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바다
그가 해안 마을에 도착한 것은 봄이 거의 다 무르익은 오후였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먼저 다가온 것은 바다가 아니라 풀 냄새였다. 짠내가 앞서 올 줄 알았는데, 바닷가 언덕을 따라 바람이 먼저 쓸어온 것은 마른 갈대의 부스럭임과 이름 모를 잎사귀들이 햇빛을 문지르며 내는 푸른 냄새였다. 방파제 너머로 물빛이 한 번 번뜩였고, 그 곁으로 낮게 자란 해송과 해풍에 몸을 눕혀온 관목들이 서로의 어깨를 기대듯 이어져 있었다. 마을은 작았고, 조용했고, 오래된 나무의 그늘처럼 사람의 마음을 서둘러 재촉하지 않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남자는 천천히 짐을 들었다. 작은 가방 하나뿐이었다. 며칠 묵을 셈이었으나 짐은 언제나 적었다. 오래 군에 있던 사람들의 몸에는 필요 이상의 것을 들고 다니지 않는 습관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그는 어깨끈을 한 번 고쳐 메고, 해안길 초입에 선 표지판을 읽었다. 해송 산책로. 글씨가 조금 바랬고, 모서리에는 소금기 어린 바람이 오래 문질러 놓은 흔적이 있었다. 그는 그 아래를 잠깐 올려다보았다. 표지판 너머로 이어지는 길은 숲이라고 부르기엔 낮고, 수풀이라고 부르기엔 깊었다. 초록이 너무 무성해서 길은 오히려 그 가운데 가만히 숨을 죽인 실선처럼 보였다.
그는 그 길로 들어섰다.
발밑에서 솔잎이 부드럽게 부서졌다. 해송들은 높이보다 넓이로 자라 있었다. 바다 쪽으로 몸을 기울인 가지들이 서로 얽혀, 햇빛은 그 사이를 천천히 흘러내렸고, 바람은 그 아래를 지나는 사람의 어깨에 잎 그림자를 올려놓았다 내리곤 했다. 곳곳에 낮은 풀들이 돋아 있었다. 맥문동처럼 가늘고 길게 흐르는 잎, 손바닥만 한 윤기 나는 잎, 바람만 불면 연둣빛 비늘처럼 뒤집히는 잎. 그는 그 길을 걸으며 이상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숲 속인데 자꾸 바다가 가까워지는 느낌, 바다를 보러 왔는데 먼저 풀의 속을 지나고 있다는 느낌. 그것은 낯설지 않았다. 인생의 오래된 어떤 일들이 늘 그렇듯, 목적지보다 그 전의 기척이 먼저 사람을 감싸는 법이었다.
남자는 예순을 눈앞에 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 멀리서 그를 보면 나이를 쉽게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몸은 여전히 곧았고, 걸음은 불필요한 흔들림이 없었다. 다만 굽은 것이 있다면 마음 어딘가일 것이었다. 오래 물 위에 떠 있었던 사람들, 오래 바람의 방향과 기압의 변화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겉으로는 티 나지 않는 닳음이 있다. 그 닳음은 젊은 날의 광택을 없애는 대신, 말수가 적고 눈빛이 깊은 사람을 만든다. 그는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해군에서 서른 해 가까이 복무했고, 바다 위에서 보낸 시간은 땅에서 보낸 시간보다 더 길게 느껴질 만큼 진했다. 수평선은 누구보다 익숙한 풍경이었으나, 이상하게도 그는 제 발로 찾아와 바닷가에 오래 머문 적이 거의 없었다. 휴가 때에도 산이나 내륙의 작은 도시를 찾았고, 퇴직 후에도 항구 근처는 어쩐지 발길이 가지 않았다. 너무 익숙한 것에는 손이 잘 닿지 않는 때가 있다. 사랑했던 것일수록 오히려 더 그렇다.
