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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ilet Jun 20. 2020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었다

D-55

그가 어젯밤 떠난 후 나는 현관문에 쭈그리고 앉아 다시 소리 내어 울었다. 우리는 분명 다시 만날 날을 약속했고, 그 날을 서로 고대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55일의 여정을 각자 어떻게 보내게 될 것인지 초초하고 불안했다. 지금이라도 당장 연락해서 8월 13일(목)의 약속은 없던 일로 하고 나를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달라고 애원하고 싶다. 아니면 속는 셈 치고 나를 조금이라도 만나봐 주면 안 되겠냐는 어리석은 소리를 꺼내고 싶기도 하다. 그게 분명 지금 나의 진짜 현 모습이겠지만. 그가 정말 받아들일 수 없다는 나의 현주소. 자존감이 바닥인 나.


오늘은 그와 약속한 날로부터 55일이 남았다. 그리고 어제로부터 첫째 날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오전에 치과를 다녀오고 나서 <데드맨 원더월드>를 좀 보다가 밥을 시켜먹었다. 그리고 다시 울었다. 스멀스멀 나를 잡아먹는 이 그리움의 감정은 나의 정신과 몸을 지배했다. 감정에 지배되지 말자고 어제 약속했었는데. 난 아직 멀었다. 기분이 태도가 되지 말자는 약속. 그렇지만, 오늘은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머릿속에는 너의 이름으로 가득 차 있고 핸드폰에 얼마 되지 않은 너의 사진들을 보며 왜 더 사진을 달라고 하지 않았나 후회나 하고 있다. 끊임없이 치밀어 오르는 울컥함이 목울대를 뻣뻣하게 만들었고, 그저 보고 싶다는 그 문장만 되뇌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노트북을 켰다. 기록하자. 나의 상태를 기록하고 나와 대화를 하자. 내가 숨기고 싶고 피하고 싶은 나의 진짜 모습을 마주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꿔보려고 한다. 이것을 하는 이유는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다. 삶의 이유는 나에게 있다. 어떤 물건이나 사람이 내 삶의 이유가 될 수도 없고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너무나 위험한 발상이다. 나는 나를 위해 내 삶을 만들어 나갈 생각이다. 죽어버린 나 자신을 깨워 일으켜 건강하게 다시 보살피려고 한다. 나는 발전 가능성이 충분한 사람이다. 외모, 능력, 책임감, 성격, 직업 그 어떤 것도 모자란 것이 없다. 나를 사랑하고 나를 위해 살아가기 시작한다면 나는 끝내 완전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이러한 동기를 심어준 그에게 고마워할 것이다. 그리고 나의 소망은 8월 13일(목)에 이러한 나의 모습을 보고, 기뻐하고 나를 여전히, 더욱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날 일이 잘못되어 나의 노력이 모자랐고, 결과물이 별로라고 한다면 우린 그날 영원히 다시 만날 수 없게 되겠지. 그래도 나는 울지 않을 거다. 실망하지도 않을 거다. 난 나를 위해 이제 살기 시작했으니깐.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나를 떠나는 것이 괜찮은 것은 아니다. 너무 슬프고 절망적이겠지. 그렇지만 그게 다시 내 인생을 원래대로 그러니깐, 지금 이 모습으로 되돌려 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은 변한다. 그렇지만 원래대로 돌아오기 쉽다. 관성의 동물. 인간은 참 모자란 생명체다. 노력하지 않으면 바보가 되고 어리석은 늪에 빠진다. 유혹에 넘어가고 충동적으로 사건을 벌인다. 그리고 후회하기 싫어서 일종의 경험이었다고 퉁치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그게 전형적인 나였다. 순간의 실수를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은 물론 내 잘못의 동정을 얻기 위해 불쌍한 척 가식을 떨었다. 상처 받은 고양이처럼 눈에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개처럼 울부짖었다. 나는 '이 세상의 피해자다'라는 자기 연민에 도취해 어둠과 우울함에서 허우적거리며, 나만의 이 상실감과 외로움을 즐기는 척했다. 


