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필소녀 Aug 05. 2016

개공포증 인간이 애완견의 천국에 산다

- 상하이 동물들의 낯선 태도에 관하여

살면서 한 번도 개에 물린 적이 없다. 그런데 선천적으로 ‘개 공포증’을 갖고 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가족들이 모두 같은 증상인 걸로 보아 유전인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가장 큰 위험은 길에서 목줄이 없는 개와 마주치는 거다. 순간 뇌가 멈추고 근육이 굳으며, 발이 땅에 자석처럼 붙는다. 보통사람은 전혀 이해할 수 없겠지만, 이것은 비 오는 산속에서 고라니를 생채로 뜯어먹던 시뻘건 눈의 외지인에게 발각된 기분과 비슷하다. 평온한 대낮에 나 홀로 호러무비의 주인공이 된다.


이때 나의 공포를 가장 빠르게 캐치하는 존재는 단연 ‘개’다. 그들은 찰나의 눈빛으로 내 공포를 감지한다. 0.1초 만에 우리의 서열은 정리된다. 인간이 최상위 포식자에서 가장 낮은 등급으로 전락하는 순간, 개는 하등 동물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다. 큰 개든, 작고 귀여운 애완견이든 상관없이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가장 포악한 표정을 하고 나를 향해 짖는다. 헤이 거기 겁먹은인간, 눈 깔어.


수년전 광고 촬영장. 카피라이터였던 나는 밥차의 간이 테이블에서 50여 명의 스태프들과 식사를 하고 있었다. 꽃무늬 원피스와 하이힐을 장착하고 최대한 우아하게 제육볶음을 먹고 있는데, 문득 종아리에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뭐지. 테이블 아래를 쳐다보니 웬 강아지가 내 하이힐을 핥고 있네. 엄마야! 같은 귀여운 비명도 있었을 텐데. 순간 우아한 원피스보다는 제육볶음에 더 어울리는 비명, 우워으허악! 같은 괴성을 질렀다.


혼비백산한 나는 순식간에 식탁 위로 올라가 무릎을 꿇었다. 접신한 무당처럼 한 맺힌 곡소리까지 내며. 아개가왜여기에으허우와흐어엉엉엉! 식사 중이던 스태프들은 젓가락질을 멈추고, 얼음땡의 얼음 자세로 나를 지켜보았다. 결국 촬영장의 죄 없는 개는 묶였고, 나는 화장실에 들어가 남은 공포심이 바닥날 때까지 통곡했다. 그날의 꽃무늬 원피스에는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제육볶음의 뻘건 양념과 함께 진하게 묻었다.

상하이로 이사 와, 처음 나선 산책길에선 공포영화가 5분 간격으로 펼쳐졌다. 몇 걸음에 한 팀씩 나타나는 애완견-주인 커플. 상하이에 이렇게 많은 애완견이 있었나. 심장이 하루에 몇 번씩 내려앉았다. 그들을 마주칠 때마다 나는 하얗게 질렸고, 나와 함께 걷던 이들은 살이 하얗게 피가 안 통하도록 팔목을 붙잡혔다. 낯선 나라의 개들도, 내 나라의 개들처럼 나를 얕볼 테지. 애완견의 천국인 이 도시가 나에겐 지옥이었다. 산책 후 집에 돌아오면 언제나 걸은 것 이상으로 피곤했다. 유일한 위로는 이곳의 애완견 대부분이 목줄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 몸이 긴장을 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것은 몇 달 후였다. 분명 서울의 어떤 곳보다도 개가 많은 데. 언젠가부터 길가의 개들이 크게 신경 쓰이지 않는 이유는 왜일까. 생각해보니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곳의 개들은 한 번도 나를 보며 짖지 않았다.’는 사실.  그들은 분명 나와 눈이 마주쳤고, 내 공포를 읽었다. 그런데도 광폭하게 짖으며 나를 깔보지 않았다. 아니,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고,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귀여운 엉덩이를 씰룩 거리며, 백화점 쇼핑 나온 부잣집 외동딸처럼 걸어갔다. 그러니까 이 도시의 ‘걷는 개’들은 세상 혼자 사는 듯 무심했고, ‘누워있는 개’들은 세상만사다 귀찮다는 듯 심드렁했다.     

