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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날씨 Jun 18. 2021

독점적인 관계는 싫지만 너라면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믿어?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믿어?



첫눈에 빠진다니, 나는 대번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걸 믿을 만큼 순진하지 않아. 믿지 않기만 하는 게 아니라 엄밀히 말하자면 그런 사랑을 은근히 깎아내리는 쪽에 가까웠다.

그 사람이 어떤지 알고 첫눈에 반해? 결국 외모에 끌리는 거잖아. 그건 사랑이나 애정이 아니라 단지 욕정일 뿐 아닌가? 글쎄, 진정한 사랑이란 그런 게 아닐 거야.

굳이 따지자면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나도 몰랐지만, 그렇지만 그저 외모에 반하는 성애적 열정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 거라고 막연히 장담했다. 겉모습만 중시하는 가볍고 저열한 사람들이나 믿는 거라고 생각했다. 너를 만나기 전까지. 너를 마주한 순간, 내 일생을 바꾸어놓은 그 순간, 어떻게든 너를 좋아하게 될 거라는 직감이 번개처럼 나를 강타하기 전까지.

그러니까 사람은 쉽게 장담하면 안 된다. 내가 오만했다. 함부로 단정 짓거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 확신하는 일은 흑역사를 만들기 십상이다. ‘가벼운 사람들이나 첫눈에 반하는 거야’와 같은 말을 혹시라도 그럴 기회가 있어서 tv에 출연해서 빈정거리거나 세상에 대고 확성기로 떠들고 다니지 않아서 다행이다. 속으로만 조용히 생각하다 말아서 정말로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너를 만난 건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방학이 시작된 지 며칠 지나지 않았고 나는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드라마 <연애시대>에 빠져 있었고 노영심의 ost를 따라 부르며 경쾌하게 청소기를 밀던 오후에 문득 전화를 받았다. 학기 초에 가입했던 어쿠스틱 밴드 동아리의 기장이라 했다. 나는 내가 몇 기수인지도 잊어버렸는데. 한두 번 모임에 나가다 흥미를 잃었었다. 그는 쾌활한 목소리로 내가 드럼부였던 걸 언급하며 엠티에 가서 합주를 하자고 했다. 드럼이라, 단지 드럼을 배우고 싶은 마음 하나로 든 동아리였다. 드럼에 대한 흥미 때문인지, 전화 너머 쾌활함에 동한 건지, 드라마만 보던 방학의 무료함 때문인지, 평소의 나라면 하지 않을 대답을 해버렸다. 동아리방에서 만나자고 하는 제안을 엉겁결에 승낙한 것이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동아리방에 찾아간 그 날, 문 밖에 앉아있는 너를 만났다. 집에 가려고 동아리방을 나서는 참이었다. 아마 그 안에서 여러 사람들에 섞여 너를 보았겠지만 문 밖에서 너와 단둘이 눈을 맞추었을 때, 나는 괜히 네게 인사를 건네고 싶어졌다. 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미 네가 좋았다. 이 세상에서 너의 존재를 처음으로 안 날이었을 뿐인데.

나는 사교적이지도 않고 붙임성이 있는 타입도 아니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 다가가 먼저 인사를 건네는 류의 사람이 아니다. 그러기 싫다기보다 그러기 어려워하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 순간엔 내가 원래 어떤 사람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성향이 행동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내가 아는 건 지금 너에게 인사를 건네고 싶다는 것, 그뿐이었다. 그밖에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없었다.

“안녕히 계세요.”

너에게 말했다. 짧은 한 마디 인사였다. 지나치게 공손하긴 했다. 그렇지만 우리 관계를 시작하게 만든 첫 마디인 것이다. 그때 나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친해지고 싶다면 가벼운 인사부터 시작하면 된다는 인간관계의 단순한 진리를.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던 것이 그 순간에는 타고난 듯 자연스럽게 습득되어 있었다.

우리는 나이가 같았지만 나는 그곳에 처음 찾아간 신입이었고 너는 꽤 오래 활동하고 있는 주축 중의 주축 멤버였다.

“네, 이따 메신저에서 만나요.”

