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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Jul 16. 2024

지붕을 빨리 허물어야 해

21. 알베로벨로(Alberobello)





바리 중앙역 뒤편 길가에는 인근 도시로 가는 버스들이 죽 늘어서있다.

유럽은 버스터미널이 따로 없이 이렇게 노상에서 승하차하는 경우가 많다.

노선에 따라 버스 회사도 다르다.

지정된 좌석이 없으므로 시간보다 좀 일찍 도착했다.


순식간에 20여 명이 줄을 섰다.

알베로벨로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린 여행자들이 모두 한 방향으로 걷는다.

띄엄띄엄 원추형 지붕의 집들을 지나다 보니 전망대에 도착했다.

복작복작 너도나도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다.


알베로벨로는 주민들이 주로 거주하는 리오네 아이아 피콜라(Rione aia piccola)와 예쁜 상점들이 많아 여행자들이 주로 찾는 리오네 몬티(Rione monti)로 크게 나뉜다.

전망대에서 바라보이는 곳이 몬티 지구이고 그 반대쪽이 피콜라 지역이다.






알베로벨로 지도




회색 고깔을 뒤집어쓴 하얀 집들이 영화 세트장같이 비현실적이다.

집들이 모두 하얀색이라 원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의 숫자가 더 많아 보일 수도 있겠다 싶다.

야트막한 언덕의 좌우로 트룰리들이 밀접해 있는 리오네 몬티의 골목과 상점에는 기념품이나 올리브, 와인 등을 판매한다.


상점들 역시 트룰리를 개조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크기가 작아 서너 명만 들어가도 복잡하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상점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는 곳도 있다.

들어가자마자 숨이 턱 막히는 듯하여 바로 나와야 했다.

은을 세공한 액세서리 가게, 리넨으로 만든 소품들, 미니어처 트룰로 등을 판매한다.

이탈리아 남부는 건조하기 때문에 섭씨 25도만 넘어도 해가 무척 뜨겁다.

잠시 커피를 마시며 쉬어가기로 했다.  













알베로벨로라는 이름은 현재의 이탈리아어로 직역하면 '아름다운 나무'라는 뜻이다.

나무라는 뜻의 알베로(albero)와 전쟁이라는 뜻의 라틴어 벨룸(bellum)이 합해진 말이다.

그곳은 고대부터 참나무가 우거진 지역으로 참나무는 단단해서 전쟁도구를 만들어 쓰기에 적합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일명 스머프 마을, 버섯집으로 불리는 이곳을 찾는 이유는 바로 그 독특한 모양의 집 때문이다.

트룰로(Trullo)라 불리는 이 집은 그리스어 톨로스(Tholos)에서 유래했으며 복수는 트룰리(Trulli)라고 부른다.


트룰리는 원뿔형 지붕을 가진 전통적인 돌 오두막인데 임시 대피소나 창고로 쓰이다가 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주거지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트룰리는 인근 지역에서도 볼 수 있지만 알베로벨로가 가장 보존이 잘 된 곳이어서 1996년부터 유네스코의 세계유산 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오늘날 트룰리의 복구와 유지 보수는 개인이 임의로 할 수 없고 알베로벨로 역사센터에서 일괄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세계 유네스코 유산이므로 일괄된 방법으로 복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트룰리는 납작한 석회석을 차곡차곡 들여쌓는 방식으로 지붕을 만드는데 일체의 모르타르와 회반죽을 사용하지 않았다.

즉 접착을 하지 않는 공법이다.

그러므로 쉽게 쌓고 쉽게 허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빗물은 돌 지붕을 타고 처마 끝에 돌출된 배수관을 따라 흘러내려 집 바닥 저수조에 저장된다.
원통형 지붕 아래에는 단 하나의 방만 있기에 아이들과 부부는 커튼으로 나눠 공간을 분리하여 생활하였다.


지붕 위에는 경우에 따라 하얀 페인트로 알파벳이나 십자가, 초승달, 해, 비둘기들을 그려놓았다.

이것은 당시 문맹이었던 주민들이 표시한 것으로 일종의 문패 역할이다.

