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유랑

유리진열장 속의 향기

by 윤담

도시는 멀리서 보면 잘 닦인 유리 진열장 같았다. 아침 햇빛이 빌딩의 창마다 얇은 금박처럼 붙고, 정오가 되면 회색 외벽들이 갑자기 은색 비늘을 뒤집은 물고기 떼처럼 번쩍였으며, 저녁이면 간판과 신호등과 자동차 후미등이 한꺼번에 풀려나와 검푸른 거리 위를 붉고 노랗고 파란 물감처럼 흘렀다. 이곳의 밤은 검은색 하나로 이루어져 있지 않았다. 검정 속에는 젖은 자줏빛이 있었고, 택시 지붕 위를 미끄러지는 초록빛이 있었고, 횡단보도 앞 우산 끝에 잠깐 걸렸다 사라지는 분홍빛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색들 사이를 지나가며 하루를 닳게 했고, 도시는 저마다의 체취와 피로와 욕망을 얇은 향막처럼 겹겹이 겹쳐 올렸다. 갓 볶은 커피 냄새, 지하철 환풍구의 금속 냄새, 화단 흙이 젖을 때 올라오는 어두운 냄새, 누군가 막 스쳐 지나간 뒤 남기는 비누 향과 담배 냄새와 스킨 냄새. 그것들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한 겹씩 얹혔다. 마치 한 사람의 표정이 한 가지 감정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듯, 한 도시의 공기 또한 한 가지 색과 한 가지 향으로만 설명되지 않았다.
강훈은 그 도시를 걸을 때 늘 먼저 숨을 들이켰다.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 직전에도, 회전문을 밀고 로비로 들어설 때도 그는 무의식처럼 코끝을 아주 조금 들어 올렸다. 냄새를 맡는다는 건 그에게 습관이면서 경계였고, 동시에 세상과 화해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사람보다 먼저 공기를 인식했다. 누군가 막 뛰어 지나간 자리에는 따뜻해진 니트와 서류 종이 냄새가 남았고, 비 온 뒤의 보도블록에서는 검은 우산 끝에서 떨어진 물방울 냄새까지 구분할 수 있었다. 그는 향을 맡을 때면 왼손 엄지손톱으로 오른손 검지를 천천히 문지르는 버릇이 있었는데, 생각이 깊어질수록 그 동작은 더 느려졌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붙들기 위해 손끝에 작은 닻 하나를 내리는 것처럼.
그는 조향사였다.
정확히는 향수를 만드는 브랜드의 메인 퍼퓨머였고, 더 정확히는 향이 아직 이름을 얻기 전의 상태를 오래 응시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향은 꽃 이름이나 원료명이 아니라 장면이었다. 베르가못은 새벽 다섯 시의 푸른 유리창이었고, 네롤리는 막 다림질한 흰 셔츠의 팔 안쪽에 숨어 있는 햇빛이었으며, 샌달우드는 늦은 밤 책을 덮고도 한동안 꺼지지 않는 스탠드 조명의 누런 숨결 같았다. 그는 그런 식으로 세상을 기억했다. 사람을 외울 때도 얼굴보다 그 사람에게서 나는 공기의 결을 먼저 기억했다. 누구는 납작한 회색 종이처럼 마른 향을 가지고 있었고, 누구는 막 껍질을 벗긴 감귤처럼 웃음 끝에 미세한 산미를 남겼다.
강훈의 하루에는 작고 정교한 반복이 많았다. 아침에 조향실 문을 열면 그는 창문을 먼저 손가락 두 마디만큼 열었다. 바깥공기가 안으로 들어와 밤새 잠들어 있던 유리병들을 한번 흔들어 깨우는 동안, 그는 물을 데워 아무 향도 들지 않은 흰 머그잔에 따뜻한 물만 따라 마셨다. 커피는 향을 흐리게 한다며 오전 열 시 전에는 마시지 않았다. 향료 병의 라벨이 조금이라도 비뚤어져 있으면 반드시 바로잡았고, 시향지를 들 때는 끝을 접지 않으려 늘 같은 각도로 손을 썼다. 누군가 보면 예민하다고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그 모든 반복이 자신을 무너지지 않게 붙들어 주는 리듬이라고 믿었다. 설명되지 않는 감각을 다루는 사람일수록 삶의 다른 부분에서는 작고 단단한 질서가 필요했다.