이번 여행은 누구의 권유도 아니었다. 어느 날 아침, 창문을 열었을 때 바람 속에 젖은 소금기와 비슷한 냄새가 섞여 들어왔고, 그 순간 그는 오래전 함정의 갑판 위에서 맞던 새벽을 떠올렸다. 떠올림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큰 파도처럼 밀려오지 않고, 먼바다의 너울처럼 천천히 다가와 발목을 적셨다. 그가 은퇴한 지 일 년이 조금 넘었고, 그동안 그는 아주 평범한 육지의 시간을 배워왔다. 출근이 없는 아침, 점호가 없는 하루, 밤중에 경보가 울리지 않는 잠. 그런데 사람은 이상해서, 그토록 바라던 평온 속에서도 어느 순간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더 선명히 알게 된다. 그는 요즘 자주 멍하니 서 있었다. 부엌에서 물이 끓는 소리를 듣다가도, 버스를 기다리다가도,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인파 속에서도. 몸은 분명 땅에 서 있는데 마음은 어디쯤 표류하는 것 같은 느낌. 그 표류를 끝내거나, 아니면 제대로 인정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바다에 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숲길 끝에서 바다가 열렸다.
그것은 갑작스러운 개방이었다. 잎과 가지와 바람의 속삭임으로 채워져 있던 시야가 한순간 크게 트이며, 눈앞에 푸른 판이, 푸른 숨이, 푸른 침묵이 나타났다. 바다는 잔잔했다. 그렇다고 고요하다고만 할 수는 없었다. 얕은 파도들이 끊임없이 밀려들어 햇빛을 부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빛은 가까운 곳에서 투명한 청록이었고, 조금 멀어지면 짙은 푸름으로 가라앉았다. 그 위에 흰 포말이 가볍게, 그러나 지치지 않는 손놀림으로 가장자리를 덧그렸다. 그는 전망 데크 앞에 멈춰 섰다. 난간은 따뜻했다. 낮 동안 햇빛을 오래 받아온 나무의 온기가 손바닥에 스며들었다. 그는 손을 얹은 채 한동안 서 있었다.
바다를 보면 무엇부터 떠오를 줄 알았는데, 정작 떠오르는 것은 소리였다. 엔진의 저음, 무전기의 잡음, 금속이 금속을 스치는 서걱임, 어둠 속에서 당직병의 발걸음이 갑판을 건너가는 규칙적인 박자. 그리고 새벽. 늘 새벽이었다. 그가 군 생활 동안 가장 많이 사랑하고 가장 많이 미워했던 것은 새벽이었다. 밤 근무의 끝에 오는 새벽, 긴 항해 중 어느 날 문득 맞는 새벽, 훈련 뒤에 피곤한 몸으로 보는 새벽, 폭풍 뒤에 겨우 살아서 보는 새벽. 바다는 밤에도 바다고, 낮에도 바다지만, 사람의 마음은 새벽마다 다른 빛으로 그 위에 얹혔다. 어떤 날의 새벽은 오늘도 버텨야 한다는 무거운 납 같았고, 어떤 날의 새벽은 살아 있다는 것의 마른 떨림 같았다. 그는 그 많은 새벽들 사이에서 자신이 조금씩 닳고, 조금씩 단단해지고, 또 어떤 부분은 끝내 돌이킬 수 없이 무뎌졌음을 알고 있었다.
“처음 오셨어요?”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오십 대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작은 바구니를 들고 서 있었다. 바구니 안에는 쑥인지 미나리인지 알 수 없는 푸른 줄기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피부는 햇빛을 많이 본 사람처럼 건강하게 그을려 있었고, 눈가에는 늘 웃는 사람들에게만 생기는 잔주름이 얇게 져 있었다.
“티가 나나요.”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처음 오는 사람들은 다 여기서 한참 서 있거든요. 오래 본다기보다, 좀 놀라는 얼굴을 해요.”
“그렇군요.”
“좋죠?”
여자는 바다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그는 대답 대신 다시 바다를 보았다. 좋다는 말로는 조금 모자랐다. 좋다기보다, 오래 잠겨 있던 무언가가 조금씩 풀리는 느낌에 가까웠다.
“예. 좋은 것 같습니다.”
“민박은 어디로 잡으셨어요?”
그가 마을 어귀의 작은 숙소 이름을 말하자,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 집 밥 괜찮아요. 된장국이 아주 깊어요. 저녁 놓치지 마세요.”
그는 감사하다고 말했다. 여자는 웃으며 지나갔다. 풀 냄새가 한 번 더 바람에 섞여 왔다. 그는 여자가 사라진 방향을 잠시 보았다가, 다시 바다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자신도 듣기 어려울 만큼 작게 중얼거렸다.
“왔구나.”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바다에게인지, 자기 자신에게인지, 아니면 오래전 그 바다 위에 남겨둔 젊은 날에게인지.
