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잊지 말아야 할 투명한 것들 III

입김 이전의 세계, 그리고 다시 시작

by 윤담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나는 아직 꿈의 가장자리 한 조각을 쥐고 있었다.
그 꿈이 무엇이었는지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그곳에는 분명히 나의 어떤 결이 있었다.
아주 어린 시절의 숨결 같기도 하고,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미래의 온기 같기도 했다.
단지 하나 확실한 것은,
그 꿈속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조금 더 가벼웠고, 조금 더 깊이 숨을 쉬고 있었다는 것이다.

방 안은 새벽의 차가운 공기를 그대로 품고 있었다.
숨을 내쉬자 입김이 어둠 속에서 피어올랐다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사라졌다.
그 흩어지는 모양을 바라보며
나는 방금 전까지의 꿈도
이런 식으로 사라졌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데,
손가락 끝에서부터 허공으로 빠져나가는 그런 방식.

옆으로 몸을 돌리자
아이 셋이 서로에게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아내는 아이들 뒤편에서
식은 숨결을 조금씩 데우며
잔잔하게 밤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온도는 현실이었고,
내가 돌아온 자리의 증거였지만
이 새벽의 순간에는
그 온기마저도 어딘지 아득하게 느껴졌다.
행복이 너무 가까우면
그 거리가 오히려 더 멀어지는 순간이 있다.
지금의 나는 그 경계 위에 있었다.

나는 한참 동안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되찾는 과정에 있는 사람은
말없이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진다.
말 대신 바라봄이 기억을 더듬는 방식이 되기 때문이다.
아이 셋의 잠든 얼굴에서
아내의 조용한 호흡에서
나는 설명되지 않는 어떤 흔적들을 발견하려 했지만
기억은 아직 깊은 곳에 묻혀 있었다.
그럼에도, 아주 가벼운 감정의 잔열이
가슴 안쪽에 미세하게 깃들었다.

아침을 먹으며
아이들이 졸린 목소리로 흘리는 말들을 듣는 동안
나는 이상하게도 꿈속의 장면을 떠올리고 있었다.
꿈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던 목소리.
어떤 손길이 내 어깨를 스치던 순간.
빛이 내리던 곳에서
나는 확실히 웃고 있었던 것 같은 예감.
그 모든 것이 지금의 풍경과 겹치는 순간
내 마음속에서는 알 수 없는 균열이 생겼다.
마치 현실이 꿈을 부르고
꿈이 현실을 밀어내려고 하는 듯한
조용한 충돌음 같았다.

정장을 입고 단추를 잠그며
나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의 얼굴은
꿈을 막 벗어난 사람처럼 보였다.
희미한 기쁨의 잔향을 아직 품고 있지만
현실의 무게를 곧 어깨에 걸어야 하는 얼굴.
그런 얼굴이 거울 속에 서 있었고
나는 거기서 잠시 눈을 떼지 못했다.

집 밖으로 나서는 순간
새벽의 공기가 폐 깊숙이 파고들었다.
입김이 또다시 하얗게 피어올랐고
나는 그 작은 흩어짐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꿈도 이렇게 사라졌겠지.
하지만 사라지기 전에
분명히 나의 일부를 건드리고 지나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건드림’이 지금의 나를 깨어 있게 하는 것 같았다.

지하철역으로 걷는 길,
하늘은 아직 완전히 아침이 되지 못한
회색과 남청의 중간 어딘가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 흔들리는 색을 보며
내 기억도 비슷한 상태에 있다는 생각을 했다.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은 결.
그 중간에서
나는 오늘의 나를 다시 확인하고 있었다.

지하철 문이 닫히며
금속 안쪽이 가볍게 울렸다.
사람들은 각자의 온도를 품고 서 있었고
그 온도들이 서로 닿지 않으려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나는 그 안에서
이 도시의 숨결 같은 것을 느꼈다.
보이지 않는 온기,
사라지지 않는 잔열,
말로 하지 않아도 남아 있는 어떤 관계의 결.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은
꿈을 직접 떠올리게 하지는 않았지만
그와 닮은 공기 하나쯤은 확실히 남기고 있었다.
달리는 지하철의 진동 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내가 방금 깨어난 꿈은
잃어버린 기억이 아니라
되찾을 기억이
먼 길을 돌아 나에게 오는 방식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아직 그 꿈의 장면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꿈이 남긴 잔열은
지금 이 새벽의 차가움 속에서도
완전히 식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도 살아가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꿈에서 깨었지만
그 꿈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오늘의 나를
아주 천천히 데우고 있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