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잘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
작년 연말, 하필이면 크리스마스 직전에 코로나에 걸렸다. 다행히 딱히 아픈데 없이 넘어가긴 했지만, 덕분에 2주가 넘는 긴 연말 연휴를 집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못한 채 보내야 했다. 차라리 좀 더 빨리 걸렸으면 병가를 내고 더 긴 연휴를 가질 수 있었을 텐데 왜 하필 일을 안 하는 시기에 걸렸는지 운도 참 없다.
대부분의 미국 회사들은 연말 1-2주간 강제 셧다운을 한다. 공식적으로 일을 안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상 12월은 여유롭게 흘러가는 달이기도 하다. 우리 회사도 3주 정도만 일하고 21일부터 1월 초까지 모든 미국, 유럽 오피스가 문을 닫았다.
셧다운을 며칠 앞둔 코로나 확진을 받기 전 날, 매니저인 Trip과 2021년의 마지막 1 on 1을 했다. 나의 매니저는 내가 회사에 조인하고 2주 뒤에 들어온 백인 남자인데, 굉장히 시끄럽고 유쾌하지만 알고 보면 내향형인 사람이다. 한 번은 서로의 MBTI를 얘기하다가 (미국도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MBTI를 보긴 한다) 내가 ‘네가 내향형이라는 거 도저히 못 믿겠어'라고 했더니 본인은 그냥 조금 ‘시끄러운' 내향형이라며 정의 내린 적도 있다. 나는 산호세, Trip은 택사스 오스틴에 있어서 실제로 만난 적은 아직 없지만, 여러모로 재밌고 따뜻한 사람이다. 특히 우리 둘 다 팀이 아무것도 세팅이 안되어있을 때 들어온지라 일종의 전우애(?) 같은 것이 있다. (어쩌면 나만 있을 수도 있다)
매주 하는 1 :1이지만 한 해의 마지막 면담이기도 하고, 일종의 퍼포먼스 리뷰도 포함되어있는 듯했다. Trip 은 내게 미팅 한 주 전 ‘1 :1에서 올해 우리 뭐했는지 한 번 되돌아보자'라는 말을 했었는데 마침 전 날 여유가 좀 있어서 혼자 볼 용도로 그간 했던 일들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다 적진 않았지만 대충 이랬다.
내가 Owned 한 것 (임팩트 ⭐️)
조직 변동 이후의 바뀐 구조를 파악하고 새로운 디자인 그룹 조직도를 만들어 배포 (⭐️⭐️)
상하이 팀과의 Office Hours를 주도해서 운영하고 right person과 연결 (⭐️⭐️)
Design System Change Process를 론칭하고 중구난방이던 채널을 Request Form 하나로 통일한 것 (⭐️⭐️⭐️)
Token System의 Focal 로서 Theme Token 시스템을 소개하고 디자이너들을 위한 세션을 진행 (⭐️⭐️⭐️)
Accessibility Bug 티켓들을 처리한 것 (⭐️⭐️⭐️)
체계 없이 공유되는 디자인 시스템 업데이트 뉴스를 없애고 Release Radar를 론칭한 것 (⭐️)
전 디자이너가 참여한 워크샵 이벤트에서 Lego와 디자인 시스템의 공통점을 주제로 발표한 것 (⭐️)
데스크톱, 모바일 모든 플랫폼에서 4개 이상의 신규 컴포넌트를 추가한 것 (⭐️⭐️)
다른 사람과 협업한 것
매니저와 함께 디자인 시스템을 사용하는 각 팀의 디자이너, 엔지니어들을 10명 이상 만난 것 (⭐️⭐️⭐️)
그들의 Pain Point를 토대로 향후 2년간의 디자인 시스템 로드맵 작성에 참여한 것 (⭐️⭐️⭐️)
현재 컴포넌트 라이브러리의 Audit을 진행하고 개선사항을 제안한 것 (⭐️⭐️⭐️)
하나하나 했던 일들을 적으면서 한국에서의 퍼포먼스 리뷰가 잠시 떠올랐다. 그래도 주어진 몫은 무조건 해내야 한다는 주의인 나는 일을 열심히는 해서 항상 공통적으로 들었던 코멘트는 성실하다, 커뮤니케이션을 잘한다, 대응이 빠르다 정도가 있었다. 그런데 연차가 쌓이면서 이런 추상적인 평가들이 마음에 들지 않기 시작했다. 나는 ‘열심히 하는' 직원이 아니라 일을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열심히는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잘하는 건 아무나 못하니까.
