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mmer Studio Nov 18. 2017

나의 미운 아빠에게

처음으로 쓰는 편지


안녕 아빠. 

나는 이제 스물아홉에서 서른이 되어가는 중이야. 시간 정말 빠르지? 열일곱 살, 천방지축, 아빠한테 바락바락 대들던 소녀는 어디로 갔는지. 아빠는 열띤 사춘기 소녀였던 나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기억하겠지?

나한테 아빠도 그래. 12년 전, 혹은 그 이전의 모습만 남아있어.

늘 술에 취해있던 그 모습 말이야. 늘 절망 가운데 살던 그 모습. 그때는 몰랐지. 다들 그렇게 살았고, 살다 보니 달라질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는 걸. 난 그때 사춘기였고, 세상의 중심이 온통 나여서, 나만 그렇게 사는 줄 알았어. 우리 아빠만 그렇게 절망 가운데 사는 줄 알았어. 


아빠가 우리 곁을 떠나고, 세상까지 떠나게 되었을 때. 그때로부터 12년이 흘렀어. 그동안 엄청난 일들이 많이 일어났어. 그중 가장 엄청난 일은 말야, 내가 곧 서른이 된다는 거야. 아빠 딸이 곧 서른이 되어. 아빠가 처음 아빠가 되었던 그즈음이 내게 도래한 거야. 어떤 드라마에서 이런 대사가 나왔어.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라서.’  


어떻게 보면 정말 당연한 말이잖아? 세상에 아빠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으니까. 근데 난 그런 줄만 알았던 거야. 아빠는 아빠의 자격을 갖추고, 아빠가 될 만한 사람이 아빠가 된다고 말이야. 그래서 아빠가 술에 취한 모습을 보면 화가 났던 거야. ‘아빠라면 아빠 다운 모습을 보여 봐. 그럼 나도 아빠 대접해줄게.’ 독한 말 뱉었던걸 용서해줘. 


아빠가 가고 나서, 한참이 지나서야 아빠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어.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하고 세상 여기저기를 떠돌며 ‘철 없이 충분히 사랑받아야 하는 시기’를 박탈당한 채 살아온 한 남자에 대해서 말야. ‘나의 아빠’가 아닌 ‘한 남자’의 삶을. 

개인으로서도 서툴고 치열한 삶을 살았던 남자가 결혼을 하고 첫 아이를 낳게 되었지. 남편으로서도, 아빠로서도 서투렀던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거야. 내 나이도 지금 서른이 다 되어가는데, 나는 아빠만큼 치열한 삶을 산 것도 아닌데,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많은 부분에서 서툴어. 이런 내가 엄마가 되는 거구나,를 깨달았을 때 아빠의 그 모습을, 아주 조금 이해하게 되었어. 아빠도 많이 무서웠겠다. 책임져야 하는 가족들은 늘어가는데 아빠는 여전히 서툴고 가진 것이 없어서 많이 두렵고 고통스러웠겠다. 나는 아빠가 술을 마시고 우리를 괴롭힐 때마다 ‘아빠도 나처럼 고통스러웠으면 좋겠다.’라고만 생각했는데, 아빠도 고통스러워서 술을 마시고 삶을 주체하지 못했었다는 걸 이제야 이해하게 된 거야. 


기억나는 장면이 있어. 가구도 없이 텅 빈, 가장 불행했던 기억이 모두 응집된 그 빌라에서 있었던 일이야. 중학생 정도 되었던 나는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고, 아빠는 작은 방에서 수제 텐트를 만들고 있었어. 아빠는 손재주가 좋았잖아. 아직도 그 텐트를 만들던 천의 감촉이 기억나. 신기하지. 아빠의 목소리는 기억나지 않는데 그 감촉은 기억이 나. 

나는 아빠에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던 모양이야.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무튼 내가 ‘마지막이야’라고 했나 봐. 아빠는 그 천 위에 하얀색 초크로 여기저기 선을 그으면서 이렇게 말했어. 


‘부영아, 마지막이란 말은 하지 않는 거야.’


왜 이 말이 이제까지 기억에 남아있는 걸까? 달리 말하면, 왜 잊히지 않는 걸까? 이유는 잘 모르겠어.

그 날의 그 장면만큼은 아직까지 기억에 그대로 남아있어. 아빠를 미워했던 마음조차도 그 장면을 훼손하지 못해. 거의 유일무이한 아빠와 나만의 추억이니까.


엄마가 그러더라. 아빠가 나를 낳고 나서 딸이라 너무 기뻐 또 술을 마시러 갔었다고. 정말 아빠답다고 생각했어. 나는 단단한 복숭아를 좋아해. 시장에서 엄마랑 같이 단단한 복숭아를 고르는데 ‘너희 아빠가 단단한 복숭아를 좋아했어.’라고 하더라고. 그랬구나. 미움과 비례하는 딱 그만큼 사랑한다는 말이 맞아. 내가 세상에서 가장 미워하는 사람이 아빠였는데, 가장 사랑하는 사람 또한 아빠였음을 이제는 인정할게.


아빠를 용서한다고 말하기 위해서 쓴 편지가 아냐. 아빠를 사랑한다고 말하기 위해서야.

그때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아빠, 나도 언젠간 엄마가 되겠지. 부모가 될 거야. 그때가 되면 아빠의 마음을 더욱더 이해할 수 있겠지? 그럴 거라 생각해. 아빠의 첫 딸, 갓 태어나 영롱한 눈빛으로 아빠의 눈을 바라보았을 그 딸이 처음 쓴 편지를 부디 받아줘.



외로운 아빠를 가장 많이 닮은, 큰 딸 부영이 씀. 



다시 보니 참 잘생긴 우리 아빠


매거진의 이전글 자존감이 낮다는 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