또는 종교적인 염원이나 성인을 기리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기호를 그려놓기도 한다.









앤디 워홀의 사진이 있는 배너기가 마을 곳곳에 걸려 있다.

자세히 읽어보니 '라이프, 팝 & 록'이라는 제목으로 2024년 5월 18일부터 10월 20일까지 카사 알베로벨로에서 전시된다는 내용이다.

하얀 트룰로들이 모여 있는 알베로벨로에 그의 독특한 얼굴이 그려진 컬러 깃발이 휘날리는 게 왠지 넌센스 같아 보인다.

하지만 그의 팝아트를 좋아하는 여행자에게는 '꿩 먹고 알 먹고' 할 수 있는 기회라고 좋아하는 이도 있으리라.








알베로벨로에 이런 모양의 집을 짓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주거지에 부과하는 세금을 피하고자 세금 사정관이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집을 허물고 사정관이 돌아가면 다시 신속히 집을 짓기 위한 방법이었다고 전해진다.

말하자면 최초의 조립식 주택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비현실적으로 동화 같이 예쁘지만 그런 슬픈 스토리가 들어있다니 아이러니하다.


지붕을 만드는 석회질의 돌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는데 돌을 제거하게 됨으로 밭을 경작할 수도 있어 일석이조의 효과이다.


트룰리를 개조하여 만든 호텔과 에어비앤비도 있다.

하지만 집의 특성상 창문이 없거나 있어도 작으며 일단 공간이 협소하여 답답하다.

그러므로 나처럼 밀폐되고 좁은 공간에 대한 폐소 공포증이 있는 사람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곳곳에 구경할 수 있는 집의 안내문을 볼 수 있다.

파노라마 뷰를 볼 수 있는 발코니가 있다는 문구도 종종 보였다.

현재 알베로벨로의 트룰리 중 30%는 호텔, B&B, 레스토랑, 기념품 샵 등 상업 용도로 사용하며, 40%는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고 그 외 30%는 빈집이다.


광장 한쪽에 있는 코피노(Coppino)라는 레스토랑으로 갔다.

그곳은 손님이 가면 숫자가 쓰여있는 기다란 나무 숟가락을 하나씩 준다.

말하자면 테이블 넘버이면서 음식을 주문하는 번호이다.

그 기다란 숟가락 이름이 바로 코피노, 그러니까 코피노는 요리할 때 음식을 젓거나 음식을 푸는 데 사용하는 국자를 가리키는 풀리아 방언이다.

그곳 음식은 로사, 니나, 그레이스, 키아라 등 동네 할머니들의 레시피로 평점이 무려 4.8이다.






레스토랑 코피노
트룰리 내부에 주방과 주문대, 화장실이 있는 코피노
코피노의 메뉴를 만든 할머니들
주문을 받는 내부(트룰리)




큐알 코드로 메뉴를 스캔한 다음 주문할 음식을 고른 뒤, 트룰로로 들어가 카운터에서 주문을 하는 형태이다.

주문은 셀프로 하지만 음식은 직원이 가져다준다.

단 음식은 1회용 종이 그릇에 담겨있고 포크도 플라스틱이다.

그 점이 맘에 안 들었지만 맛은 있었다.


그곳 메뉴는 거의 대부분이 동글동글한 모양의 파스타이다.

그것은 알베로벨로가 속해있는 풀리아(Puglia) 지방의 전통음식, 오레키에테(Orecchiette)라는 파스타이다.

밀가루를 반죽하여 손으로 하나하나 눌러가며 만든 작은 귀 모양의 오레키에테는 주로 생토마토 소스 또는 브로콜리 소스를 사용한다.

미트볼이나 문어와 함께 요리한 오레키에테가 맛있었다.

디저트 부뉴엘로는 동그란 미니 도넛에 설탕가루를 묻혔는데 레몬향이 나서 느끼한 맛을 상큼하게 잡아주는 효과가 있다.


무엇보다 그날의 베스트는 맥주!

