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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 친구 지혜 Jan 17. 2021

의사 찾아 삼 만리1

부모님 좀 데려오세요

몸 어디가 조금이라도 아프면 우리는 병원을 찾기 마련이다. 이제는 지도 앱과 초록색 검색창을 통해서 어느 병원이 더 친절하고 병을 잘 고치는지 확인한 후에 병원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늘었다. 5분도 채 안 되는 진료를 받고 나오면서도 병원과 의사, 간호사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평가를 하는데, 진료 시간이 일반 병원보다 긴 정신건강의학과의 경우 자신과 잘 맞는 곳을 찾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나는 나와 잘 맞는 병원을 찾아 헤매다 지금은 4번째 병원에서 오래 진료를 받고 있다. 병원을 바꾼 이유는 서로 비슷한 구석이 하나도 없다. 첫 번째 병원은 검색 사이트를 통해서 소위 유명하다는 이유로 찾아갔었다. 유명세와 병원의 크기는 비례하는 듯했다. 딱 봐도 임대료가 비싸 보이는 건물에 단독으로 있는 병원이었으니까.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곳에서 만난 의사선생님으로부터 호통을 들은 후에 다시는 그 병원에 가지 않았다. 호통을 들어서라기보단 그때 처방받은 약이 나와 전혀 맞지 않았고, 내 생활권과도 멀었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을 먹고 나는 병든 닭처럼 며칠을 잠으로 보냈다. 아무래도 안되겠기에 이번에는 다니고 있던 상담 센터 선생님께 추천받은 근처 병원으로 향했다. 처음 갔던 곳보다 좀 허름한 건물에 빛바랜 초록색 벽지가 인상적인 병원이었다. 적막한 고요 속에 병원 대기실의 분위기는 침착하다 못해 소리가 모두 죽어버린 침묵을 무겁게 유지하고 있었다. 


두 번째 병원은 6개월 정도 다녔다. 의사는 중년 여성이었다. 같은 여성이라는 점 때문에 더 마음 편히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었다. 실질적인 나의 첫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선생님이었기에 나의 유년기부터 현재까지 내가 남들에게 못할 말들을 이리저리 흩뿌리듯이 뱉어냈다. 진료에서 오고 간 이야기는 나와 의사만의 비밀로 지켜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처음’이라는 단어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를 담지하는 가. 설렘? 풋풋함? 새로운 시작? 온갖 희망적이고 밝은 느낌의 단어들이 떠오르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 ‘처음’이라고 하면, 서툴고 휘둘리기 쉽고, 능력이 부족하다는 인상이 떠오른다. 


이는 아마도 두 번째 병원에서의 기억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곳은 내가 처음으로 내 속마음을 열어놓은 곳이었다. 내가 치유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나의 말들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고 비밀이라는 테두리 안에 고이 보관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처음이라서 그랬을까. 나는 의사를 너무도 신뢰하는 우를 저질렀다.


“다음 시간에 부모님과 함께 오세요.”


의사선생님의 말을 듣고 나는 조심스레 부모님을 병원으로 모셔왔다. 나 대신 어머니가 진료실에 들어갔고, 핸드폰을 쳐다보는 것도 지루해질 즘에야 어머니는 진료실에서 나오셨다.


나는 그날을 되돌리고 싶다.


단순히 나의 병명과 보살핌에 대한 주의를 어머니에게 알렸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나의 부끄럼과 수치, 그리고 분노와 무기력에 대한 나의 비밀들이 여지없이 나에게서 의사에게로, 의사에게서 내 부모님으로 전달됐다. 


뒤늦게 깨달았을 때쯤 이미 내 비밀은 더 이상 비밀이 되지 못했다. 나는 그 후 곧장 그 병원을 가지 않았다. 내 동의 없이 내 이야기를 타인에게 공유한 의사를 나는 더는 믿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그 병원을 갔을 때, 의사는 자신의 종교적인 가치관까지 나에게 강요하며 이런 말을 했다. 


“혼전순결을 지키세요.”


어쩐지 그 말 덕분에 나는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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