반면 서인은 보는 것만 믿는 여자였다.
그녀는 마케팅전략팀 팀장이었고, 숫자와 이미지와 반응 데이터로 세상을 읽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물건의 모서리를 맞추는 습관이 있었다. 회의실에 들어오면 먼저 노트북을 테이블 모서리와 평행하게 놓고, 펜은 항상 오른쪽 위에 수직으로 올려두었다. 폴더 속 문서 정렬이 흐트러지면 손이 먼저 갔고, 엑셀 시트의 칸 높이가 다르면 대화를 하다가도 그걸 맞추고 싶은 충동을 참지 못했다. 출근길에 엘리베이터 안 거울을 보면 늘 오른쪽 귀 뒤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한 가닥을 정확히 집어 올렸고, 누군가가 “대충 이 정도면 됐죠”라고 말하면 거의 자동반사처럼 “대충이 제일 오래 문제 되더라고요”라고 답하곤 했다. 그녀의 세계는 선명해야 했다. 윤곽이 흐린 것은 오래 믿지 않았다. 잘 보인다는 것은 그녀에게 안심할 수 있다는 뜻과 비슷했다.
서인에게는 아주 오래된 버릇이 하나 더 있었다.
사람들과 대화할 때 무의식적으로 상대의 눈썹과 입꼬리, 손끝을 훑어보는 버릇. 말이 아니라 형태를 읽는 사람의 습관이었다. 누군가 “괜찮다”라고 말해도 입술 가장자리가 너무 빨리 접히면 그 말을 믿지 않았고, 누군가 웃으며 악수를 청해도 손가락 끝에 힘이 없으면 그 호의를 절반쯤 덜 받아들였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안다. 말은 고칠 수 있지만 표정의 미세한 떨림과 눈동자의 머뭇거림은 쉽게 위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그녀는 향보다 시선을 믿었고, 분위기보다 근거를 믿었으며, 무엇보다 결과를 믿었다. 살아보니 보이지 않는 약속들은 대체로 너무 쉽게 사라졌으므로.
강훈과 서인이 처음 정면으로 마주한 것은 여름이 막 끝나갈 무렵이었다.
새로운 향수 라인을 준비하는 프로젝트가 시작되면서 조향팀과 마케팅팀이 한 테이블에 앉게 된 것이다. 회의실의 유리 벽 밖으로는 햇빛이 너무 밝아, 복도 지나가는 사람들마저 얇은 흰 윤곽선으로 번져 보였다. 에어컨 바람은 천장에서 일정한 각도로 내려왔고, 테이블 위 물컵에는 금세 작은 물방울들이 맺혔다. 강훈은 그날도 시향지를 열 장 가까이 들고 왔고, 서인은 그보다 더 많은 자료를 들고 왔다. 시장조사 리포트, 타깃 페르소나, 경쟁 제품 그래프, 패키지 레퍼런스 이미지. 그녀의 파일철은 색깔별 탭이 달린 지도처럼 정교했다. 반면 강훈이 펼친 것은 투명한 병 몇 개와 간단한 메모가 적힌 노트, 그리고 아직 누구에게도 설명되지 않은 냄새의 결뿐이었다.
“이번 타깃은 명확해요.”
서인이 첫 장을 넘기며 말했다. 화면이 바뀔 때마다 차가운 푸른빛이 그녀의 턱선 아래로 얇게 흘렀다.
“후각적인 실험보다 체감 가능한 인상이 중요해요. 첫 향에서 바로 차별점이 느껴져야 하고, 이미지 연상이 분명해야 합니다.”
강훈은 그녀 앞에 놓인 화면을 보다가 조용히 물었다.
“차별점이 분명하다는 건, 한 번 맡고 바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인가요.”
“네. 사람들은 복잡한 걸 좋아하기도 하지만, 처음엔 결국 명확한 걸 집어요.”
“향이 꼭 바로 이해돼야 하나요?”
서인은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제품이라면요.”
강훈은 잠시 시향지를 정리했다. 손끝이 종이 가장자리를 아주 느리게 쓸었다.