다시 생각해보면 나는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에 더 가깝다. 나는 애초에 부모라는 존재를 부모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유는 그들이 나를 원망하고 무시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나를 원망하지도 않고 무시하지도 않았을 거다. 난 왜 그렇게 작아져만 갔을까. 내 앞에 오고 가는 고성 속에, 끝없이 이어지는 싸움과 불통, 그리고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 노릇까지 이런 것들은 사실 나에게 너무 버거웠다. 난 그렇게 그릇이 큰 사람이 아니었던 걸까. 생각을 바꿔보자. 엄마는 나를 그리고 가정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정말 그 노력은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에게서 엄마라는 아빠라는 두 사람을 지켜내 주려고 했다. 그것은 나를 너무나도 귀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리라. 나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역시 나의 판단이다. 엄마는 항상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결국 놔뒀고, 지금까지도 내가 알아서 하게 둔다. 그런 것을 봐도 나는 내 앞가림을 잘하는 사람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면을 보지 못한 채 나는 너무나 내 멋대로 판단하고 내가 느낀 대로 판단하고 남의 의도 따위는 안중에 두지 않았다. 아니 두고 싶지 않았겠지. 내가 피해자로 남아야 했으니깐. 엄마와 나를 죽이려고 했던 아빠. 그는 불쌍한 사람이다. 나와 참 많이 닮았다. 삶을 즐기려는 한량의 태도와 일에 있어서만은 책임을 지려는 이중적인 성격. 가정보다는 개인을 중시하며, 음악과 사진을 사랑하는 예술가적 면모. 나와 너무나 비슷한 아빠다. 그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아마 대화였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나는 대화가 너무 어렵다. 나와의 대화는 물론 상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어렵다. 내가 기자를 하면서 인터뷰를 하면서 즐겁다고 느낀 것은 어쩌면 이것은 대화가 아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인터뷰이의 생각을 오롯이 느끼고 나의 생각을 섞어 하나의 멋진 인물을 지어내는 것. 그것은 나에게 너무나 재미있는 일이었다. 나는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34년 간 아빠와 엄마가 어떤 진지한 얘기를 나누는 것을 본 적도 없고 하지도 않는다 들었다. 아빠는 회사에서 40년 이상 가까이 뛰어난 영업, 사업 실적을 내며 인정받는 사람이다. 그것만 봐도 사람이 대화를 어떻게 끌어내고 원하는 결과물을 도출해내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엄마와 아빠는 대화를 하지 못했다. 아빠는 작년에 나에게 이태원에서 정말 처음으로 엄마와 대화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다고 말했다. 정말 솔직한 심경. 그리고 첫 고백. 그리고 그들은 지금까지도 대화를 하지 않는다. 나는 방법을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제 알아가야 한다. 먼저 나와의 대화를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 진정한 나를 찾아내서 제대로 고쳐줄 것이다.


대학교 때 영화를 만들면서 너무 힘들었다. 그렇지만 즐거웠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실패해도 됐었기 때문이다. 잘못돼도 내 인생이 큰일 나지 않았다. 그래서 두려울 것이 없었다. 힘들어도 재미있고 끝까지 해냈다. 그때 가장 많이 구호처럼 외쳤던 것이 이거다. '안되면 되게 한다. 그럼 안될 수가 없다. 결국 되게 되어 있다.' 이 말은 스태프들이 장시간 촬영으로 힘들 때 혹은 어려운 섭외를 앞두고 지지부진할 때 서로에게 힘이 되어준 말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정신은 현재의 나에게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안되면 안 된다. 안되는데 왜 할까. 안되니깐 안 할 거다. 이게 지금 나의 상태라고 볼 수 있겠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 미래가 있다. 나만의 미래를 위해 다시 시도해보려고 한다. '안되면 되게 하라!'


오늘은 먼저 내가 마주한 현 모습을 제대로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나는 회피하지 않고 지금 나 자신을 마주한다. 겉은 정말로 화려하고 멋으로 치장되어 있지만 이것은 단지 나의 썩은 내면을 감추기 위해 포장 짓거리라는 것을 잘 안다. 혹여나 초라한 나의 마음이 들킬까 싶어 화려한 무늬와 원색 의류를 즐겨 입고 집에서 조차 공주처럼 입어야 안심이 되는 나. 의상 비용으로 월 백만 원은 그냥 소비해버리는 나. 그걸 입고 있는 순간에는 그래도 행복하다고 착각하는 나. 순간 진통제로 스스로를 위로했다고 착각하는 나. 너무 위태롭고 어리석다. 이제 옷을 사지 않는다. (심지어 오늘도 구매했다.) 지금 이 글을 올리는 순간부터 8월 13일(목)까지 옷을 사지 않는다. 이것은 나와의 약속이다. 그리고 이 글을 보게 되는 불특정 다수와의 약속이기도 하다. 