네가 싱긋 웃었다. 너의 답 같은 거 상상하지도 않았는데. 그저 인사를 건네는 것만으로 족했는데. 너는 순식간에 내게 다음 약속을 잡았다. 돌아보면 너와는 항상 그랬다. 나는 넘쳐나는 마음을 어쩌지 못해 토하듯 너에게 표현하고, 그거면 되었다 여기는데 너는 내 말을 붙잡고 다음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나는 내 행동만으로 족하다고 여기지만 네가 한 발 더 나아가면 또 그게 그렇게 좋았다.

메신저라면 동아리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온라인 SNS를 말하는 것일 테다. 아까 기장에게 안내를 받았다. 여름 엠티가 얼마 남지 않아 MSN에서 모여 계획을 짜고 있다고 했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노련한 멤버가 신입생에게 베푸는 단순한 친절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메신저에서 만나자는 말에 설레고 말았다. 마치 데이트 신청이라도 되는 마냥. 어서 컴퓨터를 켜고 싶어 발끝이 간질간질했다.


막상 경험하고 보니 첫눈에 빠지는 사랑이란 단지 겉모습이 전부가 아니었다. 물론 외모가 좋았다. 내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매력적인 너의 모습.

그렇지만 첫눈에 반할 때 보게 되는 외모는 단지 이목구비가 어떻게 생겼고 키가 몇이고 그런 문제를 뛰어넘었다. 외양이 큰 비중을 차지하긴 하겠으나 생각만큼 절대적인 비중도 아니었다. 밖으로 보이는 것에는 의외로 많은 것들이 있었고 거기에는 그 사람의 내면이 분명히 담겨 있었다.

네가 말하는 태도가 좋았다. 목소리를 내는 방식이 좋았고 눈빛이 좋았다. 어떤 눈으로 다른 이를 바라보는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웃는지, 그런 걸 놀랍게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사람에게는 그간의 경험과 지식이 차곡차곡 축적되어 나름의 데이터베이스가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누군가의 눈빛 한 번, 손짓 한 번, 대수롭지 않은 말 한 마디로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타인을 평가하고 판단하는지도 모른다. 거기에는 오류도 있을 것이다. 편견과 고정관념이 존재하는 이유일 테니까. 그렇지만 좋은 것에는 더 정확한 시스템이 작동하는 것 같다. 나는 네가 정확하게 좋았다. 그리고 너는 첫인상과 그리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 이후에도, 언제나, 내가 너를 아프게 할 때에도.




사랑님이 메시지를 입력하고 있습니다



그날 밤, 우리는 메신저에서 만났다.

너는 그때 무슨 마음이었을까? 한 번도 물어본 적 없다. 궁금하지 않았다. 너라는 열병에 빠져있을 때는 우리의 시작 같은 거 중요하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벅차고 들뜬 흥분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처음 같은 열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매일이 시작과 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에 과거를 회상하듯 시작을 떠올리는 건 아주 나중이었다. 그리고 그때는 더이상 너에게 무엇도 물어볼 수 없게 된 후였다.

너와의 대화는 매끄러웠다. 네가 매끄러운 덕이었다. 너의 말이 대화창에 뜰 때마다 나는 미소를 짓고 웃음을 터뜨렸다. 기억도 나지 않는 이야기들을 끝없이 나누었다. 너의 농담에 자주 웃었다. 가끔은 너의 농담을 못 알아들어 인터넷에 검색을 했다. 검색을 해도 잘 나오지 않았다. 너의 농담을 알아듣지 못하는 게 속상했다. 재치있게 받아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서 또 속상했다. 그렇지만 좋았다. 네가 하는 모든 말이 웃겼다. 나는 웃음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네 말을 기다렸다.

그날 이후 여름방학 동안 날마다 메신저에서 널 만났다. 밤새 이야기하는 날도 있었다. 네가 접속하면 나는 무엇도 더 바랄 게 없었다. 메신저에서 널 기다리다 네가 입장하는 알림이 뜨는 장면을 보는 꿈을 꾸곤 했다.