“저는 어떤 향은 조금 늦게 이해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그 말에 서인이 처음으로 그를 정면으로 봤다. 그녀의 눈빛은 차가운 것이 아니라, 측정하려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낯선 성분표를 보는 것처럼, 이 사람의 문장이 어디로 향하는지 먼저 구조부터 파악하려는 눈빛.
“향수는 시험 문제가 아니에요. 늦게 이해되면 이미 선택은 끝났죠.”
강훈은 웃지 않았다.
“사람은 그렇지 않던데요.”
“사람이랑 제품을 자꾸 겹쳐 보시나 봐요.”
“가끔은요.”
“저는 안 그래요.”
서인의 목소리는 딱딱하지 않았지만 분명했다. 반듯한 유리판을 손가락 마디로 두드렸을 때 나는 소리 같았다.
“보이지 않는 걸 너무 많이 기대하면 실망할 일이 많더라고요.”
그 문장은 그냥 말한 것이 아니었다. 강훈은 그걸 알아차렸다. 향을 맡는 사람은 어떤 말의 온도도 함께 듣는다. 서인의 말에는 단정함보다 먼저 오래 굳은 피로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서 더 묻지 않았다. 아직은 서로의 세계가 너무 단단히 닫혀 있었고, 닫힌 문은 이유를 캐묻는다고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두 사람은 자주 부딪혔다.
강훈은 “잔향이 천천히 피어야 한다”라고 말했고, 서인은 “첫인상이 약하면 끝”이라고 말했다. 강훈은 “조용한 향도 사람을 붙든다”고 했고, 서인은 “조용한 건 기억되지 않기도 한다”고 받아쳤다. 둘의 대화는 늘 틀린 말이 없어서 더 피곤했다. 한쪽이 완전히 오류라면 오히려 쉬웠겠지만,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진실을 들고 있었다. 문제는 그 진실들이 좀처럼 포개어지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회의실은 그런 충돌을 고스란히 기억하는 장소가 되어 갔다.
오전의 회의실은 아직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유리그릇처럼 맑았고, 오후가 되면 사람들의 체온과 식은 커피 냄새, 장시간 켜진 프로젝터의 열이 얇은 막처럼 눌어붙었다.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오는 빛도 계절에 따라 달라졌다. 초가을의 빛은 잘 벼린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늦가을의 빛은 오래 문지른 은수저처럼 약간 흐리면서도 차분했다. 그 빛 아래에서 서인의 자료는 늘 또렷했으며, 강훈의 향은 늘 보이지 않는 채로만 존재했다. 둘은 같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았지만, 한 사람은 형태를 제시하고 한 사람은 형태 바깥의 여운을 내밀고 있었다.
어느 날 서인이 강훈의 샘플을 맡고 말했다.
“이건 너무 흐려요.”
그날은 비가 오기 직전이라 하늘이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창밖 건물 외벽은 평소보다 더 평평한 회색으로 보였고, 회의실 안 공기도 약간 눅눅했다.
“형태가 없어요. 처음엔 비누 같다가 금방 사라지고, 끝은 예쁜데… 거기까지 기다려 줄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요.”
강훈은 시향지를 다시 받아 천천히 맡았다. 그가 만든 향은 처음엔 거의 흰빛에 가까웠고, 시간이 지나면서 아주 옅은 과육색과 말린 나무의 결을 드러내는 종류였다. 그는 그런 느린 변화가 좋았다. 사람도 대개 그렇게 기억된다고 믿었으므로. 처음엔 아무렇지 않다가, 나중에 와서야 자꾸 떠오르는 얼굴들처럼.
“기다려 줄 사람이 아니라, 기다리게 되는 사람이겠죠.”
서인은 짧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 차이를 소비자가 왜 감당해야 하죠.”
“향이 조금만 느리게 말한다고 해서 감당이라고까지 할 필요가 있나요.”
서인은 한숨을 삼키듯 짧게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손끝이 시향지 모서리를 한번 반듯하게 맞췄다.
“강훈 씨는 늘 말이 너무 예뻐요. 그런데 예쁜 말이 다 설득력 있는 건 아니에요.”
강훈은 그제야 시향지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병 속 액체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팀장님은 늘 말이 너무 정확하네요.”