숙소는 마을 끝 언덕 아래 있었다. 흰 벽에 푸른 지붕을 얹은 이층집이었고, 마당에는 화분 대신 큰 독들이 놓여 있었다. 독 주변으로는 로즈메리와 라벤더, 이름 모를 허브들이 자라고 있어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바다 냄새 속에 약간의 쌉싸래함과 향긋함이 섞였다. 그는 이 향이 마음에 들었다. 바다만으로는 기억이 너무 직접적이어서 사람을 금세 오래전으로 끌고 가버리는데, 여기에 풀과 흙과 허브 냄새가 섞이면 그 기억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방은 단정했다. 창을 열면 바다가 바로 보이지는 않았고, 대신 해송 숲의 끝과 그 너머로 하늘이 보였다. 그는 오히려 그게 좋았다. 바다가 정면에 있으면 잠도 마음도 지나치게 흔들릴 것 같았다. 창틀에는 작은 유리병이 하나 놓여 있었고, 그 안에는 마른 억새 한 줄기가 꽂혀 있었다. 별것 아닌데도 방이 갑자기 누군가의 손길을 기억하는 곳처럼 느껴졌다.
짐을 풀고 나서 그는 침대에 잠깐 앉았다. 몸을 기대자 매트리스가 아주 조금 내려앉았다. 그 작은 움직임에 이상하게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는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다. 바람이 나무를 스치는 소리, 지붕 모서리를 돌아가는 소리, 멀리서 파도가 돌에 부딪히는 소리. 소리들은 서로 다른 결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하나의 큰 천으로 짜인 것처럼 이어졌다. 그는 잠깐 그대로 있었고, 문득 아내 생각이 났다.
아내는 그가 이곳에 온다는 말을 듣고 한참 아무 말이 없었다. 반대한 것도 아니고, 특별히 반긴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잘 다녀와요” 하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짧은 말 안에 아내는 늘 그렇듯 많은 것을 넣어두었을 것이다. 오래 군 생활을 한 남편과 함께 산 사람에게는, 묻지 않아야 하는 때와 붙들지 않아야 하는 순간을 알아보는 능력이 생긴다. 그는 그 능력을 늘 고마워하면서도, 가끔은 그것이 미안했다. 살아 있는 동안 사랑하는 사람을 가장 자주 외롭게 한 것이 나라를 위한 일이었다고, 그는 스스로를 완전히 변호할 수 없었다. 바다는 그의 직업이었고, 사명이었고, 자부심이었지만 동시에 집으로부터 가장 멀리 데려가는 길이기도 했다. 아이들이 어릴 때 그가 비운 생일과 졸업식과 운동회와 감기 걸린 밤들을, 아내는 말없이 대신 살아냈다. 그는 그 빚을 결코 다 갚지 못하리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더더욱, 이제 와 바다를 그리워하는 자신의 마음을 누구보다 아내 앞에서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저녁 식사는 여자가 말한 대로 깊은 된장국이 좋았다. 미역이 많이 들어 있었고, 국물에서는 멸치와 된장의 짠맛보다도 오래 끓여진 시간의 맛이 났다. 밥을 먹는 동안 식당 창밖으로 노을이 천천히 기울었다. 해송의 검은 실루엣 뒤로 하늘이 주황에서 분홍, 분홍에서 옅은 보랏빛으로 바뀌는 것을 그는 말없이 지켜보았다. 옆 테이블에서는 낚시를 마치고 돌아온 듯한 남자 둘이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낮음이 좋았다. 바닷가에서는 사람들이 대개 목소리를 조금 낮춘다. 넓은 수평선 앞에서는 큰 소리로 자신을 주장하는 일이 어쩐지 우스워지기 때문일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그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해가 다 져서 길은 어둑했지만, 하늘에는 아직 빛이 남아 있었다. 마을의 가로등은 많지 않았고, 그래서 별들이 빨리 나타났다. 그는 바닷가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밤바다는 낮보다 더 가까웠다. 보이지 않는 만큼 소리와 냄새와 공기가 더 선명했다. 파도가 밀려왔다가 물러나는 소리는, 누군가 깊고 오래된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 같았다. 그는 방파제 끝까지 가서 멈췄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군인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바다를 올려다보았다. 경계해야 할 대상도, 관측해야 할 조건도, 보고해야 할 수치도 없이. 그저 넓고, 어둡고, 살아 있는 것.
그 순간 오래전 기억 하나가 불쑥 올라왔다.