‘사랑님이 로그인하였습니다’ 알림이 뜨면 바로 네 아이디를 클릭했고, 네게 말을 걸었다. 대화창 아래에 ‘사랑님이 메시지를 입력하고 있습니다’라고 뜰 때면 마음이 환해졌다. 가끔 가다 네가 다른 일정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오늘은 만나지 못하겠구나 싶은 생각에 급격히 시무룩해졌다. 갑자기 모든 게 지루해졌다. 그래도 오늘 밤엔 다른 일이 있다고 네가 알려주는 게 기뻤다. 내가 기다리는 걸 아는구나, 너에게도 나와 메신저에서 만나는 게 중요한 일인지도 몰라. 너의 말을 붙잡고 밤을 보냈다.




네가 장미꽃을 주었다



그러다 오프라인에서 널 만나는 날이 오면 심장이 뛰고 혈액순환이 잘 되어서 그런지 피곤한 줄을 몰랐다. 널 볼 수 있다면 몇 시가 되었든 씻고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가령 오후 다섯 시는 우리 집에서 하루가 저무는 시각이다. 엄마는 저녁 식사 준비에 한창이고 나의 경우 저녁을 집에서 먹으려면 얼추 귀가해야 하는 그런 때다. 그러므로 그 시각에 새로 씻고 나갈 준비를 한다는 건 우리 집에서 아주 특이한 일이다. 하루종일 세수도 안 하고 빈둥거리다가 다섯 시에 씻으려 어기적 욕실로 향하면 반드시 “다 늦어 어딜 가려고!”라는 엄마의 호통이 뒤통수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래도 아무렇지 않았다. 엄마가 뭐라 하든 나는 너를 만나러 가야 했다. 평소라면 하루를 마무리하는 때에 널 만나는 하루를 시작하러 뛰어갔다. 널 만나러 가는 길에는 피곤함을 몰랐다.

그날은 네가 친구들과 공연하는 날이었다. 너는 동아리에서 하나, 친구들과 하나, 두 개의 밴드 활동을 했다. 집에서 공연장까지는 지하철을 타고 한 시간을 가야 했다. 엄마의 호통도, 왕복 두 시간의 대중교통도 아무런 방해물이 되지 않았다.

공연장에는 동아리 사람들이 잔뜩 와 있었다. 너는 사랑 받는 사람이었다. 모두가 입을 모아 네가 매력적이라 말했다. 동아리 안에서 너는 천재로 통했다. 음악을 잘 해서, 재치와 유머 센스가 남달라서, 글을 잘 써서, 똑똑해서, 따뜻해서, 모두가 너를 찾았다. 묘하게 별나지만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사랑받을만한 방식으로 별났다. 동아리 안에서 너의 이름은 귀엽게 바뀌어 불렸고 나는 사람들이 너를 그렇게 대하는 게 좋았다. 다들 네가 멋지다고 해서 네가 더 좋았다. 아마도 나, 평판에 약한 사람인가.

공연장은 좁고 캄캄했다. 너는 잘 보이지 않았다. 네가 연주하는 걸 보고 싶었지만 사람들에 가렸다. 그래도 너와 같은 공간에 있어서 좋았다. 음악 비트에 맞춰 가슴이 뛰었지만 음악이 아니라 너 때문이었다.

쉬는 시간에 너와 동아리 사람들과 함께 우르르 밖으로 나왔다. 지하에 있다 나오니 한결 상쾌했다. 우리는 편의점에 들어가 음료를 골랐다. 차가운 공기가 맴도는 음료 코너 앞에서 너는 문득 내게 장미꽃 한 송이를 내밀었다.

“이거 가질래?”

투명한 비닐에 싸인 길거리에서 흔하게 파는 빨간 장미였다. 공연한다고 누군가에게 받은 선물인 듯 싶었다. 다른 사람에게 받은 걸 다시 나에게 줘도 되나? 준 사람이 보면 언짢을 텐데. 그런 걱정을 하면서도 순식간에 마음이 벅차올랐다. 네가 내게 장미꽃을 내밀고 있다. 그게 전부였다. 어디서 난 건지 알게 뭐람. 황홀하게 덥석 꽃 줄기를 잡았다. 나는 이 공연에 와서 모든 걸 이루었다. 너를 만나기 전부터 생겨난 마음의 생채기들이 한꺼번에 낫는 기분이었다. 너는 내 후시딘이었다.




모든 걸 신경 쓰는 난데 너만 보였어



버스 가장 뒤쪽에 올라 탔다. 너를 바라보기에 최적의 장소다. 너는 내리는 문 옆에 앉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올라간 바지 사이로 발목이 드러났다. 나는 너의 양말도 좋아.