“정확한 게 문제예요?”
“아뇨. 너무 정확해서 다른 가능성을 밀어낼 때가 있는 것 같아서요.”
회의실 공기가 얇게 얼었다.
서인은 즉시 표정을 바꾸지 않았지만, 오른손 검지가 노트북 가장자리를 두 번 두드렸다. 그녀가 불편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유리컵 바닥이 테이블에 닿을 때 나는 것 같은 가볍고 마른 소리가 났다.
“가능성은 결과가 될 때 의미가 있어요.”
“그럼 결과가 되기 전의 건 다 쓸모없는 건가요.”
“그렇게 말한 적 없어요.”
“비슷하게 들리긴 하네요.”
서인은 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자료를 정리하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그날 이후 두 사람은 필요한 말 외에는 거의 섞지 않았다.
강훈은 더 오래 조향실에 머물렀고, 서인은 더 많은 데이터를 끌어왔다. 서로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감정은 천천히 상대 자체에 대한 피로로 번지기 시작했다. 누군가와 계속 부딪히면 그 사람의 말투, 앉는 방식, 침묵의 길이까지 거슬리게 되는 순간이 온다. 강훈은 서인이 회의 때마다 문장을 네모반듯하게 접어 놓는 말버릇이 갑갑했고, 서인은 강훈이 핵심을 바로 말하지 않고 자꾸 감각의 비유로 돌아가는 방식이 답답했다. 복도 끝에서 우연히 마주쳐도 둘은 예전보다 더 짧게 인사했고, 메일은 점점 더 정확해졌지만 그 정확함에는 자꾸만 차가운 광택이 돌았다.
그러나 사람을 이해하게 되는 계기는 대개 싸움의 한가운데보다 싸움의 바깥에서 온다.
어느 날 밤, 야근 끝에 모두 퇴근한 사무실에 둘만 남았을 때였다.
바깥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창문에 빗줄기가 길고 느리게 흘러내리며 도시의 불빛을 늘였다 줄였다 했다. 사무실 전체가 물속에 잠긴 것처럼 소리가 둔해졌고, 형광등 불빛은 평소보다 더 희게 떨렸다. 강훈은 조향실 문을 잠그고 나와 복도를 지나는데, 탕비실 안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았다. 안에는 서인이 있었다. 그녀는 머그잔 하나를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가만히 창문을 보고 있었다. 늘 단정하게 묶여 있던 머리카락이 조금 풀어져 있었고, 셔츠 소매는 한쪽만 접혀 있었다. 아주 작은 흐트러짐이었는데, 그 흐트러짐 때문에 오히려 그녀가 처음으로 사람처럼 보였다. 늘 반듯하게 세워 둔 벽 한쪽에 비가 조금 스며든 것 같은 얼굴.
강훈이 들어가려다 멈췄을 때, 서인이 먼저 말했다.
“들어와요. 저 혼자 있다고 사라질 사람 같진 않으니까.”
강훈은 머뭇거리다 안으로 들어갔다. 탕비실에는 늦은 커피 냄새와 컵라면 스프 냄새, 비에 젖은 바람이 조금 섞여 있었다. 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낮게 울렸고, 싱크대 위 금속 표면에는 형광등 빛이 차갑게 번졌다.
“안 가세요?”
강훈이 묻자 서인이 잔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조금 있다가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은 회의실의 침묵과 달랐다. 여기에는 싸움 대신 피로가 먼저 앉아 있었고, 하루를 다 써버린 사람들만이 가진 느슨한 무방비가 있었다.
그리고 서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강훈 씨는 왜 그렇게 향에 집착해요.”
그 질문은 비난처럼 들리지 않았다. 정말 묻고 싶어서 묻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강훈은 잠시 생각했다. 대답할 수 있는 말은 많았지만, 진짜 대답은 하나였다.
“어머니가 꽃집을 하셨어요.”
서인이 고개를 들었다.
“어릴 때부터 가게에 오래 있었죠. 계절마다 냄새가 다 달랐어요. 봄엔 줄기 잘린 수선화 냄새가 좀 차갑고, 여름엔 장미 잎 뒤집힌 냄새가 눅눅했고, 겨울엔 프리지아가 유난히 밝았어요.”