첫 배치를 받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아직 계급장보다 긴장이 더 선명하던 시절. 그는 야간 당직을 서다가 폭풍 전야의 바다를 처음 본 적이 있었다. 바다는 평온했지만, 이상하게도 공기 속에는 곧 무언가 크게 변할 것 같은 냄새가 있었다. 선임은 그때 말했다. 바다는 늘 먼저 말해준다고. 대신 들을 줄 아는 사람만 알아듣는다고. 그는 그 말을 오랫동안 품고 살았다. 바다는 정말 그랬다. 파도의 높이보다 앞서 바람의 성질이 달라지고, 하늘의 색보다 먼저 새들의 방향이 바뀌고, 갑판 위의 금속이 묘하게 식는 저녁이 있었다.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 그는 생각했다. 무너짐은 언제나 갑자기 온다고 믿지만, 실은 오래전부터 작은 기척들이 있었을 것이다. 피로가 예전만큼 풀리지 않는다거나, 웃을 일이 있어도 마음이 늦게 따라온다거나,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도 잠깐 멍해진다거나. 그는 퇴직 직전 몇 해 동안 그런 기척들을 많이 느꼈다. 하지만 버텼다. 군복은 버티는 법을 가르쳐주었고, 그는 그것을 잘해왔다. 문제는 버티는 일이 끝난 뒤였다. 버팀 이후의 시간을 그는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다.
그는 방파제에 앉았다. 밤바람이 바지 자락을 흔들었다. 멀리서 작은 어선 하나의 불빛이 움직였다. 그 불빛은 검은 물 위를 떠가는 작은 호흡처럼 느리게 흔들렸다. 그는 그걸 오래 보았다. 눈앞의 작은 불빛이 아니라, 그 뒤에 깔린 넓은 어둠이 오히려 마음을 안정시켰다. 어둠은 모든 것을 감추지만 동시에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기도 한다. 그 순간 그는 처음으로 알았다.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는 바다가 보고 싶어서만은 아니었다. 그는 자기 안에 아직 정리되지 않은 소음들을 듣기 위해 왔다. 육지의 생활은 평온했지만 이상하게 잡음이 많았다. 해야 할 것도 없는데 분주했고, 위험한 일도 없는데 늘 어딘가 긴장돼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바람, 풀, 파도, 먼 불빛. 그 몇 가지만으로 세계가 단순해졌다. 단순해진 세계 안에서야 비로소, 그는 자기 마음의 복잡함을 만질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새벽에 눈을 떴다. 습관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창밖은 아직 푸르스름했고, 새들은 완전히 깨어나기 전의 목소리로 울고 있었다. 그는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왔다. 마을은 고요했다. 빵집도, 슈퍼도, 작은 횟집도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길가에 놓인 화분들만이 밤새 모은 이슬을 잎 끝에 매달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해송 산책로로 들어섰다.
아침의 숲은 어제 오후와 다른 얼굴이었다. 빛이 낮고 연해서 잎마다 가장자리가 또렷했고, 거미줄에는 물방울이 촘촘히 맺혀 있었다. 발밑의 흙은 밤새 조금 젖어 있었고, 그래서 걸음마다 아주 미세한 향이 올라왔다. 흙과 솔과 소금과 이슬이 섞인 냄새. 그 냄새는 그를 어린 날의 기억으로 데려갔다. 바다 근처에서 자란 것은 아니었지만, 훈련소에 처음 입소해 새벽 구보를 하던 날 공기에서 맡았던 냄새와 어딘가 닮아 있었다. 모든 것이 두렵고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동시에 자신이 어떤 세계의 문 앞에 서 있다는 예감 때문에 이상하게 가슴이 뛰던 날들. 그때의 그는 젊었다. 나라를 지킨다는 말이 너무 크고 아름다워서, 자신이 견뎌야 할 외로움과 부재와 희생의 구체적 무게를 충분히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무지까지 포함해 젊음이었다. 그는 그 젊음을 미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 와 생각하면, 그렇게 무모하고 맑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긴 세월을 견딜 수 있었는지도 몰랐다.
