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소년이 온다>를 읽고
1.
《소년이 온다》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친구의 죽음을 목격한 중학생 소년 '동호'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동호와 연관되어 있는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 소설은 화자-주인공을 바꿔가며 진행되는데, 이들을 묶는 공통점은 '5·18 광주'를 직접 겪었다는 것, 그리고 '소년 동호'와 접점이 있다는 점이다. 아프게도, 이들을 잇는 연결고리는 생존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다. 이 죄책감은 친구 정대의 죽음을 목격한 이후 동호가 느끼는 죄책감에서부터 시작해 점차 다른 인물들에게 전이된다. 그리고 이 죄책감의 연쇄 고리는 소설이 끝나도 끝내 해소되지 않는다. 소설에서 보여주는 '5·18 광주'의 '희생자'였던 이들은 끝나지 않은 아픔과 슬픔 속에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 아픔과 슬픔은 단지 자신이 '희생'을 당했기 때문이 아니다. '소년 동호'에 대한, 그리고 그 당시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과 살아남았다는 부끄러움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스스로 그러한 감정을 놓지 않으려 한다. 이것은 그들 스스로의 '의지'로 나타난다.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거다. 나 자신까지도.
그러나 그녀 자신은 빨리 늙기를 원했다. 빌어먹을 생명이 너무 길게 이어지지 않기를 원했다.
마침내 도청 쪽에서 총소리가 들렸을 때 그녀는 잠들어 있지 않았다. 귀를 틀어막지도, 눈을 감지도 않았다. 고개를 젓지도, 신음하지도 않았다. 다만 너를 기억했다.
일곱번째 뺨을 잊을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기억을 애써 지우려 하거나, 자신이 했던 행동에 대해 합리화를 하려 하지 않는다. 소설 속에서 화해나 위로, 죽음 등으로 감정이 해소되지도 않는다. 그들은 생존의 고통을 붙잡으며 끝내 '동호'를 기억하고, '광주'를 직시한다.
우리들을 희생자라고 부르도록 놔둬선 안돼.
나는 아무것도 사하지 않고 사함 받지 않아.
이러한 점이 그들을 단순히 '희생자'로 부를 수 없는 이유이다. 그들은 독재 정권이라는 거악에 의해 일방적으로 희생당한 이들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굳건한 의지를 가진 인간이기도 하다. 소설은 이들을 “부서지면서 영혼을 갖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 사람들”로 보고 있다.
2.
학살과 고문의 기억은 예술작품(문학)을 통해 어떻게 재현될 수 있는가. 나는 《소년이 온다》를 읽은 날, 하루 종일 두통에 시달릴 만큼 힘들었다. 그들의 고통에 공감했기에. 하지만 이러한 독서체험으로 나(우리)는 과연 진짜 '5·18 광주'를 알 수 있을까. 그 당사자들의 체험과 감정에 우리는 절대 가닿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 재현된 '5·18 광주' 또한 실재했던 '5·18 광주'와 다를 수밖에 없다. 이 불가피한 간극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가 이러한 역사적 비극과 그 희생자들을 소재로 하는 예술작품에서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소년이 온다》에서는 작가의 유려한 문체를 통한 섬세한 감정 표현과 여러 화자를 통한 서술 방식을 통해 '5·18 광주'의 기억과 감정을 독자에게 생생히 전달한다. 하지만 이 작품의 좋은 점은 앞서 말한 '불가피한 간극'을 작품이 인식하고 있고, 그것을 독자에게 끊임없이 환기시킨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혼자서 겪은 일들을 그 자신에게서 듣지 않는 한, 어떻게 그의 죽음이 부검될 수 있습니까?
기억해달라고 윤은 말했다. 직면하고 증언해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5·18 광주'는 부검될 수 없다. '부검'이란 죽음이 일어난 원인을 밝혀내는 일이다. 부검이 그 목적을 달성한다면 그 죽음은 특정한 하나의 사인(死因)으로 고정되어버린다. 《소년이 온다》에서는 이렇듯 '5·18 광주'가 특정한 '사인'으로 고정되어 역사 속 사건으로 박제되는 것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움직이며 현재에 '소년'으로 '오기'를 것을 바란다. 또한 기억과 증언을 요구할 권리에 대해 소설 속 청자-독자에게 끊임없이 질문하며 역사적 비극을 재현한 이 소설을 읽는 행위에 대해 윤리적인 사유를 환기한다.