강훈은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유리창을 타고 내리는 빗물 뒤로 도시의 빨간 불빛이 길게 번졌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병실에 오래 계셨는데… 이상하게 저는 얼굴보다 냄새를 먼저 기억하더라고요. 약 냄새, 핸드크림 냄새, 말라 가는 꽃 냄새 같은 거요.”
서인은 아무 말 없이 듣고 있었다. 그녀 손가락은 아직도 머그잔의 테두리를 천천히 쓸고 있었다.
“그때 알았어요. 사라지는 것들은 모양보다 공기로 더 오래 남는다는 걸. 그래서 저는 향이 중요해요. 없어지면 더 선명해지는 것들이 있으니까.”
서인의 손가락이 머그잔 테두리를 천천히 문질렀다.
그녀가 생각에 잠길 때 하는 버릇이었다.
“저는 반대예요.”
그녀가 낮게 말했다.
“보이지 않는 걸 믿었다가 너무 많이 사라졌어요.”
강훈은 묻지 않았지만 서인은 조금 더 말했다.
“아버지가 늘 괜찮다고 했거든요. 곧 나아질 거라고. 집도, 상황도, 우리도. 근데 하나도 안 괜찮아졌어요. 말은 남았는데 현실은 다 없어졌죠.”
그녀는 물기 맺힌 유리창에 비친 자기 얼굴을 잠깐 보았다. 빗물 때문에 일그러진 자기 얼굴은 평소보다 더 낯설어 보였을 것이다.
“그 뒤로는 눈으로 확인되는 것만 믿게 됐어요. 숫자, 계약서, 결과, 마감. 적어도 그런 건 나중에 다른 말로 바뀌진 않으니까.”
강훈은 그제야 서인의 단정함이 타고난 성격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것은 무너지지 않기 위해 만든 구조물 같은 것이었다. 곧게 세운 책등과 정렬된 문서, 정확한 문장들. 흔들릴수록 더 반듯해지려는 사람만이 갖는 습관.
그날 이후 둘 사이에는 아주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
정확히는 벽에 생긴 금 같은 것. 벽을 무너뜨릴 만큼 크진 않았지만, 그 틈으로 서로의 안쪽 온도가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했다.
강훈은 회의 때 이전보다 조금 더 분명한 말을 하려고 애썼다.
“좋아요” 대신 “첫 향에서 시트러스가 15초 안에 날아가서 인상이 약해집니다”라고 말했고, “조금 더 기다려야 해요” 대신 “잔향 도달 시간이 평균보다 길어서 첫 반응과 최종 만족도가 다를 수 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이 감각 뒤로 숨고 있었다는 것을 서인을 통해 조금씩 알게 되었다. 향을 사랑하는 것과, 향을 핑계로 설명을 피하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설명된다고 해서 감각이 덜 아름다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서인도 조금 변했다.
그녀는 시향 때마다 처음엔 메모만 하던 습관 대신, 어느 날부터 조용히 눈을 감기 시작했다. 처음엔 강훈이 시킨 것도 아니었고, 본인도 그걸 의식하지 못한 듯했다. 그러나 한 번 눈을 감고 맡아본 향이, 눈을 뜬 채 맡을 때보다 다르게 들어온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녀는 스스로도 놀란 얼굴을 했다. 화면이 꺼진 뒤에야 들리는 소리들이 있는 것처럼, 시선을 잠시 접어야 닿는 감각이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된 사람의 표정이었다. 그녀는 그럴 때면 메모를 하기 전에 손가락을 잠깐 멈췄다. 마치 자기 안에 들어온 낯선 빛의 색을 확인하는 사람처럼.
어느 오후, 테스트 샘플을 검토하던 자리에서 서인이 말했다.
“이 향, 처음엔 흰색인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강훈이 고개를 들었다. 창문에 비친 늦은 오후의 빛이 그녀 볼 옆으로 얇게 걸려 있었다.
“무슨 색인데요.”
“흰색 뒤에 아주 옅은 살구색이 있어요. 끝에 가면 약간 젖은 금빛도 있고.”
강훈은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했다.
서인은 민망한 듯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왜요. 이상한 말 했어요?”
“아뇨.”