숲길 중간쯤에서 그는 벤치 하나를 발견했다. 어제는 미처 보지 못했던 자리였다. 해송 사이에 반쯤 숨어 있어, 바다가 조금만 틈을 열어 보이는 곳. 그는 그 벤치에 앉았다. 바람이 잎을 흔들 때마다 푸른 그림자들이 그의 무릎과 신발 위를 지나갔다. 마치 수풀 속을 걷다가 잠시 멈춘 사람의 어깨 위로 잎사귀들이 가볍게 스치는 것 같았다. 그는 그 감각을 좋아했다. 무언가에게 다정하게 덮이는 느낌. 군 생활 동안 그는 대개 자신이 남을 지켜야 한다는 쪽에 서 있었다. 부하를, 동료를, 함정을, 임무를. 그러느라 보호받는 감각을 잊고 살았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작은 숲과 바람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덮어주고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퇴직 후부터 가지고 다니던 것이었다. 기록하려는 의지보다는, 언젠가 써야 할 말을 놓치지 않기 위해 들고 다니는 빈 그릇 같은 물건. 그는 한참 동안 아무것도 쓰지 못하다가, 마침내 한 줄을 적었다.
나는 바다를 떠난 것이 아니라, 바다의 다른 쪽으로 옮겨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 한 줄이 마음에 딱 맞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어딘가를 건드리고 있었다. 사람은 때때로 정확한 해답보다 약간 비껴난 문장 하나로도 오래 묶인 매듭을 느슨하게 만들 수 있다. 그는 다시 펜을 들었다.
바다는 내게 명령과 긴장을 먼저 가르쳤고, 이제 와서는 비로소 쉼을 가르친다.
이번에는 조금 더 마음에 들었다. 그는 수첩을 덮었다. 말은 아직 덜 익었지만, 어쨌든 안에서 무언가 자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어제 만난 여자를 다시 만났다. 오늘도 바구니를 들고 있었으나, 이번에는 쑥 대신 조개껍질 몇 개와 해변에서 주운 듯한 작은 유목 조각이 들어 있었다.
“일찍 나오셨네요.”
“원래 좀 일찍 깨는 편이라.”
“군인이셨어요?”
그가 잠깐 놀란 얼굴을 하자, 여자는 웃었다.
“걸음이 그렇고, 주변 보는 눈이 그래요. 여기 처음 오는 사람들은 대개 풍경만 보는데, 선생님은 출구랑 경사랑 돌 위치까지 같이 보시더라고요.”
그는 조금 머쓱하게 웃었다.
“오래 있었죠.”
“바다 쪽이었나 보네요.”
“예.”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다를 가까이 두고 오래 산 사람들의 고개 끄덕임에는 묘한 이해가 있다. 굳이 자세히 묻지 않고도, 어떤 직업과 어떤 세월이 한 사람에게 남기는 표정을 알아보는 듯한.
“그래서 이제 와서는 바다가 좀 어렵죠?”
그는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어려워서 오히려 멀리했다는 것을 그는 자신도 이제야 조금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저희 아버지도 그랬어요. 배 타던 분이었는데, 일 그만두고 한동안은 바다를 안 보러 가셨어요. 나중에야 그러더라고요. 너무 오래 일로만 봐서, 그냥 바다로 다시 보는 데 시간이 걸렸다고.”
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아침의 공기가 차갑고 맑았다.
“맞는 말이네요.”
“근데 이상하지 않아요? 사람을 제일 많이 데려간 것도 바다인데, 사람을 제일 많이 달래는 것도 바다예요.”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그 웃음은 과장 없이 잔잔했다. 그는 그 말을 마음속에서 몇 번 굴려보았다. 사람을 제일 많이 데려간 것, 사람을 제일 많이 달래는 것. 바다는 분명 그 두 얼굴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군 생활 동안 그는 바다의 엄격함을 배웠고, 그 엄격함 덕분에 생명을 지키는 법도 배웠다. 그러나 지금 여기 서서 느끼는 것은 그 엄격함과 다른 종류의 품이었다. 끝없이 흔들리면서도 끝내 사람을 받아주는 품. 무너지라고 말하지도, 강해지라고 다그치지도 않는 품.
“산책로 끝에 작은 해변 하나 있어요,” 여자가 말했다. “관광객들은 잘 모르고 지나가는데, 거기 앉아 있으면 좀 좋아요.”
그는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날 오후 그는 여자가 말한 작은 해변을 찾았다. 정말 작았다. 모래사장이라기보다는 둥근 자갈과 모래가 반쯤 섞인 만 같은 곳이었다. 양옆으로 검은 바위가 감싸고 있어 멀리서 보면 잘 보이지 않았다. 파도도 크지 않았다. 넓은 해변처럼 시원하게 밀려와 부서지기보다, 작은 호흡처럼 가까이 왔다가 조용히 물러났다. 그는 자갈 위에 앉았다. 바위가 햇빛을 오래 받아 따뜻했다.