생맥주가 없다고 해서 추천해 달라고 했더니 가져다준 페로니가 으뜸!(마신 병의 개수가 증명)

바리에 오기 전에는 운전 때문에 점심 식사를 하면서 맥주나 와인을 마시지 못했다.

특히 맥주를 좋아하는 SH는 페로니로 인해 정말 행복해했다.

맘마 잘 먹는 아기를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처럼 바라보기만 해도 흐뭇하다.










맥주를 마시지 않는 나는 그동안 사진을 찍기 위해 잠시 자리를 떴다.

마을의 끄트머리 쪽으로 쭉 걸어간 후 골목으로 들어갔더니 상점이 없어서인지 관광객들이 뜸하고 조용했다.


알베로벨로의 중심부에 자리 잡은 샴 트룰리(Siamese Trulli)는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이다.

이 트룰리는 독특한 이중 돔 구조로 만들어졌는데 그 집에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트룰리에서 두 형제가 함께 살고 있었다.

형은 결혼하기로 약속한 여자가 있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동생도 그 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형제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이윽고 동생은 여자를 집으로 데리고 들어와 세 사람은 같은 지붕 아래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형이 두 연인을 쫓아내려고 했으나 동생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본인의 상속권을 주장했다.

결국 형은 트룰리를 반으로 나누고 집의 뒤쪽에 출입문을 만들어 독립적인 주거 형태를 확보했다고 한다.

이곳은 현재 기념품 샵으로 운영되고 있다.


지붕을 덮고 있는 석회암의 크기나 색깔이 모두 다르다.

그래서 더 아름답다.

아이보리색 돌이 섞여있는 지붕이 무늬처럼 예쁘다.

온통 화이트인 벽을 배경으로 분홍 피튜니아, 주황 베고니아, 빨간 제라늄, 하얀 재스민 등 컬러풀한 꽃들이 조화롭다.

고온 건조한 날씨 때문인지 선인장을 키우는 집이 많고 인테리어용으로 심은 포도나무도 심심찮게 보인다.

무엇보다 여행자들이 붐비지 않는 골목을 천천히 걷는 시간이 평화롭다.

한 블록만 건너와도 이렇게 다르구나 싶다.









아주 오래된 트룰리







지붕 보수를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잠시 쉬고 있는 인상 좋은 아저씨께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었다.

이렇게 정중히 물어보면 대부분 'Yes'

꾸밈없이 푸근한 아저씨의 사진이 맘에 든다.









M이 한 외국인의 부탁을 받고 사진을 찍어주는 모습이 보였다.

하얀 재스민꽃이 풍성하게 피어있는 배경으로 베이지 컬러의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금발의 아가씨였다.

나도 그녀의 사진을 찍었다.

이 메일을 알려주면 사진을 보내주겠다고 하니 아주 기뻐하며 흔쾌히 스마트폰에 주소를 입력해 주었다.

이름이 빅토리아라는 것만 알았을 뿐, 어디서 왔는지 뭘 하는 사람인지 아무것도 모른 채 헤어졌다.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한 걸 보면 혼자 여행하는 게 아니었을까 짐작할 뿐이다.


며칠 후 빅토리아의 사진을 메일로 보내주었다.

만일 사진이 맘에 들지 않더라도 좋은 추억으로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썼다.

그리고 사진을 받았으면 잘 받았다는 답장을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 메일은 그날 오후에 읽음으로 표시되었지만 지금까지 일언반구 말이 없다.

괜한 호의를 베풀었구나 싶다.


3년 전 프랑스 도빌에 갔을 때도 이번과 같은 일이 있었다.

해변에서 승마하는 사람들이 있어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들이 다가오더니 사진을 메일로 보내주면 고맙겠다는 요청을 했고 나는 약속을 지켰다.

그때 역시 짤막한 인사말과 함께 사진을 받으면 답장을 해달라고 했지만 클로이 역시 사진 메일을 받은 후 지금까지 답이 없다.

나로선 호의를 베풀었던 것뿐인데 도무지 알 수 없는 게 사람 마음이다.


로코로톤도로 갈 시간이다.










*프랑스 도빌 이야기


https://brunch.co.kr/@silviano/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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