한창 발목 양말이랄까, 신발을 신으면 양말이 보이지 않는 짧은 목의 양말이 유행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너는 꿋꿋하게 목이 긴 양말을 신고 다녔다. 그게 유행에 저항하겠다는 태도인지, 양말이 복숭아뼈를 덮는 느낌이 좋은 건지, 양말 디자인으로 승부를 보겠다 인지, 아니면 단지 아무 생각 없이 고등학생 때 신던 양말을 그대로 신는 건지는 결코 알 수 없다. 이유는 상관 없었다. 그냥 네가 신었기 때문에 네 양말이 좋았다. 유행과 상관없이 긴 목 양말을 신는 게 좋았다. 아마 짧은 목 양말을 신었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좋아했겠지만.

너의 가방이 좋았다. 네 옷에 달린 단추가 사랑스러웠다. 너의 머리칼을 만지고 싶었다. 너를 옆에서 바라볼 때 네 눈동자의 옆모습이 또랑했다. 너의 손마디가 예뻤다. 네가 선택했거나 선택하지 않은 모든 것이 좋았다. 너라면 다 좋았다. 네가 조금 어색하게 뛰어오르듯이 걷는 게 귀여웠다. 웃을 때 어깨를 열심히 들썩이는 것에 덩달아 흥이 났다. 박자를 맞추느라 엄지를 펴고 따봉을 만들어 바닥을 두드리는 게 멋졌다. 다른 사람의 말에 온 얼굴 근육을 사용해서 웃을 때면 내 마음이 뜨끈해졌다. 기타 위에서 너의 길고 뭉툭하고 단단한 손가락이 움직이는 걸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네가 농담을 치기 전에 새어 나오는 희미한 웃음을 참으려 광대와 턱 사이 근육을 움찔거리는 게 사랑스러웠다. 모든 걸 받아줄 것 같은 부드럽고도 단단한 네 눈이 좋았다. 나를 그대로 모두 받아들여 주면서도 깊이 꿰뚫어 보는 눈이 좋고 부담스러웠다. 네 앞에선 아무것도 꾸밀 수 없을 것 같았다. 너는 너무 멋진 사람이라 나는 나보다 훨씬 더 멋지게 보이고 싶었다. 나를 꾸미느라, 그렇지만 언제나 성공하지 못해서, 힘들었다. 너를 보면 항상 너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싶었다. 네가 너무 좋아서 힘이 들었다.


여름 엠티에 가는 내내 너만 보고 있었다. 버스에서, 기차에서, 걸어가는 길 위에서 끝없이 눈으로 너를 좇았다.

같은 기수들과 준비했던 공연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한 달여간 몇 팀이 합주를 준비했고 나도 그 중 하나에 끼었다. 다 같이 즐거운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건 친밀감과 소속감, 애틋함 같은 걸 선사했다. 엠티라든가 신입생 행사 같은 이런 것이 다 사람들을 동아리에 잡아두려는 전략일지도 모른다. 몇 해를 걸쳐 효과가 입증되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합주를 준비하고 공연을 해내면서 동아리와 사람들에게 점차 마음을 붙여갔다.

신입생들의 공연이 모두 끝나고 밤이 무르익고 있었다. 사람들은 즉흥 연주를 하고, 요리를 하고, 술을 마시고, 게임을 하고,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가, 하나둘 잠에 들었다. 그리고 너는 깨어 있었다.

네가 깨어있는 한, 나는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네가 곁에 있으니 에너지가 펄펄 났다. 그토록 잠이 많은 사람인데, 어렸을 때부터 양육자가 키 크라고 열 시에 재우던 이래로 열 시만 되면 졸기 시작하는데, 너만 있으면 거뜬히 뜬 눈으로 밤을 샐 수 있었다. 각자 방에서 메신저에 접속해 밤을 샌 적은 있었지만 곁에 나란히 앉아 뜨는 해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마지막까지 안 자고 남은 무리에 끼어있는 나를 보며 사람들이 의외라고 놀라는 말에 슬며시 웃었다. 해가 뜨고 각자 잠시라도 눈을 붙이기로 한 후, 사람들 틈에 끼어 누워 눈을 감자 충족감이 밀려왔다. 온종일 너와 함께 보낸 첫 번째 날이었다.