강훈이 천천히 웃었다.
“이제 좀 맡으시네요.”
서인은 그 말에 어색하게 웃었다. 웃을 때 그녀는 늘 입꼬리보다 눈동자가 먼저 흔들렸다. 강훈은 그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관계가 가까워진다고 갈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가까워질수록 더 아픈 방식으로 부딪칠 때가 있다. 상대를 이해하기 시작한 뒤에는 예전보다 더 깊은 자리까지 찌르게 되기 때문이다.
최종 보고를 일주일 앞둔 날이었다.
그날 하늘은 맑았지만 이상하게 차가웠고, 조향실 안 빛은 투명하다 못해 거의 서늘했다. 유리병들이 받는 빛마다 작은 칼날 같은 반사가 생겼다 사라졌다. 강훈은 자신이 거의 완성했다고 생각하는 향을 들고 왔다. 첫 향은 과하지 않은 베르가못과 페티그레인으로 열리고, 중간에는 아이리스와 무화과 잎, 끝에는 샌달우드와 흰 머스크가 아주 얇게 남는 구조였다. 그는 이 향이 “환하다”는 말보다 “빛이 오래 남는다”는 말에 가까웠으면 했다. 누군가의 하루가 끝났을 때, 얼굴을 씻고 머리를 풀고 거울 앞에 섰을 때, 그 사람을 조금 덜 낯설게 만들어 주는 향.
서인은 시향지를 받아 오래 맡았다.
조향실 안은 조용했다. 멀리 복도에서 카트 바퀴 지나가는 소리가 한번 들렸다가 사라졌고, 환풍기의 일정한 바람 소리가 얇게 깔렸다. 서인은 눈을 감지도 뜨지도 않은 애매한 얼굴로 향을 맡았다. 그 얼굴에는 호감과 망설임이 함께 있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내려놓았다.
“강훈 씨.”
“네.”
“이건 예뻐요.”
그녀의 말은 칭찬처럼 시작했지만 끝이 좋지 않을 때 특유의 간격을 가지고 있었다. 강훈은 이미 그 다음 문장을 예감했다.
“근데 이번에도 너무 조용해요. 런칭 향수예요. 첫 만남에서 고개를 돌리게 해야 해요.”
강훈은 준비해 온 설명을 하려 했지만, 서인이 먼저 말을 이었다.
“좋은 향인 건 알아요. 근데 브랜드가 지금 원하는 건 이 정도의 섬세함보다 한 번에 기억되는 인상이에요.”
“한 번에 기억되는 건 너무 빨리 잊히기도 해요.”
“그건 감상이고요.”
“아니요, 경험이에요.”
“경험도 증명이 필요해요.”
강훈은 그 순간 참았던 감정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자기 안에서 무언가 오래 눌려 있던 것이 갑자기 들썩였다. 그는 늘 서인의 정확함을 이해하려 했지만, 어떤 순간에는 그 정확함이 자신이 지키고 싶은 세계 전체를 너무 손쉽게 재단하는 칼처럼 느껴졌다.
“팀장님은 자꾸 증명만 찾네요.”
“당연하죠. 그게 제 일이니까.”
“그러다 중요한 걸 놓치면요.”
서인의 표정이 굳었다. 조향실 창문 밖으로는 햇빛이 너무 밝아, 유리 표면이 거의 흰 막처럼 보였다.
“중요한 게 뭔데요.”
강훈은 거의 생각하지 않고 말했다.
“사람이 왜 어떤 걸 오래 좋아하게 되는지요. 팀장님은 늘 보이는 것만 믿으니까, 그런 걸 자꾸 놓치는 것 같아요.”
말이 공기 속으로 떨어졌다.
떨어지고 나서야 강훈은 그 문장이 너무 깊게 들어갔다는 걸 알았다.
서인은 곧바로 화를 내지 않았다.
그녀는 몇 초 동안 아주 조용히 그를 봤다. 그런 침묵은 고함보다 더 무섭다. 상대가 지금 어느 상처를 만졌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뜻이므로. 그녀의 얼굴에서 표정은 거의 사라졌고, 대신 눈동자만 아주 희미하게 흔들렸다. 누군가 금이 간 유리컵을 손 안에 쥔 채 그대로 서 있는 것 같은 표정.