한참 바다를 보다가 그는 갑자기 울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유를 정확히 말할 수는 없었다. 슬퍼서만은 아니었다. 억울해서도, 후회해서도 아니었다. 다만 너무 오래 단단하게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와 따뜻한 곳에 앉자 그 단단함이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울지 않았다. 대신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파도 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소금기 어린 바람이 얼굴을 쓸고 지나갔다. 그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 항해 중 사고로 부하 하나를 잃을 뻔했던 밤을 떠올렸다. 모두가 얼어붙었던 그 순간, 그는 끝까지 침착해야 했다. 누군가는 명령해야 했고, 누군가는 판단해야 했고, 누군가는 흔들리지 않아야 했다. 그는 그 역할을 해냈다. 결과적으로 사람은 살았고, 임무도 수습되었다. 모두가 그를 칭찬했다. 그러나 그날 이후 그의 안 어딘가에는 한 번도 다 풀리지 않은 매듭이 남았다. 살아남은 것에 대한 안도와, 잃을 뻔했던 것에 대한 공포와, 끝내 누구에게도 다 털어놓지 못한 죄책감 같은 것. 그는 그 많은 매듭들을 군복 속에 잘 접어 넣고 오래 살았다.
지금 바다 앞에 앉아 있는 그는 더 이상 지휘관도, 선임도, 책임자도 아니었다. 그냥 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이제는 인정해도 될 것 같았다. 무서운 밤들이 있었다는 것을. 잘해냈지만 힘들었다는 것을. 견뎠지만 상처가 남았다는 것을. 그는 눈을 뜨고, 아무도 없는 작은 해변에서 아주 천천히 말했다.
“나도 힘들었구나.”
바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파도가 한 번, 아주 얕게 밀려와 자갈들을 굴렸다. 자갈들이 서로 부딪히며 내는 맑은 소리가 들렸다. 마치 누군가 알겠다고, 늦었지만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웃음은 짧았지만 어딘가에서 막힌 물길이 처음 트일 때 나는 소리처럼 가벼웠다.
그 후 며칠 동안 그의 하루는 단순했다. 새벽에 일어나 숲길을 걷고, 바다를 보고, 밥을 먹고, 낮잠을 조금 자고, 다시 해변으로 가거나 마을 골목을 천천히 걸었다. 골목에는 빨래가 널려 있었고, 담벼락에는 넝쿨이 오르고 있었고, 작은 슈퍼 앞에는 플라스틱 의자 두 개가 항상 햇빛을 받고 있었다. 그는 그 평범한 풍경들이 좋았다. 군 생활 동안 그의 시간은 늘 목적을 향해 정렬되어 있었다. 지금은 목적 없는 시간이 흐르고 있었고, 그 무용함이 오히려 마음을 살렸다. 사람은 효율로만 회복되지 않는다. 쓸모없어 보이는 바람 한 번, 멍하니 물결을 보는 십 분, 이름 모를 풀잎을 만져보는 손끝 같은 것들이 지친 마음을 먼저 치료한다.
셋째 날 저녁, 그는 숙소 마당에 앉아 차를 마셨다. 숙소 주인이 내어준 쑥차였다. 잔에서는 봄 냄새가 났다. 하늘은 맑았고, 해송 끝에는 노을이 마지막 빛을 얇게 걸치고 있었다. 그는 수첩을 꺼내 또 몇 줄을 적었다.
나는 오랫동안 바다를 임무의 얼굴로만 기억했다. 그러나 바다에도 쉬는 얼굴이 있었다.
숲을 지나야 보이는 바다라는 것이 좋다. 곧바로 닿지 않고, 먼저 풀 냄새와 잎 그림자를 지나게 하는 것. 사람의 마음도 그렇게 회복되는지 모른다. 바로 깊은 곳으로 들어가지 않고, 먼저 가장자리의 초록을 걷는 일로.