엠티가 끝나고 이제 방학은 채 한 달도 남지 않았다. 나는 매일같이 동아리방에 갔다. 동아리방은 너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그곳에서 최대한 너를 느껴야 했다. 거기를 벗어나면 너와 같이 있을 수 있는 이유가 사라지니까. 어떻게든 더 가까이서 너를 느끼려 발버둥을 쳤다. 남들이 어떻게 볼지는 신경 쓸 새가 없었다.

너의 무릎을 베고 누워 졸았다. 네가 내 무릎을 베도록 했다. 네가 시키는 메뉴를 따라 시켜 점심을 먹었다. “사랑이도 간대?” 네 이름이 나오면 귀를 쫑긋 세웠다.

너를 좋아하는 마음이 자꾸 드러났다.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해야만 했다. 네 무릎을 베야만 했고 네가 있는 곳에 가야만 했고 너를 바라봐야만 했다. 너를 맴돌 수밖에 없었다. 나는 너를 맴도는 행성이었다.

바라만 봐도 좋았다. 더이상은 바라지 않았다. 독점적인 관계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해서 갑자기 세트로 묶이는 건 싫었다. 남자친구, 여자친구라는 단어가 이상했다. 나는 그냥 이렇게 너를 바라보기만 해도 좋은 걸.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바라보는 것처럼. 나는 이대로 충분해.


내가 너를 좋아하는 걸 아는 친구가 다가왔다. 아마 동아리의 모두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전에 사랑이가 그림이 좋아했던 거 알아?”

너와 그림은 유달리 사이 좋은 남매처럼 보였었다. 단지 그뿐인 줄 알았는데.

“둘이 잘 지냈는데 그림이가 미팅 나갔다가 애인을 사귀어 버린 거야. 그래서 사랑이가 한동안 정신 나가서 시험도 망치고 그랬어.”

너에게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나의 깨달음은 희한한 방향으로 튀었다. 내가 원할 때면 언제든 네가 거기 있어 줄 거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내 손이 닿는 곳에, 내 눈에 닿는 곳에 언제나 네가 있을 거라 믿었다. 지금 너의 무릎을 베고 밤새도록 메신저에서 대화하는 건 네가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너에게 다른 사랑이 생긴다면, 더는 네 무릎을 벨 수 없게 된다. 한 발자국 뒤에서 너의 발자국을 따라 걷는 게 더이상 내 것이 아니게 된다. 널 바라보는 것이 허락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너의 과거 사랑 이야기에서 나는 네 미래 사랑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이대로 충분하다는 건 네 옆자리가 비어서 가능한 사치였다. 그걸 알고 나니 조바심이 났다. 나는 널 언제까지나 바라보고 싶은데 독점적 관계는 맺고 싶지 않다. 난 어쩌면 좋을까. 반짝반짝 빛나는 나의 별, 네가 내 하늘에 떠 있는 걸로 지금은 충분한데. 그렇지만 널 잃는다면 난.




좋아한다는 말이 턱까지 차올라



무더위가 가시고 공기 냄새가 바뀌었다.

너는 내게 바다에 놀러 가자고 했다. 아주 자연스러운 맥락 속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렇게 자연스러운 게 괜히 심술이 났다. 놀러 가자는 말이 왜 그리 자연스러워?

네가 그림이를 좋아했다는 걸 알려준 친구는 또 다른 소식도 전했다. 네가 과에서 인기가 많다고 했다. 너의 단과대 앞에 가면 사람들이 너를 귀여워하며 난리를 친단다. 늘 좀 수줍고 어딘가 조심스러운 태도 때문에 너의 매력을 많은 이들이 알 거라고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수줍음에 가린 능숙함이 내게만 발현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친구의 말을 들으니 그래서 능숙했던 건가 싶다. 마음이 삐죽거린다. 무시하고 싶은데 신경 쓰인다. 그렇더라도 너와의 약속을 거절할 수는 없다. 일단 우리는 바다 대신 공원에 가기로 했다.  

