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에 뭘 꼽지 않은 날

작은 도움 선물하기

by 안나

어느 목요일 오후 다섯 시 오십 분경. 본격적인 퇴근길 러시아워를 앞두고 곧 북적여질 고속터미널역 안에서 7호선을 탑승하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분홍색 꽃무늬 모자를 쓴 한 할머니가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목적지를 잃은 것이 분명한 불안감과 당혹감을 띈 채 서성이고 있었다. 탑승구로 향하기 위해 다가서는 나를 여러 차례 흘깃 보는 그녀의 눈빛이 느껴서 나 또한 그녀를 슬쩍 바라봤다.


"혹시.. 7호선 타려면 여기로 내려가야 해요?"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는 듯하더니 내게 살짝 다가와 조심스레 물었다.

"네, 내려가시면 돼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고 정확한 방향을 알기 위해 목적지를 물으려던 찰나, 그녀가 눈가에 인자한 주름이 띈 웃음을 보이며 다시 물었다.

"반포역에 가려면 여기서 타는 게 맞아요?"

여러 번 고뇌한 듯한 질문의 답은 생각보다 쉬웠다. 마침 내가 타려던 열차의 이동 방향과 일치했고 겨우 한정거장 이동하면 될 뿐이었다.

"네, 여기 내려가서 타신 다음에 한정거장 있다가 내리시면 돼요."

설명과 동시에 곧 도착할 열차를 탑승하기 위한 발걸음을 재촉하며 그녀를 살짝 앞질렀다.


"아이고, 고마워요. 고마워라. 젊은 사람들 다 귀에 뭘 꼽고 있어서 말을 못 걸겠더라고요. 다행히도 아가씨가 귀에 뭘 안 꼽고 있어서 물어봤어요. 고맙습니다."

마치 큰 은혜라도 입은 것 마냥 그녀는 연신 감사해했다. 곧 열차가 도착했고 나는 뒤돌아 그녀에게 고개를 슬쩍 숙여 인사했다. 그녀가 무사히 반포역에서 내릴 수 있길 바랐다.




불과 몇 년 전. 마음속 여유들이 악마들에게 무자비하게 잡아먹히던 때가 있었다. 스스로를 돌볼 여력 조차 없었던 그 시기의 나는 지하철역 방향이나 탑승구를 묻는 어르신들을 마주칠 때마다 짜증스러운 마음이 솟아나곤 했다.

'묻기 전에 지하철 노선도를 좀 보시지, 역에 다 쓰여있는데, 화살표가 저렇게 큰데!'

내 기준에서 그들의 질문은 간혹 너무나 터무니없었기에 그러한 질문을 받을 때면 마음속의 옅은 한숨이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올까 봐 숨을 몰래 한번 크게 삼키곤 했다.


약 한 달 전 돌아가신 내 할머니가 지하철을 타고 우리 집에 온 날이었다. 집에 들어온 할머니는 우리 가족을 위해 몇 가지 반찬을 챙겨 왔다며 무거운 쇼핑백을 건넸다.

"이렇게 무거운 걸 들고 오는 거면 전화를 하시지!" 나의 타박에 할머니는 지하철역 계단에서 만난 젊은 청년이 직접 아파트 공동현관까지 짐을 들어다 주었다고 했다. 요즘 모르는 사람 조심해야 한다며 짧은 잔소리를 더하자 할머니는 한눈에 봐도 선한 청년이었다며, 세상에 그리 서글서글한 청년은 처음 본다며 끝없이 칭찬을 이어갔다. 내 또래로 보였다는 설명도 여러 번 덧 붙였기에 왠지 모르게 죄책감이 들어 민망해졌다. 동시에 내 할머니에게 따듯함을 베풀어 아름다운 하루를 선물해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 청년에게 감사했다. 할머니는 그 이후에도 이름 모를 젊은이들로부터 받았던 도움들에 대한 기억을 더듬으며 종종 이야기하곤 했다. 흐뭇한 미소를 띠며.


총명한 모습으로 혼자서 지하철을 잘 타고 다니던 내 할머니가 늘 다니던 노선을 기억하지 못하며 어리둥절해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며 당황스러움을 느꼈던 날. 어르신들의 물음을 짜증스러워하던 내 생각이 너무나 내 기준이었음을 비로소 깨닫고 반성했다. 그 시대의 어르신들 중 글을 익히지 못한 분들이 많다는 사실과, 나에겐 선명하고 쉽게 보이는 방향 표시들이 침침한 그들의 시력에는 눈에 쉽게 띄지 않을 수 있다는,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사실들을 그제야 떠올린 것이었다. 내게는 늘 일상인 지하철이라 익숙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낯설기에 평소와 같은 빠른 판단을 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사실들을 배려하지 못했다. 다른 세대의 기준에서 바라볼 여유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지난달 할머니와 긴 이별을 하며 종종 그 청년에 대한 생각을 했다. 또한 일상적인 것들 조차 낯설어하고 눈과 귀가 침침해진다며 속상해하던 내 할머니가 느끼는 감정이 이 세상 모든 할머니, 할아버지들 그리고 더 나아가 미래의 나 또한 느낄 감정이라는 것을 마음과 머릿속에 새겼다. 내 할머니가 이름 모를 이들로부터 받은 감사함을 기회가 될 때마다 다른 누군가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선물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금세 현실을 사느라 그때의 그 다짐을 잠시 잊고 있었지만 다행히도 '귀에 뭘 꼽지 않은 날' 아주 사소하지만 고마운 기억을 낯선 할머니에게 선물해주게 되었고 그때의 그 다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귀에 뭔가를 꼽고 바삐 걸어가는 젊은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까 쉽게 말을 걸지 못하던, 작은 도움에도 끊임없이 고마움을 곱게 표현하던, 이름 모를 낯선 할머니의 눈웃음이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게 느껴졌다.




[이미지 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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