그는 적고 나서 펜을 멈췄다. 마지막 문장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그렇다. 자신은 지금 회복의 가장자리를 걷고 있는 것 같았다. 아직 다 나은 것은 아니고, 앞으로 완전히 나을지조차 모르지만, 적어도 어디로 걸어가야 하는지는 조금 알 것 같았다. 마음에도 수풀 같은 구간이 필요하다는 것. 너무 밝고 넓은 곳으로 단번에 나아가기 전에, 바람이 잎을 흔드는 소리와 흙 냄새 속을 천천히 걷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
마지막 날 아침, 그는 해가 뜨기 전에 작은 해변으로 갔다. 동쪽 하늘이 아직 완전히 밝아지지 않아 바다는 회청색이었다. 수평선 위로 연한 빛이 번지기 시작했고, 그 빛은 아주 천천히 물 위를 타고 다가왔다. 그는 바위 위에 앉아 그 장면을 오래 보았다. 해가 떠오르는 순간은 생각보다 소란스럽지 않았다. 누구도 축포를 쏘지 않았고, 음악도 없었고, 세상은 여전히 조용했다. 그저 빛이 조금씩 많아졌고, 바다의 색이 조금씩 바뀌었고, 밤새 어둠 속에 잠겨 있던 것들이 하나둘 제 모습을 드러냈다. 회색이 푸름으로, 푸름이 은빛으로, 은빛이 다시 투명한 물빛으로 풀려났다.
그는 그 변화를 보며 문득 자기 삶을 생각했다. 젊은 날에는 언제나 분명한 결론과 빠른 정답을 원했다. 위험 앞에서는 특히 그랬다. 신속함은 생명을 지키는 일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이제 와 보니, 사람의 마음과 세월은 해 뜨는 것과 닮아 있었다. 단번에 밝아지지 않는다. 먼저 가장자리가 옅어지고, 그다음 표면의 색이 바뀌고, 마지막에야 중심이 보인다. 그는 이 며칠 동안 완전히 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자기 안의 어둠이 어떤 방식으로 걷히는지는 보았다. 서둘러 없애야 할 것이 아니라, 시간이 스며들며 천천히 물러가게 두어야 할 것. 바다와 숲이 그걸 알려주었다.
해가 수평선 위로 조금 더 올라왔을 때, 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 끝에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이 덜 깬 듯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여보세요.”
“응, 나야.”
“일찍 일어났네.”
“원래 그렇잖아.”
아내가 웃었다. 짧은 웃음이었지만 그 안에 오래 함께 산 사람만이 가지는 다정함이 있었다.
“거긴 어때요?”
그는 잠깐 바다를 보았다. 빛이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좋아. 많이 좋아.”
“그래요? 다행이네.”
“응.”
그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천천히 말했다.
“나 돌아가면, 당신이랑도 한번 오고 싶어.”
전화기 너머로 아주 잠깐 정적이 흘렀다. 파도 소리가 그 사이를 채웠다.
“같이 가요,” 아내가 말했다. “천천히.”
그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 천천히. 참 좋은 말이었다. 젊은 날에는 늘 빠르게 움직였고, 중요한 것은 늘 긴박한 쪽에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제 그에게 필요한 것은 천천히라는 말 속에 있었다. 천천히 걷고, 천천히 보고, 천천히 회복하는 것. 그는 아내와 몇 마디 더 나누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
돌아가는 날, 그는 다시 해송 산책로를 걸었다. 처음 왔을 때와 같은 길이었으나 마음은 달라져 있었다. 풀잎은 여전히 바람에 흔들렸고, 솔 냄새는 여전히 공기 속에 배어 있었고, 길은 여전히 초록 사이를 가늘게 이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는 그 길이 단지 바다로 가는 통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이 길 자체가 하나의 시간이었다. 수풀을 지나며 잎 그림자를 어깨에 얹고, 흙과 소금과 빛이 섞인 공기를 들이마시는 그 시간이 이미 치유였다. 바다는 그 끝에 있는 커다란 대답이었고, 이 숲길은 그 대답에 이르기 전 마음이 천천히 제 속도를 되찾는 문장이었다.
산책로 끝에서 마지막으로 바다가 보였다. 오늘의 바다는 첫날보다 더 밝았다. 아니, 아마 같은 바다일 텐데 그가 달라진 탓일 것이다. 그는 난간에 손을 얹고 한 번 더 오래 바라보았다. 바다는 여전히 넓고, 여전히 알 수 없고, 여전히 사람보다 오래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 앞에서 너무 작아지지도, 지나치게 긴장하지도 않았다. 그저 한 사람이 한 풍경 앞에 서 있듯, 자연스럽게 서 있을 수 있었다.