처음으로 동아리방 바깥에서 너와 단둘이 만나는 날이다. 너를 만나러 가는 길에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무리 심술이 나도 좋은 건 좋은 것이다. 좋아서 난 심술이니 심술은 좋음을 결코 이기지 못한다. 하늘공원 앞에서 너를 만났다. 분수 앞에 앉았다가 억새를 구경했다. 억새밭 틈의 바위에 올라 멀리 내다보았다. 너는 뒤에 서서 내 사진을 찍었다.

사진에는 새를 바라보는 나와, 곁에서 내 쪽을 바라보는 꼬마가 찍혔다. 너는 사진을 보며 말했다. “부럽지, 꼬마야.”

바다 대신 한강이라도 갈까. 해가 지고 문득 비가 내렸다. 우리는 편의점에서 비닐 우산을 하나 사서 나눠 쓰고는 한강을 따라 걸었다. 아직 젖지 않은 돌계단을 찾아 강을 바라보며 나란히 앉았다. 빗방울이 수면 위에 떨어지며 작은 파문을 쉼 없이 만들어내고 있었다.

“어제 아빠가 뭐라고 했냐면,”

검은 강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내가 입을 열었다.

“나는 생각을 너무 담고 있지 말고 바로 말로 뱉을 필요가 있다는 거야.”

밤의 한강이 울렁거렸다. 거기에는 마음을 털어놓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너와 둘이 있게 되자 견딜 수 없다는 듯 말이 터져 나왔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하는 생각을 말해보자면…….”

그렇지만 다음 말이 나오질 않았다. 항상 턱 끝까지 차 있던 말인데 네 앞에 서니 시원하게 뱉어지지 않았다. 널 보고 있을 때도 널 보고 있지 않을 때도 목구멍까지 차오르던 말이 있었다. 생각하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떠오르는 걸 막을 수 없어 생각하던 말이었다. 생각이 아니라 그저 내 안에 존재하는 말이었다. 널 알고 부터 쭈욱. 더이상 뱉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물고 있던 말이다. 소리를 내어 입 밖으로 내보내기만 하면 되는데, 그런데 쉬이 나오지 않는다.

“십 초 안에 말하지 않으면 뽀뽀해 버릴 거야.”

네가 말했다. 넌 이미 다음 말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 순간에 나는 아무런 판단도 할 수 없었다. 뽀뽀라는 말에 머리가 하얘졌다. 당황해버렸다. 빨리 말해야 한다는 강박에 휩싸이고 말았다.

“…네가 너무 좋아!”

뱉어버렸다. 가슴을 가득 채우는 바로 그 감정을 드디어 말했다. 네가 너무 좋아, 완벽한 여섯 글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내 마음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드러내는 여섯 글자. 다른 말은 내 안에 없었다. 네가 등짝을 두들기며 토해내라고 격려한 덕분에 내 몸 밖으로 나왔다. 잘 해낸 덕에 너의 뽀뽀를 받을 기회는 날아가버렸지만. 그게 기회였던 걸 왜 몰랐을까. 미숙했던 지난 날이다. 지금의 나라면, 그게 뽀뽀하고 싶다는 말인 걸 대번에 알아챌 테고, 널 빙글 바라보며, “십, 구, 팔, 칠…” 숫자를 세다가 “영!”을 외치는 순간 네가 어떻게 나올지 흥미롭게 지켜볼 텐데. 그리고 모든 걸 마치고 나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이라며 마저 하고 싶은 말을 끝냈을 텐데. (사실 장담할 수는 없다. 여전히 똑같은 상황에서 나는 얼어버릴 지도 모르는 일이다. 현실의 나는 상상 속 나보다 항상 더 긴장하고 더 미숙하니까.)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데 이번에는 네가 내 어깨를 감쌌다. 한 손에는 우산을 받쳐 들고 한 손으로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따뜻했다. 유난히 크고 따뜻하게 느껴지는 손이었다. 너의 손바닥에 내 온 존재를 기대고 싶을 만큼. 온 세상이 담겨있는 것만 같았다. 가슴이 가득 차면서 무너져내렸다. 그게 어떻게 동시에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너는 그걸 가능하게 했다.