그들이 ‘겁먹는 인간’에게만 무심한 것도 아니었다. 덩치 큰 인간을 만날 때도 놀라 뒷걸음치거나 쫓겨 도망가지 않았다. 사람을 피하거나 눈치를 보는 법이 없었다. 주인보다 앞서 달리며 목줄로 주인을 부리는 일도 드물었다. 가끔씩 보이는 ‘목줄 없는 개’도 마찬가지. 그들은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멍하니 서 있거나, 아무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종종 걸어갈 뿐이었다. 마치 저들 또한 지나가는 ‘사람’과 다를 게 없다는 듯이. 그들이 후다닥 움직이지 않자, 내 공포심도 덩달아 조금씩 느슨해졌다. 이상하게도 내가 이들의 성격을 닮아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개만 그런가. 고양이 또한 애완 고양이나, 길 고양이 할 것 없이 다들 심드렁했다. 비 오는 날이면 우리 아파트 1층 현관에는 신문지와 작은 그릇 하나가 놓인다. 지붕이 있어 비를 맞지 않는 공간. 사람들은 현관을 나서며 성당 봉헌금 바구니에 동전을 넣듯 사료를 놓고 나가고, 고양이는 당연하다는 듯 받아먹는다. 그들에겐 ‘눈칫밥’이라는 게 없다. 주인 없는 도둑고양이인 줄 알았는데, 모든 주민이 주인인 셈이었다. 맑은 날에는 어김없이 아파트 쓰레기통을 어슬렁거린다. 지나가는 나를 마주칠 때면 ‘뭐 먹을 거 있어?’ 하고 나를 따라오기도 하고, 내가 빈손이면 그저 무심하게 지나쳐간다. 별거 없으면 가던 길 가셔.           

이상할 만큼 심드렁한 이 도시의 동물들이 본격적으로 궁금해졌다. 길가의 개와 고양이들을 틈틈이 지켜보았다. 골목길의 자전거 바구니 안에서 잠든 길 고양이, 손님들이 만져대도 그러려니 하는 카페의 고양이, 주인과 그의 자식처럼 산책하는 애완견, 길 위의 모든 냄새를 탐구하는 강아지들까지. 모두 밝고 당당했다. 그런데 이들은 어떻게 이토록 낙천적으로 살게 되었을까.    

가장 단순한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에게서 겁을 먹은 적이 없구나. 사람이 무섭지 않으니 도망가거나 짖어댈 필요도 없구나. 이들은 두려움 없이 살고있구나. 내가 살던 서울의 어느 골목길에선 지나가는 길 고양이가 내 앞으로 당당하게 걸어가는 것을 본 적이 없었는데. 생각해보니 거리의 사람들이 길가의 개나 고양이를 굳이 건드리거나 쫓아내는 걸 보지 못했다.

언젠가 인도 뭄바이에서 본 소들이 꼭 이랬다. 자동차를 무서워하지 않는 소들. 대로변에서도 언제나 심드렁하게 걷던 소들과 이 도시의 동물들은 어딘가 닮았다. 어느 날 상하이 태생의 친구는 말해주었다. 자식을 한 명만 낳은 이곳의 부모들이 반려동물에게 얼마나 사랑을 쏟는지. 외동으로 자란 아이들이 어떻게 애완동물과형제가 되는지. 그것만으로는 모두 설명되지 않지만 상하이의 사람들이 동물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결국 사람에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비 오는 날 아파트 현관에서 릴레이로 사료를 놓아주는 사람들, 그 광경을 미소로 찬성하는 이웃들, 때로 주인보다 더 미용이 잘 된 애완견, 지나가는 강아지에게 ‘니하오’ 하는 아이들까지. 이곳은 애완견의 천국이 아니라, 길 위에 있는 모든 동물들의 천국일지도 모른다. 이들에게 천국이란 먹을 것 걱정 없이 심드렁하게 살아지는 곳. 원래 사람이든 동물이든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는 아이들은 온순하고 낙천적이기 마련이니까.   

상하이 이외의 도시에서도 길 위의 풍경이 이러한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사는 이 도시의 동물들은 특별하다. 그들로 인해 나의 오래된 개공포증은 서서히 진정되고 있으며, 동물들이 사는 모습으로 이 도시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인간과 동물이 서로의 낙천적인 성격을 닮아가는 곳. 상하이의 낭만이란 길 위의 흔한 노천카페라고만 생각했는데, 유난히 마음을 끄는 풍경들이 생겼다. 할아버지– 애완견 커플을 보는 것은 언제나 흐뭇하다. 어린 시절, 한없이 평화로운 얼굴로 꽃을 키우시던 외할아버지의 표정을 종종 그들에게서 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상하이에서 새 친구를 만나는 새로운 방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