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하기 전에 글을 써서 다행이야
어영부영 퇴사하고 꼬박 두 달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내가 잘한 거라고는 1. 영어학원 다니기 2. 집안 살림하기 정도다. 패기 넘치게 끊은 영어학원은 출석률만 좋았다 뿐이지 예습 복습은 해본 적이 없고 산더미 같은 과제고 제때 제출하긴 했어도 늘 마감시간을 코앞에 두고 부랴부랴 하기 일쑤였다. 자연스럽게 집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눈에 띄는 집안일이 많아졌고 살림하는 게 처음으로 즐거웠다.
뭐 틈틈이 부업으로 글도 좀 쓰고 서른 맞이 책 내려고 원고도 좀 만졌어도 이내 귀찮아져서 손을 놔버렸다. 그리고 이번 주, 편도 수술을 앞두고 회복하는 동안 아무것도 못할 생각에 뭔가 해치워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별안간 글을 쓴다.
비자발적 퇴사는 어찌 됐건 나에게 적지 않은 좌절감을 안겨줬다. 두 달간 정신 차리지 못할 정도라면 상심이 컸나 보다고 누군가 그랬다. 세상이 마음처럼 되지 않아도 자기중심에는 스스로가 있다고 생각하고 마음 잡고 살아야 한다고. 충격받고 헤롱 거려 봐야 스스로에게만 해로우니 어서 다시 마음 잡고 또 도전하고 인생 설계하라고. 그의 말에는 이모티콘도 문장부호도 하나 없는데 어떻게 마음에서 마음으로 바로 와 닿는 걸까.
진심 어린 조언과 나 빼고 모두 열심히 사는 것 같은 기분에 일이라도 해보자 하고 랩탑을 열었다가 내 처지를 돌아보게 됐다. 덜컥 3개월 커리큘럼의 영어학원을 친구 따라 결제해버린 것과 올해 내내 벼르기만 했던 편도 수술을 하겠다 마음먹고 제 발로 병원까지 찾아간 것 모두 한 순간의 결정에 따른 행동이다. 하지만 계획하고 실행하지 않는 것보다 생각나면 바로 실행하는 것이 결과를 더 빨리 볼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걸 몸소 깨달았다. 이번 기회에 나는 철저히 타의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것과 나에게는 무척 관대한 잣대를 대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더불어 혼자서도 꾸준히 무언가를 이뤄가는 사람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됐다.
하나 달라진 게 있다면 예전의 나는 그런 사람을 부러워하고 질투해서 꼭 저렇게 되어야지! 하고 생각했다면 지금의 나는 와 그 사람 진짜 대단하다.. 나는 나의 길을 가야지! 하고 생각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렇게 변한 데에는 당연히 장단점이 있는데 장점이자 단점 중 하나는 나를 더 이상 채찍질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고 장점은 내가 나답게 살기 위해 고민하는 시간이 들었다는 것이다. 단점은 너무 내 속도만 고수하느라 (어쩌면) 주변 사람들의 속도에 발맞춰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20대에 줄곧 해왔던 고민과 방황과는 차원이 다른 느낌이다. 그때의 나는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이나 조직에서 인정받을 수 있을까 하며 달려왔다면 지금은 어떻게 나를 위한, 나를 만족시키는 삶을 만들어갈까 고민한다는 것이다.
지난달에는 거금을 들여 글쓰기 모임에도 참석했었다. 어떻게든 물리적인 제한을 두어 생각하던 걸 실천하려 했던 건데 되려 슬럼프가 오고 말았다. 내가 쓰는 글을 누가 읽고는 싶을까? 궁금해 하긴 할까? 하며 그간 만들어 온 글들이 죄다 꼴 보기 싫어져 버렸다. 다행히 그 와중에 목차를 만들면서 더 필요한 것과 부족한 것, 빼낼 것 등은 걸러낼 수 있었다. 그마저도 장족의 발전이라 생각하고 스스로 응원했다면 이만큼 깊은 구덩이에 빠지지는 않았을 텐데 아마 내게 그간 없었던 글 태기가 왔던 것 같다. 오늘 이렇게 뭐라도 쓰고 나면 좀 나아질까 해서 두서가 없어도 아무런 말을 내뱉어본다.
아이러니한 것은 작정하고 브런치에 썼던 글보다 부족하고 완성도 낮은 것들을 모아놓은 블로그의 글이 훨씬 보기가 좋다는 것이다. 그래서 브런치도 블로그처럼 써보려고 하는데 플랫폼 특성상 뭔가 잘~써야 할 것 같은 부담감에 편하게 생각하기가 어렵다. 지난 5월에 어떻게든 써봤던 1일 1 글쓰기의 효과가 진짜 진짜 괜찮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번 달도 한 번 해볼까 한다. 운동도, 인생도 권태기가 오듯 나에게도 글 태기가 온 것뿐이니까.
여기보다 쬐끔 더 괜찮은 블로그 보러가기!
https://blog.naver.com/aurart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