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 밖의 존재
동굴에서 나오는 순간,
나는 세상이 이렇게 밝았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빛이 눈앞에서 부서지는 것조차 낯설었고,
바닷바람의 짭조름한 냄새가
오랫동안 닫혀 있던 나의 감각을 천천히 깨웠다.
나는 빛에 바로 다가서지 못하고
입구 근처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빛이란 게 이렇게 따뜻하게 손등을 스치는지
예전의 나는 알고 있었을까.
모든 것이 낯설었고,
그 낯섦 속에서 이상하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절벽과 바다 사이를 잇는 얇은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바닷빛을 은은하게 머금은 아파트 하나가 눈앞에 나타났다.
어쩐지 오래전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 같은,
숨결이 남아 있는 집.
문 앞에 섰을 때,
내 심장은 이유 없이 천천히 뛰었다.
누군가의 발소리가 안쪽에서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한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부드럽게 웃었다.
그 웃음은 말도, 설명도 없었지만
마치 오랜 시간을 건너온 눈빛처럼
조용한 파장을 남겼다.
그리고 그 뒤에서 아이 셋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아이는 장난감 포크레인을 들고 있었고,
또 한 아이는 노란 물통을 꼭 쥐고 있었으며,
막 달려온 듯 숨을 고르는 가장 어린 아이까지.
그 셋의 눈빛은 서로 달랐지만
묘하게 같은 온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 눈빛이 내 가슴 어딘가를 아주 미세하게 건드렸다.
나는 그들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런데 모른다는 말이
입안에서 끝내 형태를 가지지 못했다.
모른다고 말하면
무언가 중요한 것이 사라질 것 같았다.
여인은 아무 말 없이
문을 조금 더 열어주었다.
그 손짓은 ‘들어와도 좋다’는 뜻이었지만,
나에게는 ‘네가 돌아온 자리다’라는
조용한 환대처럼 느껴졌다.
집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서자
생활의 흔적들이 나를 맞았다.
장난감이 조금 어긋난 자리,
탁자 위에 놓인 색연필,
아이 셋이 남긴 작은 발자국들.
그 모든 것이 처음 보는 풍경인데
기묘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나는 이름을 떠올릴 수 없었다.
그들의 이름도,
여인의 이름도,
우리 사이에 어떤 시간이 있었는지도.
그러나 감각만큼은 남아 있었다.
누군가의 손을 붙잡던 온기,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던 습관적인 리듬,
저녁 햇살 아래에서 들려오던 웃음 같은 잔향.
형체는 잃었는데, 결은 남아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기억을 되찾는다는 건
머릿속 어딘가에 저장된 장면을 복구하는 일이 아니라,
나와 세계 사이에 남아 있는 온도와 호흡을 다시 읽는 일이라는 걸.
바깥세상은 아직도 낯설었다.
하지만 낯섦 속에서
어디선가 오래된 조각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바람이 스칠 때,
파도의 리듬이 들릴 때,
아이 셋이 내 옆에서 속삭이지 않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 때.
나는 아직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 집의 공기,
여인의 미소,
아이 셋의 서로 다른 숨결 속에는
내가 잃어버렸던 세계가
조금씩 되돌아오고 있었다.
기억은 내가 잡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순간순간마다
서서히 돌아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도 숨을 고르고
천천히 이 세계 속을 걸어간다.
언젠가 나였던 사람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모든 것이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