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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인웨이 Oct 22. 2018

억새와 단풍 그리고 가을

<1>강원도 정선 민둥산 억새꽃축제

계획도, 목적도 없이 떠난 민둥산


무작정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계획과 목적따윈 집어치우고 그냥 떠나고 싶은 날. 막상 시간과 여유가 주어져도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가서 뭘 해야 할지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생각은 고민으로 번지고, 고민이 커지면 발걸음은 무거워집니다.


갑작스럽게 주어진 연차. 어디든 떠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딱히 가고 싶은 곳이 떠오르진 않더군요. 뚜벅이 여행자인 탓에 무작정 차를 몰고 떠날 수도 없는 상황. 네이버를 켜고 '축제'라는 키워드를 넣었습니다. 가장 먼저 뜬 검색결과가 민둥산 억새꽃축제였습니다.

민둥산이라는 지명이 있는 것도, 그 곳에서 억새꽃축제가 열린다는 것도 처음 접했죠. 무궁화호 왕복 티켓을 끊었습니다. 서울 청량리역에서 3시간 10분. 민둥산과 우연한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민둥산 가는 길, 역에서 내려 5분 만에 마주한 풍경.



멀긴 멀더군요. 민둥산에 오르려면 민둥산역에서 내려 20분 정도를 걸어야 합니다. 민둥산역에 내리는 순간 이 곳에 오길 잘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역을 둘러싼 산들이 울긋불긋 단풍옷을 뽐내며 저를 반겼습니다. '아, 정말 가을이구나!' 낯선 곳에서 마주한 절경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좀처럼 사람을 찾아볼 수 없는 한적한 시골길은 오롯이 저만의 단풍놀이 시간을 허락했죠. 시끄러운 도시에서 벗어나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의 소리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 오랜만에 느끼는 여유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습니다.


민둥산 가는 길, 혼자만의 단풍놀이.

고된 등산길 뒤 벅차로움


민둥산 정상으로 가는 길은 만만치 않습니다. 2시간 정도 걸리는 등산길이지만 가파른 경사가 숨이 찹니다. 종종 등산객이 오갔지만 대부분 등산길은 저 혼자였습니다. 산 속에 홀로 있는 느낌. 두려움보단 신선한 느낌이었죠. 가파른 경사 탓에 바닥만 보고 한참을 걸었습니다. 나무와 흙, 낙엽을 이렇게 오래 바라본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더군요.

오르고 오르면서 숨은 가빠지고 머리는 멍해졌습니다. 아무런 생각도 없는 무념무상. 복잡한 생각에서 벗어나 오로지 걷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너무나도 소중한 멍때리는 시간이었죠.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시야를 가렸던 나무들이 사라졌습니다. 드디어 민둥산 정상에 자리잡은 억새들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민둥산 정상을 앞두고 만난 이름 모를 새.


억새가 보이면 민둥산 정상이 가까워졌다는 뜻입니다. 마치 문지기 같달까요. 정상에서 바라본 주변 풍경은 고된 등산길의 가치를 증명합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산맥과 하얀 억새밭의 조화.

태어나 처음 접한 풍경을 한참을 서서 그리고 앉아 넋 보고 바라봤습니다. 동서남북 모두 다른 절경을 천천히 가슴에 담았습니다. 조금 찬 바람이 불었지만 괜찮았습니다. 여유로운 벅차로움을 좀 더 만끽하고 싶었죠.




머리와 가슴의 '쉼'을 선사한 민둥산


우리는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 살아갑니다. 생각해야 행동하고, 행동해야 뒤쳐지지 않는다. 어릴 적부터 지겹게 들은 말입니다. 하지만 머리도 가슴도 쉼이 필요합니다. 가끔은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그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실, 그것만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비우지 못하면 채울 수 없다는 명언처럼 나를 둘러싼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하죠. 민둥산 정상은 제게 그런 여유를 허락했습니다. 그 곳에서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것만으로 행복이란 감정을 느낄 수 있었죠.


언제 또 이 날처럼 생각에서 벗어날 기회를 얻을지 모르겠습니다. 생각보다 긴 시간이 걸릴 수도 있죠. 그래서 제게 민둥산은 특별합니다. 머리와 가슴의 휴식을 선사한 친구, 민둥산은 그렇게 제 기억 속에 남았습니다. 우연한 만남은 특별한 추억이 됐습니다.




민둥산 정상의 주인, 억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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