독점적인 관계는 싫지만 너라면



나는 모르는 게 많다. 십 초 안에 말하지 않으면 뽀뽀한다는 게 너와 첫키스를 나눌 기회라는 걸 몰랐던 것처럼 너를 좋아한다는 말이 사귀자는 뜻으로 해석될 것이라는 걸 몰랐다. 알 만하고 알아야 하는 것인데도 몰랐다. 네가 좋다 말하고 네가 그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독점적 관계의 시작을 알린다는 걸 모를 수가 없는데도 몰랐다. 나로서는 단지 벅차오르는 감정을 분출했다고 단순하게 생각할 뿐이었다.

다음 날 여느 때처럼 동아리방에 갔다. 네가 먼저 와있었다. 소파에 앉아 있는 네게 다가가 곁에 앉자 너는 내게 몸을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어쩌다 계산해보니 우리 백 일이 크리스마스더라.”

심장이 쿵 내려 앉았다. 어제 우리는 사귀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바로 나 자신이 결정적인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몰랐다. 곧이어 내가 그걸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부끄러워졌다. 이제라도 고백해야 할까, 너를 좋아하지만 독점적인 관계는 맺고 싶지 않다고. 어제 한 말은 사귀자는 말이 아니라 그저 네가 좋다는 뜻이 전부라고. 그렇지만 우리가 서로의 여자친구, 남자친구가 되었다고 믿고 있는 네게, 백 일 기념일이 크리스마스라며 기뻐하는 네게 어떻게.

그대로 네 곁에 말없이 앉아있었다. 그리고 너의 손을 떠올렸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어제의 감각이 되살아나는 듯 했다. 내 어깨를 감싸 안던 너의 손. 크고 따뜻한, 온 세상을 품은 손. 그 손을 잡을 수 있다. 느낄 수 있다. 언제까지나 곁에 있을 수 있다.

서로가 세트가 되어 버리는 일대일의 관계는 갑갑하지만, 그게 너라면, 너와 함께라면, 어쩌면 괜찮을지도 몰라. 나는 나를 다독였다. 너라면 받아들일 수 있을 거야. 너라면.


너를 처음 만났을 때 실은 내게 남자친구가 있었다. 남자친구, 여자친구라는 말보다 애인을 선호하는 편이지만 그에게 애인이란 단어를 붙이고 싶지 않다. 그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어쩌다 사귀게 된 사람이었다. 강요는 없었지만 웬일인지 끌려간 것처럼 느껴지는 관계. 성인이 되고 나도 남들처럼 남자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그게 좋은 거라 했다. 사귀는 사람이 있으면 행복할 것이고 그걸 위해 노력해야 하고 성공하면 인정받았다. 나도 무척이나 갖고 싶었다.

잘생긴 애였다. 강의실에서 잘 보였다. 그가 다가올 때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몇 번 만나면서 그와 잘 맞지 않는다는 걸 어렴풋이 알았지만 누군가 나를 욕망한다는 사실이 짜릿했다. 차려입고 데이트 가는 게 좋았다. 그런 설렘은 일상에서 만나기 어려운 자극이었다. 즐거운 기분은 데이트하러 갈 준비를 하면서부터 그를 만나기 직전까지만 지속되었다. 막상 만나면 별로 할 말도 없고 몇 마디 나누다가 금세 흥미가 떨어졌다. 그게 멈춰야 할 이유가 될지 고민하면서 시간이 자꾸 갔다. 그가 나에게 좋아한다고 했을 때 나는 좋아한다는 대답 대신 좋아하는 게 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집에 있는데 그의 문자에 바로 답을 하지 않으면 걱정을 했다. 나는 씻거나 책을 읽거나 엄마랑 대화를 하거나, 휴대폰을 보고 있지 않을 경우는 아주 많다고 생각하는데 그에게는 아니었다. 그는 사소한 것도 심각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걱정을 하다가 내가 아무 일이 없는 걸 알면 자기를 기다리게 했다고, 내가 자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불평했다. 안 그래도 그는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눈치가 보였다.