그는 속으로 말했다.
고맙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여전히 분명하지 않았으나, 이번에는 그것이 굳이 분명할 필요가 없었다. 바다에게도, 숲에게도, 그를 여기까지 데려온 시간에게도, 그리고 끝내 무너지지 않고 여기까지 걸어온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으니까.
그는 발길을 돌려 마을로 내려왔다. 작은 숙소의 문을 닫고 차에 올라타기 전,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해송 위로 하늘이 열려 있었고, 그 너머에는 보이지 않아도 바다가 있었다. 보이지 않아도 있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어쩌면 나이 들어 얻는 평온인지도 몰랐다. 늘 눈앞에 있어야 믿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아도 제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아는 것. 그는 그 감각을 조용히 품었다.
차가 마을을 벗어나고 해안선이 점점 멀어졌다. 대신 길가의 수풀들이 창밖으로 길게 흘러갔다. 연둣빛과 짙은 초록과 햇빛을 머금은 잎들이 한 장면씩 뒤로 밀려났다. 그는 그 초록을 보며 생각했다. 마음도 저렇게 자라는 것이겠다. 어느 날 갑자기 울창해지는 것이 아니라, 작은 잎 하나가 나고, 그 옆에 또 하나가 나고, 바람에 흔들리며 견디고, 그렇게 겹겹이 쌓여 마침내 누군가의 지친 몸을 덮어주는 숲이 되는 것. 자신 안에도 그런 숲이 다시 자랄 수 있을까. 아마 가능할 것이다. 이미 조금 시작되었으니까.
바다는 멀어졌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풀 냄새 속에 스며 있었고, 손등 위를 지나간 바람의 감촉 속에 남아 있었고, 그가 적어둔 수첩의 문장들 사이에도 얇게 번져 있었다. 그는 운전대를 잡은 채, 아주 오랜만에 몸 안에 단단한 긴장이 아니라 부드러운 여백이 생긴 것을 느꼈다. 그것은 승리도, 극적인 깨달음도 아니었다. 다만 한 사람의 마음이 조금 덜 거칠어지고, 조금 덜 아프고, 조금 더 자기 자신을 이해하게 된 조용한 변화였다.
그리고 그는 알았다. 앞으로도 종종 흔들릴 것이다. 이유 없이 허전한 날도 있고, 오래전의 파도 소리가 불쑥 가슴을 치는 저녁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안다. 그럴 때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푸르른 수풀을 지나, 바다가 보이는 자리까지. 잎 그림자가 어깨에 내려앉고, 솔 냄새가 숨 속으로 스며들고, 마침내 넓은 물빛 앞에 서서 너무 오래 참아온 말들을 천천히 내려놓을 수 있는 곳까지.
그 길을 그는 이미 한 번 걸었다.
그러니 다시도 걸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무너진 자리에서만이 아니라, 푸른 것들 사이를 천천히 지나며도 회복된다는 것을,
바다가 아니라 그 바다로 가는 수풀의 결이 먼저 가르쳐준 봄의 해안에서,
그는 마침내 알게 되었다.
작가의 말
인생을 오래 건너온 당신들에게.
어느덧 불혹을 지나, 시간은 우리를 단단하게도 만들었고, 동시에 조금씩 비워내기도 했다. 나 역시 그렇게 살아왔다. 견디고, 버티고, 때로는 아무 일 없는 얼굴로 하루를 지나며.
그런데도 문득, 이유 없이 비어 있는 순간이 찾아온다. 무엇이 빠져나간 것인지 알 수 없으면서도, 분명 무언가가 빠져 있다는 감각. 그 공허는 소리 없이 스며들어, 우리가 애써 쌓아 올린 것들 사이를 천천히 지나간다.
나는 그 이유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알고 있다.
우리가 두고 온 것들, 돌아보지 못한 채 지나쳐 온 시간들, 그때의 나와 그때의 온도. 우리는 어쩌면 그것들을 찾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들은 더 이상 되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손에 쥐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제는 가만히 귀 기울여야 하는 것들이다.
지나간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형태를 바꿔, 우리 안에 남는다.
말이 아닌 울림으로, 설명이 아닌 감각으로.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걸어갈 수 있다.
비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 순간조차, 어쩌면 삶이 남겨 놓은 가장 조용한 울림일지도 모르기에.
이 글을,
오늘도 묵묵히 삶을 견디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건넨다.
윤담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