"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나는 더 이상 표정관리를 할 수 없었고 회피하려 눈알을 이리저리 굴려대고 있는 N과장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아, 뭐 그러니까 그냥 표현이 그렇다는 거죠 뭐!"
그는 쉴 새 없이 볼펜을 딸각거리며 시선을 회피했고 그렇게 대화는 허무하게 종료되었다.
N과장은 본인을 깍두기라 칭하며 본인이 해야 할 실무들을 다른 동료들에게 지속적으로 떠넘길 궁리를 했고, 보고서를 취합해 팀장에게 제출하는 일에만 집중했으며, 임원들의 방앞에서 왔다 갔다 하며 바빠 보이는 상황을 연출하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다.
이외의 업무적으로 책임감이 없는 태도를 제외하더라도 N과장은 '사무실 민폐 유형의 표본'이 되길 자청한 것처럼 행동하곤 했다.
주위에 사람들이 앉아있음에도 개의치 않고 손톱을 깎았다. 심지어 그는 내 옆자리에 앉아있었기에 나의 청각은 따각 따각거리는 손톱 깎는 소리로 고통받았고 몰상식한 행동을 하는 자와 한 공간에 있다는 것이 매우 불쾌했다.
그의 손톱 깎는 루틴은 월요일 아침과 금요일 오후에 주로 반복됐다.불쾌한 '딱!' '따각!' 소리는 사무실 전체를 울렸다
모두 업무적으로 바쁜 상황일 때도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여유 있게 손톱을 깎았다. 본인보다 직급이 높은 이들의 등장엔 고개를 90도 이상푹 숙이며 조아리는 그이기에, 그들(상급자들)과 한 공간에 있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겠지만, 그의 주위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상사가 아니었으므로 신나게 깎아 댔으리라.
N과장이 여느 때처럼 손톱을 깎고 있던 날, 결국 분노가 차오른 나는 그 에게 개인적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N과장님, 다 같이 사용하는 사무실에선 손톱 깎는 행동 자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30대 후반의 성인인데 본인의 행동이 누군가에게 불편을 준다는 걸 누군가 지적한다면 멈추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잠시 뒤 도착한 답신은 '제가 손톱이 많이 까슬거려서 소리가 큰 것 같아요.'로 시작하는 장황한 변명들이었다. 항상 예상했던 반응을 늘 빗나가던 그이기에 익숙해질 법이 되었음에도 말도 안 되는 변명으로 가득 찬 답신을 보는 순간 속이 메슥거렸다.
"손톱이 까슬거리고, 소리가 작고 크고를 떠나서,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밀폐된 실내, 게다가 업무 공간에서 손톱을 깎는 건 에티켓이 아니라고! 손톱이 사방팔방 튈 수 있기에 위생상도 좋지 않고, 조용한 사무실에서 딸각 거리는 소음을 유발하기도 하고, 남들 다 바쁜데 넌 맨날 '난 모르겠어요' 라며 업무에서 손 떼고 손톱이나 깎고 있으면 열이 받아 안 받아? 아, 이런 걸 내가 나이 먹을 만큼 너한테 왜 직접 설명해야 돼?"
라며, 당장 일어나 소리치고 싶었다.
슬프게도 내가 속한 곳은 드라마가 아닌 현실이기에, 난 이성적인 인간이라는 결론 하에 분노를 잠재우고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사무실에서 손톱 깎는 건 예의가 아닌 걸로 압니다. 정 급하신 상황이면 화장실에서 깎아주세요.'
'이쯤 되면 본인도 자존심이 있는데 수긍하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업무를 계속 진행하려는데 그에게 다시 도착한 답신은 또다시 변명으로 가득 찬 내용뿐이었다.
그를 설득하는 것보다 내가 포기하는 편이 빠른 듯했다.
이 외에도 그는 수시로 쥐가 출몰한 듯한 '쯥쯥' , '찝찝'소리를 내며, 이 사이를 청소하는 행위를 하고 있음을 모든 이에게 실시간 중계로 들려주었다.
여럿 회사에서 근무를 해보았지만 이와 같은 유형의 사람은 처음 경험해보았기에 당혹스러웠고, 나와 다른 세계에 있는 생명체 같았다. 다른 동료들도 이미 그의 책임감 없는 태도와 상식 이하의 행동들에 혀를 내둘렀으나 대화가 통하지 않으니 방치하는 듯했고, 팀장도 여러 번 그에 관련한 건의를 받았음에도 상황을 회피하기에 바빴다.
여러 차례 그의 문제에 대해 건의했던, 다른 동료에게 팀장은 "걔가 부족하건 나도 잘 알아, 그냥 부족한 오빠라고 생각하고 챙겨줘."라는, 더 이상의 대화를 이어나갈 의지를 상실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수준의 답변을 내놓았다고 했다.
N과장이 매너 없는 행동을 일삼고, '자발적 깍두기'를 선포하며 업무적으로 책임을 지지 않는 행동을 하는 이유엔 팀장의 무책임한 태도도 포함되어 있음을 증명하는 발언이었다.
여러 사건 등으로 분노의 일렁임을 자주 겪은 이후, 그와 최대한 말을 섞지 않는 방법으로 내 정신건강을 지키려 노력했다.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건의한 끝에 다행히도(?) 나는 결국 N과장과 떨어진 다른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옮긴 자리에선 그의 손톱 깎는 소리와 이 사이를 청소하는 쯥쯥 소리 공격을 스스로 방어할 수 있는 조건 (귀마개를 하거나, 시야를 차단하는 등) 이 갖추어졌기에 전보다는 견딜만했다.
꽤 오랜 시간 자칭 깍두기인 N 과장을 관찰해 본 결과, 여전히 그는 월요일과 금요일에 주기적으로 손톱을 깎고 있으며, 다른 이들에게 업무를 떠넘길 궁리를 끊인 없이하고 시도한다, 또 항상 같은 내용의 질문을 일 년이 지나도 어김없이 하고 있다.
유일하게 변화된 점이라면, 사무실에서 손톱 깎는 행동을 지적한 몇몇 이들이 그의 자리 근처로 가게 된다면 손톱 깎는 행위를 잠시 멈추는 정도였다.
사무실에서 손톱 깎지 말기
자기의 일은 떠넘기지 말고 스스로 하기
남이 열심히 한 일 훔치지 말기
자발적 깍두기 N과장이 변화하길 바라는 3가지 사항이다.
아, 또 한 가지 사과받고 싶은 사항도 있다.
나는 김치의 한 종류인 아삭아삭한 '깍두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N과장을 겪은 이후로는 깍두기를 먹을 때마다 그대의 온갖 변명들이 떠올라 그다지 즐겁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내 사랑 김치 깍두기에게 모욕을 준 점 깊이 반성하길 바란다.
직장 내 '자발적 깍두기 N과장'의 긍정적인 변화로 아름다운 글을 마치길 바랐다. 하지만 아쉽게도 개선된 사항이 없었기에 이대로 관찰기를 종료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