독점적 관계를 시작하기도 전인데 숨이 막혀왔다. 우리가 데이트를 하는 사이라는 게 그에게 나에 대한 모종의 권리를 쥐여주는 듯 했다. 그는 내게 당연하게 기대했고 당연하게 서운해했다. 그에게 그럴 권리가 없다고 말하는 건 곧 내가 그를 그만큼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이 될 터였다. 나는 또 한 번 그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는 입장이 되고 싶지 않았다. 이미 좋아한다는 말을 거절했고 기다려달라고 했고… 나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소유할 권리를 달라는 요구 앞에서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어느 날 그가 오늘은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듯이 “너 남자 사귀면 집에서 뭐라고 하냐? 아니면… 나랑 사귈래?”라고 괴상한 고백을 해왔을 때, 나는 순간 머리가 복잡해졌다. 고백 받았을 때 기쁘거나 설레는 게 아니라 문젯거리를 받은 사람처럼 어떡해야 하나 고민하는 건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썸을 탄 지도 수개월… 더는 그를 기다리게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끝내려면 진작에 끝냈어야 해, 사귀는 수밖에 없어.

내가 남자친구를 만들고 싶은 마음으로 누군가를 만났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나와 꼭 같은 상태의 사람을 만나게 된 걸까? 그는 괜찮다는데도 굳이 나를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는 “너는 내가 데려다주는 걸 영광으로 알아야 돼”라며 자기 머리를 멋지게 쓸어올렸다. 그는 자기가 누군가를 위해 이런 행동을 하는 게 믿기지 않다는 듯 굴었고 그런 자신에게 도취해있는 것 같았다. 그와 함께 있을 때면 그가 바라보는 게 내가 아니라 그 자신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그가 여름방학 맞이 여행길에 올랐을 때, 공항에 도착해 이제 비행기를 탈 것이라고 문자를 보내온 순간, 내가 깜짝 놀랄 해방감을 느낀 건 돌아보면 그럴 법한 일이었다.

그가 몇 주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이별을 고하는 건 사귀자는 말에 오케이 하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었다. 그는 내가 동아리 엠티에 다녀온 뒤로 변했다고 했다. 아예 아닌 것도 아니었다. 그와 헤어지는 것과 다른 사랑에 빠진 것은 내게 있어 완전히 별개의 사건이지만 후자로 인해 내가 원하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와 헤어질 용기를 낼 수 있었으니까. 그와 헤어져 너에게 달려가면서 나는 당분간 정말 사귀는 건 사절이야, 생각했었다.


소문은 금세 퍼졌다. 얼굴도 모르는 선배들이 다가와 “네가 사랑이 여자친구구나?” 묻고는 했다. 동아리 안에서 나는 너보다 존재감이 훨씬 작았다. 술자리에서 스쳐 지나가는 선배들의 나에 대한 관심은 거기에서 끝났다.

사람들은 자꾸만 나를 너와 연결지어 생각했다. 너를 꼭 징검다리로 밟고 다음으로 내게 왔다. 너와 더 오랜 시간을 보냈고, 더 친밀한 사이고, 네가 동아리에서 주 40시간을 보낸다면 나는 주 4시간쯤 보내니 그럴 법은 하지만, 그래도 동아리 사람들이 나와 눈을 맞추고 둘이 이야기할 때조차도 직접적인 관계가 아니라 너를 매개로 한 관계를 맺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면 나는 왠지 허탈해졌다.

종종 복잡한 마음이 들었지만 네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배타적인 관계에 대한 거부감 외에도, 네가 남자고, 우리가 속한 모임에서 네가 더 큰 존재였기 때문에 권력이 불균형했던 것, 그래서 너의 1+1처럼, 네게 딸린 존재처럼 여겨졌던 게 힘들었다. 그렇지만 네가 이해해줄까? 어쩔 때는 유치한 인정투쟁처럼 느껴졌고 그보다 더 자주 내 대인기술이 부족한 탓으로 여겨졌다. 내가 사람들과 친밀해지기 어려운 걸 네 탓으로 돌리는 게 아닌가 스스로 의심스러웠다.

딱 한 번, “내가 자꾸 사랑이 여자친구로 불리는 게 불편해”라고 친구에게 털어놓았을 때, “나는 네 친구라고 말하고 다니는 거 좋았는데”라는 답을 들었고 역시 내가 이상해서 쓸데없는 고민을 하나 보다 결론 내려버리고는 다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독점적인 관계가 불편하다는 목소리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십 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는 건 내 안에서 사라지지 않은 의문인 거겠지. 너를 사랑했지만 너의 여자친구인 것에 나는 끝까지 적응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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