이러한 문장들 이외에도 《소년이 온다》의 가장 돋보이는 지점은 바로 '소년 동호'의 이야기가 담긴 첫 에피소드의 서술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이 에피소드에서 동호를 "너"라고 부르는 서술자의 위치는 불분명하다. "너"라는 지칭은 얼핏 독자에게 화자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하나가 아닐까 기대하게 만들지만, 소설을 다 읽어도 동호를 "너"라고 부르는 이 첫 에피소드의 서술자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동호의 시점으로 제시되는 첫 에피소드를 지나 동호의 친구, 정대의 영혼 시점에서 제시되는 두 번째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첫 에피소드에서 동호를 "너"라고 부르는 이 서술자가 무형의 영혼 같은 존재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러한 첫 에피소드 서술자의 위치 설정이 '5·18 광주'에 대한 이 작품의 '거리 설정'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소설을 매개로 재현된 '5·18 광주'라는 사태 속으로 들어가 어떠한 것이든 보려/읽으려 할 때, 그 어떤 곳에도 위치하지 못함을 인지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멀리 떨어져 관찰하는 객관적 위치(삼인칭 관찰자 시점)를 포기하고 '5·18 광주' 안으로 들어와 헤매는 것. 즉, 재현의 간극과 불가능성을 독자에게 체험하도록 만드는 장치라고 생각한다.
3.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 시점에서 다시 광주의 기억을 환기하는 이 작품을 읽어야 할까. 이에 대한 답은 소설 속에서 너무도 명확히 제시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광주로 상징되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은 아직도 우리 사회 도처에 있다. 국가의 권력이 약자를 폭력으로 짓밟는 이러한 사태가 여전히 발생한다면, 광주를 되돌아보는 일은 유효할 수밖에 없다.
분수대에서 물이 나와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제발 물을 잠가주세요.
물이 나오는 분수대를 우리가 어떻게 하겠어요. 다 잊고 이젠 공부를 해요.
하지만 현대사회는 갈수록 우리에게서 죽음과 비극을 가리거나 빨리 잊기를 강요하고 일상으로 복귀하기를 유도한다. 나에게 《소년이 온다》는 이처럼 '광주'가 삭제된 일상, 즉 "아무렇지 않게 물이 나오는 분수대의 물"에 대한 애절한 항의처럼 읽혔다. 또한 성찰을 잊은 국가권력과 "재건된 광주"를 외면한 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광주를 다시금 아프게 떠올리기를 요청하는 선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20년 8월 16일에 덧붙이는 말
이 글은 아마도 2016년에 썼을 것이다. 텍스트를 바탕으로 발제와 토론을 진행하는 대학교 전공 수업 때문에 《소년이 온다》를 읽었고,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한 번에 끝까지 내리 읽은 그 날 겪은 두통에서 비롯해 쓴 글이었다. 이 글에 직접 언급하고 있진 않지만 분명 나는 세월호를 생각하고 이 글을 썼을 것이다.
내가 다닌 대학교는 안산에 있었다. 2015년에 캠퍼스 내에서 세월호 1주기 추모제가 소박하게 진행되었다. 복지관 건물에는 세월호 추모제를 알리는 대형 현수막이 걸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대학교 축제가 열리는 시기가 되었고, 세월호 추모제 현수막이 걸렸던 바로 그 자리에 학교 축제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렸다. 그 대체된 현수막을 보고 표현하기 힘든 아주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소년이 온다》의 분수대 이야기를 읽으며, 그때 느꼈던 복잡한 감정의 실마리를 찾은 것 같았다.
2016년엔 그나마 열렸던 추모제 대신 세월호 리본 고리를 나눠주는 천막 하나가 설치, 운영되었다. 그리고 축제가 열렸다. 다음 해에는 그마저도 찾아볼 수 없었고, 어김없이 축제가 열렸다. 이러한 세월호 이후의 (너무도 안온하고 평범하고 흔한) 대학교 캠퍼스의 풍경은 여전히 가끔 떠오른다. 나 또한 그 안온하고, 평범하고 흔하디 흔한 캠퍼스 풍경을 이루는 인물 중 하나였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