많은 남자를 만났다. 이 사실은 절대 없어지지 않을 것이고 나의 과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과거를 반복해서는 안된다. 사람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했지만 노력하면 실수하지 않는다. 나는 한 번도 노력해본 적이 없다. 그저 아무나 적당한 사람을 만나 섹스를 하고 금세 시들해졌다. 혹은 나쁜 남자를 만나 나에게 주는 상처를 오롯이 느끼며 '거봐, 나 피해자 맞잖아'라고 당당히 나를 드러낸다. 가해자라고 한다면 너무 큰 죄책감으로 난 금방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피해자 코스프레로 14년을 버텼다. 이제는 누굴 만나도 상대를 죄인으로 만들지 못해 안달이 난 것 같기도 하다. 어제 그가 '사람은 변하지 않아, 됐어. 확인했어.' 이 한 마디에 나는 그가 나를 버릴 것이라 순간적으로 확신했고 그 감정은 온몸을 지배했다. 이내 서럽게 울었다. 이미 헤어진 사람처럼. 이게 내 방식이다. 남이 나에게 사과하게 만들고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게 하고 싶다. 나는 사과받아야 마땅한 사람이다라는 사고가 강하게 고착화되어 상대가 나에게 큰 사랑을 주고 있어도 보지를 못한다. 내가 그 사람에게 큰 사랑을 주고 있으면서도 습관적으로 상대를 죄인으로 만든다. 나는 무서운 것이다. 그가 나를 버리고 나를 거절하는 것이. 관계가 잘못될까 봐 너무 겁이 난다. 그 겁은 나를 잡아먹었다. 감정이 나를 에워싸고 나는 주체하지 못하는 화를 터트린다. 조금만 뒤로 밀었을 뿐인데, 나는 바로 낭떠러지 앞이다. 상대는 절벽으로 내몬 적이 없다. 나 스스로 절벽을 향해 간다. 그리고 상대에게 나를 죽이려고 한 죗값을 치르게 만든다. 

내려놓자. 다시 처음으로 가자. 상처 받지 않았던 처음의 나로 돌아가서 다시 순수하게 상대방을 사랑하자. 설령 그가 나를 거절한다고 해도, 괜찮다. 다시 시작하면 된다. 타인으로 인해 나를 쓰러뜨리지 말자. 그것도 남자 때문에 나를 버리지 말자. 나는 나 혼자가 아니다. 지켜야 할 나 자신이 있다. 적어도 남자 때문에 절망하거나 휘둘리지 말자. 상대가 무심코 던진 한 마디에 나의 모든 감정을 쏟지 말자. 그가 절벽에서 민다고 하더라도 버텨라. 난 그렇게 쉽게 떨어지는 사람이 아니니깐. 당당하게 자신을 꼿꼿이 세워 오히려 멋지게 견뎌라.


내가 앞으로 나 자신과의 대화에 있어 다뤄야 할 주요 주제는 아래와 같다.


1. 헌신이 필요하게끔 만드는 상대를 만나지 마라. 

자신 또한 헌신을 피로하게 만들지 마라.


2.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 만나라. 상대를 향한 뜨거운 감정으로 관계를 시작하면 언젠가는 헤어지게 된다.


3.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상대를 만나라. 공허함이란 모든 인간이 지니는 당연한 감정인데, 자애 감과 자존감이 없는 존재는 이 공허함을 이성으로 친구로 술로 혹은 게임으로 순간적인 들로 채우려 안감힘을 쓴다.


4. 꿈이 없는 사람을 만나지 마라. 꿈이 명사인 사람을 만나지 마라.


5. 말보다 행동인 사람을 만나라. 사랑한다는 말 하나의 표현보다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6. 용기 있는 사람을 만나라. 살아오며 상처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 가.


7. 너를 자랑하지 않는 자를 만나지 마라. 인간이란 입이 간사하여 사랑한다 말해도 뒤돌아서서 서운함을 빙자한 채 너의 험담을 안주거리 삼고 싶어 한다.


8. 상대가 여가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를 보아라.


9. 상대의 친구들을 살펴라. 친구는 그 사람의 거울이다. 끼리끼리 만난다.


10. 자존심이 우선인 사람을 만나지 마라. 자존심이 먼저인 사람의 공통점은 자존감이 낮다. 자존감이 낮으니 자기 자신을 지킬 수단이 자존심밖에 없다.


그가 알려준 인생의 십계명, 좌표라고 볼 수 있겠다. 내가 이 10가지를 지금부터 8월 13일(목)까지 지켜보려고 한다. 그게 가능하냐,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변하냐 이런 생각들이 떠오르려다 사라진다.

해내야지. 하면 된다. 그럼 끝내 이룬다. 




오늘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는데, 그와 나란히 앉아있던 자리가 보였다. 눈물이 났다. 

조금만 참자. 더 멋지게 변한, 다시 태어난 나를 위해. 


너무 보고 싶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위 너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2020년 6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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