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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날씨 Oct 24. 2021

우산 밖으로 내미는 손처럼

거리가 있어야 더 뜨겁게 사랑할 수 있어

만난 지 천 일째 되던 날이었다. 학교 앞에서 우동을 먹고 나서는데 들어갈 때는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세찬 장대비로 바뀌어 있었다. 음식점 입구에는 우산 하나가 놓여 있었다. 같이 쓰고 갔던 우산을 파트너에게 건네고 가방에서 내 우산을 꺼내 들었다. 접어 두었던 파트너의 척척한 우산과 나의 건조한 우산이 저마다 펴졌다. 우리는 각자 우산을 쓰고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여름을 알리는 칠월의 비였다. 빗소리와 빗물을 가르며 달리는 차 소리가 하도 커서 거의 소리를 지르다시피 해야 상대의 귓가에 닿을 수 있었다. 우리는 말을 아끼기로 했다. 대신 우산 너머로 손을 뻗었다. 팔목에 빗물이 큰 원을 그리며 쉴 새 없이 떨어졌다. 아무리 차가운 비가 내려도 맞잡은 두 손 안의 열기를 가시게 하지는 못했다.


그날 밤에 돌아와 일기를 썼다. 천 일이라는 시간을 걷는 동안 우리는 학교 도서관의 다른 층에서 각자 할 일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비가 많이 올 때는 우산을 각자 쓸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짚었다. 그것은 발전이었다. 좁은 우산 안에서 서로를 꼭 껴안고 각자의 양팔을 흠뻑 적시던 시간을 비로소 지나왔다는 뜻이었다.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아 나의 원을 버리고 너의 원에 완벽하게 겹쳐져서 나의 여집합이 사라져도 아랑곳 않던 달뜬 시간이 드디어 지났다는 뜻이었다. 


처음에 그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뭐든 당신과 함께 하고 함께 있고 싶은데요. 그가 이렇게 말할 때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스스로 의문에 시달렸다. 내가 그를 덜 사랑하는 걸까? 내가 이기적인 걸까? 나와 함께 하고 싶다는 누군가의 말을 가뿐히 귓등으로 넘겨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미안한 마음에 그를 달래면서도 나는 한편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나만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는 게 왜 상대에게 미안해해야만 하는 일이 되는 걸까? 함께 있고 싶다는 욕구는 이렇게 당당하고 떳떳하게 당연하다는 듯이 상대에게 요구할 수 있는 일이고, 너와 종일 함께 있다가도 나는 나의 공간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은 왜 잘못이 되는 걸까? 연인관계에서 혼자의 시간을 요구하는 건 명백하게 하위의 욕구, 덜 중요한 마음, 상대를 외롭거나 힘들게 하는 잘못된 욕구가 되었다. 서운해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미안함과 안쓰러움을 느끼다가도 의문이 들었다. 이 문제에 있어서 확실히 그가 권력을 갖고 있었다. 함께 있고 싶은 연인 vs. 혼자 있고 싶은 연인의 대결에서 세상은 후자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세상의 힘을 업고, 통상의 권력을 갖고, 내가 더 사랑하고 네가 날 외롭게 하고 너는 차갑고.. 의 비수를 마음에 간직한 채 그는 가여운 얼굴로 나에게 요구해왔다. 


연애 초기의 열정은 황홀한 몰입의 시간을 선사하고 그럼으로써 나를 살게 하였지만, 그것은 한증막의 열기와도 같아서 어느 순간 나라는 사람의 숨통을 막는다. 너에게 몰입한 동안 생겨나는 사랑의 에너지는 지금껏 내가 가져본 어떤 것보다 크고 많고 강렬하다. 그것은 너라는 영역을 가득 채우고도 남아, 슬슬 흘러넘쳐 나의 생활, 일, 다른 관계로까지 뻗어나간다. 하지만 잉여의 흐른 에너지로는 다른 영역까지 충만하게 만들기에 역부족이라, 사랑을 제외한 삶의 영역들에 아무래도 소홀하게 되면서 나의 사령탑에서는 어느새 위험을 감지한다. 잠깐만, 정신을 좀 차려야 되지 않겠어? 다른 건 거들떠보지도 않잖아. 사랑 영역이 나라는 사람의 전부가 아니라고. 이봐!


그래서 우산 밖으로 내미는 손처럼 따뜻함을 유지한 채, 내 우산을 똑바로 받쳐 들고 내가 가야 하는 도서관의 층을 찾아 네가 아닌 또 다른 중요한 삶의 영역에 충실할 수 있는 것은 발전이다. 우산 두 개를 나눠 쓴 만큼 우리의 공간이 넓어지고 나는 그 선선한 여집합의 공간에서 비로소 섞이지 않은 나만의 숨을 쉰다. 나는 너와 거리가 필요해. 거리가 있어야 너를 더 뜨겁게 사랑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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