작년에 너무나 재밌게 읽은 책인 크래프톤 웨이 (배틀 그라운드를 탄생시킨 주역들의 실패와 성공 이야기)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인재와 노동자의 차이는 대체 불가능함이라고. 노동자는 회사를 나가면 끝이지만 인재가 나가면 대체 불가 리소스가 나가는 것이라 회사에 임팩트가 너무나 크다고.
아마도 한국에서의 나는 그냥 성실한 노동자였던 것 같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그렇다. 마음만은 인재인 노동자. 하지만 커리어를 전환한 이번엔 달라지고 싶었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과연 나의 첫 미국인 매니저의 평가는 어떨지.
Trip은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다 왔다며 부산스럽게 미팅에 들어왔다. 온갖 트리 장식들을 나에게 보여주면서. 그리곤 한국은 트리를 만드냐며,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얘기들을 조금 했다. 미국은 꼭 이런 식으로 ice breaking을 한다.
“우리 올해 정말 많은 거 했다. 디자이너로 첫 한 해를 보낸 기분이 어때?”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던 처음 몇 달이 떠올라서. 당연히 감회가 새롭다며, 그렇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적어놨던 노트를 보며 했던 일들을 Trip과 함께 복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내가 무엇을 했고, 어떤 걸 배운 것 같은지 등. 한 해의 마지막 1 :1인데도 이상하게 어느 때보다 진지했던 것 같기도 하다.
이제 질문을 할 차례였다. 나의 질문은 이미 준비되어있었다. 디자이너로서 나는 어떤지, 무엇을 더 개선하면 좋을지. 그런데 내가 질문을 채 하기도 전에, Trip 이 입을 열었다.
“클레어, 나는 네가 올해 정말 잘했다고 생각해. 팀이 셋업 되지 않았을 때 조인해서 골치 아픈 일들을 해쳐나가며 적응한다는 건 쉬운 게 아니야. 너의 용기랑 그 에너지 넘치는 모습을 다들 정말 좋아해.”
“고마워, 사실 안 그래도 내 퍼포먼스에 대해서 피드백을 달라고 하고 싶었어. 어떤 걸 개선하면 좋을지도.”
그러자 Trip 은 “개선점보다는 잘하는 부분을 더 발전시키는 게 좋지 않을까? 네가 잘하는 부분에 더 자신감을 가져도 좋을 것 같아. 예를 들면 너는 네가 답을 모를 때 답을 알만한 사람을 찾아서 사람들을 연결시켜주잖아. 그건 정말 중요한 역할이야. 그만큼 너는 전체를 파악하는 능력이 누구보다 빠르고, 문제가 뭔지 정확히 정의 내리는 능력이 있어. 디자이너에게 꼭 필요한 스킬을 이미 가지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자부심을 가져.”
잘하는 걸 더 발전시키라니, 늘 개선점 위주로 피드백을 받던 나에게 이런 식의 피드백은 낯선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한국은 흠잡을 곳 없는, 딱히 모난 곳 없는 인재상을 선호하는 것 같다. 어딜 가든 잘 섞이는 비빔밥 같은 사람. 반면 Trip도 그렇고, 이곳 실리콘밸리의 회사들은 직원이 각자의 강점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문화가 발달되어있는 것 같다. 언젠가 Trip이 나에게 했던 “매니저로서 나의 역할은 너의 성장을 도와주거나, 너를 보호해주는거야.” 라는 말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내 생일도 아닌데 칭찬 일색인 매니저의 말에 난 괜히 머쓱해졌다. ‘나 잘하고 있나 보다. 일단은 안심해도 되겠다’라고 생각하고 대충 넘어가려는 찰나, Trip 이 말했다.
코로나로 인해 미열이 난 건지, 과도한 칭찬에 어쩔 줄 몰랐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솔직히 조금 울컥하기도 했다. 아마도 내가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가 아니었을까. 좋은 디자이너라는 그 말이 그 어떤 말보다 힘이 되고, 동기부여를 시켜준다고 느꼈다. 내가 늘 듣고 싶었던 말인 ‘넌 우리 팀에는 없어선 안 되는 인재야’ 따위의 영화에나 나올 법한 대사보다 훨씬, 몇 배는 의미 있게 들렸다. 1:1을 별로 안 좋아하는 나인데도 그날의 대화는 그 어느 때보다도 따뜻하고, 기분 좋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계속 좋은 디자이너이고 싶다.’ 고. 인재면 어떻고 또 아니면 뭐 어떤가, 그냥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것만으로도 나의 일은 이미 충분히 의미 있어진다는 걸.
긴 여정을 거쳐 디자이너가 되었고, 이 일을 얼마나 할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앞으로 난 더 좋은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는 거다. 정말로 그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