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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날씨 Oct 24. 2021

피곤하면 자꾸만 당신이 미워져

내 상태를 스스로 알기가 왜 이리 어려울까

어제 점심을 먹고 차에 타기 전에 소화시킬 겸 산책하는데 당신이 또 집 이야기를 꺼냈다. 집에 대한 우리의 레퍼토리는 늘 고만고만한데, 어느 시점까지는 치열하게 고민했고 매번 새로운 정보와 새로운 시각을 나누었지만 지금 우리는 대략 의사결정을 마쳤고 상황은 고착화된 면이 있다. 그러니까 어제 당신 말에 들어있던 회한과 반성과 아쉬움은 그간 우리가 골백번은 더 나누었던 말들의 재탕일 뿐이었다.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건 물론 아니야. 우리는 그런 하나마나한 말, 뻔하고 진부한 말, 그래도 내뱉고 싶은 말, 내뱉어야 속이 후련해지는 말을 나누는 사이잖아. 그렇지만 그때 집을 샀어야 해, 집만 해결되면 행복할 텐데, 하는 당신 말을 들으며 횡단보도를 거의 다 건넜을 즈음에 내가 불쑥 말했다.

제발 그 이야기는 그만. 내가 늘 태평하게 반응하고 괜찮다고 말해도 나도 참고 있는 거야. 그때 내가 좀만 더 끈질겼더라면, 내 생각대로 밀고 나갔더라면, 그때 놓친 걸 떠올리면 내가 얼마나 가슴이 터질 것 같은지 모르지. 애써 다독이고 참고 묻어놓고 있잖아. 우리 과거 말고 현재를 말하자. 그때 그랬어야 하는데 말고 그래서 지금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이야기하자.


누구보다 잘 알고 이해하는 당신의 회한에 그날따라 동조해주지 못했다. 그건 따로 이유가 있었다. 나도 몰랐지만 이어서 내게서 나오는 말을 바라보면서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따로 있다는 걸 나도 그때 알게 되었다.


나는 당신에게 집에 대해 할 수 있는 게 다 끝났다고 생각하지 말고, 지금이 유일한 선택이자 대안이라고 여기지도 말자고, 우리의 삶의 지향에 따라 얼마든지 대안은 생길 수 있고 우리의 사는 모습도 달라질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리고 회사 일도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아마 이게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일 것이다. 당신은 요새 회사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회사 일을 생각나게 하는 작은 단서에도 한숨을 내쉬니까. 밤 산책마다 당신이 회사 이야기를 할 때 당신 얼굴이 얼마나 어두운지 목소리에 얼마나 힘이 없는지 모르지, 아무리 어두운 밤이어도 나는 다 보여.

지금 회사가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나는 당신이 여길 떠나서도 얼마든지 잘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여기까지 말했을 때 당신이 물었다. “어떤 다른 옵션이 있는데요?” 나는 지금 당장 나한테 재촉하듯이 생각해내라고 하면 안 된다고 했고 당신은 그런 뜻은 아니었다고 답했다. 내가 말을 이었다. 요새 당신이 회사 일을 생각할 때 부정적인 에너지가 더 크게 느껴지는데, 당신은 즐겁게 할 때 더 창의적으로 잘 해내는 사람이니까 어려운 회사 일을 좀 더 긍정적인 에너지로 대하면 어떨까 싶다고. 당신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작은 물음표를 띄운 표정을 지었다. “알겠어요. 근데 요새 그렇게까지 부정적인 에너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당신은 춥다며 이만 차에 들어가자고 했다. 십 분만 하려던 산책이 한 시간쯤 밖을 서성이게 만들고 있었다. 차에 타서 자리에 앉자 다시 내 입술이 움직였다. “아니, 안 그래도 나도 요새 스트레스받는데,” 눈치 빠른 당신은 금세 짚었다. “어? 당신이 스트레스받아서 내 스트레스에 더 민감한 것 아니에요?”

글쎄, 그냥 내가 요새 글 작업이 더디고 상담도 잘 안 들어오고 관계에서 자꾸 쭈그러들고... 여기까지 말을 마치자, 드디어 모든 게 명확해졌다. 지금 내 감정은 옆에 앉은 다른 사람이 집 이야기를 해서도, 회사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서도, 내 위로가 먹히지 않아서도 아니다. 우습게도 나 자신의 문제들 때문이다. 진짜 원인이 튀어나오자마자 나는 저절로 알게 되어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네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각자 창밖을 내다보았다. 고통을 함께 나누는 사이지만, 때로는 자기 자신의 고통에 딱 당사자만큼 집중해야 할 때가 있다.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그게 왜 문제인지, 나는 무엇이 괴롭고, 무얼 원하는지, 혼자 생각해야 하는 시간. 타인과 나누기에는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서 혼자를 거쳐야만 걸러지는 시간. 나에게 필요한 건 상대가 아니라 나를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몸이 피곤할 때, 마음이 다른 일로 무거울 때, 자꾸만 마음을 긁어대는 생각을 갖고 있을 때, 나는 당신에게 태클을 건다. 있는지도 몰랐던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방을 울릴 듯 크게 들리고, “어떤 옵션이 있죠?”라고 묻는 말이 시비 거는 것처럼 들리고, 말과 행동들 하나하나가 괜히 거슬린다. 거슬리는 것들에 합리적으로 보이는 이유를 갖다 대기란 얼마나 쉬운가. 회사 일이 힘들어도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죠. 이왕 할 거 좀 즐겁게 하면 좋잖아요. 나한테 뭘 내놓으라는 듯이 말하면 안 되죠. 침 삼키는 소리는 남에게 들려주지 않는 게 교양이잖아요.

미안해, 피곤하면 자꾸만 당신이 미워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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