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새벽에는
내 마음이 지나치게 조용해서
오히려 무언가가 빠져나간 듯한 감각이 든다.
손안에 쥐고 있던 감정이
이른 공기 속에서 미세하게 흩어져 버린 것 같은,
그런 순간.
나는 오랫동안
삶이란 무언가를 끊임없이 쌓아 올리는 일이라고 믿어왔다.
기억을 모으고,
사람을 담고,
감정을 겹겹이 더해
자신이라는 형태를 유지하려 애쓰는 일.
하지만 살아갈수록 분명해진다.
우리를 붙들어 주는 건
단단하게 쌓인 것들이 아니라
사라지기 직전까지 남아 있는 작고 투명한 결이라는 것을.
말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지나간 순간,
그때는 알아채지 못했던 눈빛의 방향,
흩어진 마음 아래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체온의 조각.
그런 것들이야말로
우리가 잊고 지내던 가장 오래된 힘이었다.
나는 내 삶에서
그 투명한 것들을 수없이 흘려보냈다.
너무 작아서,
너무 조용해서,
너무 일상적이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모든 투명함이 모여
내 삶을 버티게 해 온 잔열이 되어 있었다.
한때 나를 일으켜 세웠던 손등의 온기,
비 오는 날 버스 창에 잠시 남았다 사라진 입김의 흔적,
끝내 건네지 못했던 고백의 조각,
아무 설명 없이 가만히 위로가 되었던 낮은 음악,
아무도 몰래 흘렸던 눈물 한 번.
보이지 않는 것들이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을 오래 지켜주고 있었다.
우리는 자주 강해지려 하고,
강해지기 위해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을 붙잡으려 한다.
하지만 인간을 지켜 주는 것은
강함이 아니라
부서지기 직전의 연약함에서 번지는 부력이다.
넘어질 때마다
우리를 다시 일으키는 것,
상실을 견디는 와중에도
마음을 하나로 붙여주는 것은
늘 투명한 것들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 투명함 덕분에
끝내 완전히 무너지지 않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야 조금 이해한다.
오래 살아온 사람들은
자신이 붙잡아야 할 것과
조용히 흘려보내야 할 것을
천천히 구분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둘 중
정말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언제나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이름 붙이기 어려운 감정들,
설명하기 어려워서 더 선명한 순간들,
말보다 먼저 남는 숨결의 온도.
우리는 그런 것들로 버티고,
그런 것들로 서로를 이해하며,
그런 것들로 잔열을 남긴다.
그리고 언젠가
모든 것이 흐려지는 순간이 와도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것은
화려하거나 극적인 것이 아니라
작고 투명한 흔적일 것이다.
그 흔적은 사라지지 않는다.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한 생을 조용히 비춘다.
그래서 나는 오늘의 글을
이 한 문장으로 닫고 싶다.
잊지 말자.
우리를 끝내 살아 있게 하는 것은
언제나 투명한 것들이었다.
에세이집 "잊지 말아야 할 투명한 것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