“좋네요.”
서인이 말했다.
“저도 하나 말해도 돼요?”
강훈은 대답하지 못했다.
“강훈 씨는 설명하지 못하는 걸 자꾸 깊이라고 생각해요. 근데 그게 꼭 깊은 건 아니에요. 그냥 겁일 수도 있죠.”
강훈의 손이 굳었다. 시향지 끝이 손가락 사이에서 조금 구겨졌다가 다시 펴졌다.
서인은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보이지 않는 게 다 소중한 건 아니에요. 어떤 건 그냥 말할 용기가 없는 거죠.”
그녀는 시향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들이 놓인 선반 유리 표면에 그녀의 움직임이 일시적으로 얇게 비쳤다.
“오늘은 이만하죠.”
문이 닫힌 뒤, 강훈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향료 병들이 놓인 선반은 그대로였고, 노트 위 숫자도 그대로였는데 조향실 전체가 낯설었다. 서인의 말은 잔인할 만큼 정확했다. 그는 정말로 때때로 향이라는 언어 뒤에 숨고 있었다. 명확히 말하고 상처받느니 감각의 뒤편에서 혼자 맞는 편을 택해 왔는지도 몰랐다. 창문으로 들어오던 밝은 빛마저 그 순간엔 지나치게 날카로워 보였다. 너무 맑은 날의 빛은 때때로 위로가 아니라 노출에 가깝다. 숨고 싶은 곳까지 다 드러내 버리는 종류의.
서인 역시 그날 밤 집에 돌아가 쉽게 잠들지 못했다.
샤워를 하고도 한동안 손목을 맡았다. 거기엔 낮에 맡은 향의 마지막 잔향이 아주 옅게 남아 있었다. 물기 마른 타월 냄새와 샴푸 향 뒤로, 아이리스의 마른 분가루 같은 숨결과 나무의 희미한 온기가 섞여 있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이미 그 향이 자기 안 어딘가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더 괴로운 건 강훈의 말이 완전히 틀리지도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정말로 너무 오래 눈에 보이는 것만 붙잡고 살아왔다. 그러는 동안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 존재했던 어떤 감정들을 너무 빨리 잘라냈는지도 몰랐다. 좋아지는 속도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오래 남는 마음을 처음의 모호함 때문에 포기했는지도.
최종 보고 당일,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회의실은 평소보다 더 차갑게 정돈되어 있었다. 프로젝터 빛은 벽면에 사각형의 희고 얇은 창을 만들고 있었고, 테이블 위 물컵들은 모두 같은 간격으로 놓여 있었다. 임원들의 정장은 어두운 색의 매끈한 표면처럼 보였고, 조향실에서 가져온 샘플 병들은 그 한가운데 투명한 돌멩이처럼 놓여 있었다. 대표가 강훈의 샘플과 마케팅팀이 준비한 대체 샘플을 둘 다 맡아본 뒤 말했다.
“둘 다 이유가 있네요.”
회의실은 조용해졌다. 누구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대표는 서인의 자료 화면을 보다가 강훈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첫인상은 이쪽이 낫고, 오래 남는 건 저쪽이 낫습니다. 문제는 어느 쪽을 브랜드의 얼굴로 삼을지겠죠.”
잠깐의 정적.
에어컨 바람이 서류 한 귀퉁이를 아주 미세하게 흔들었다.
그때 모두의 예상과 다르게 서인이 입을 열었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강훈이 고개를 들었다. 서인의 옆모습은 평소보다 더 단단해 보였지만, 그녀의 오른손 검지는 테이블 밑에서 아주 작게 떨리고 있었다. 불안할 때 숨기는 대신 버티는 사람의 떨림. 그녀는 화면을 넘기지 않은 채 그대로 말을 이었다.
“처음엔 저는 첫인상이 강한 향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그 논리는 유효합니다.”
그녀는 한 번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그 짧은 숨 사이로 강훈은 그녀가 얼마나 조심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테스트를 반복하면서 알게 됐습니다. 사람들이 제품을 고르는 방식이 꼭 우리가 예상하는 직선대로만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걸요. 어떤 향은 바로 좋다고 느껴지고, 어떤 향은 시간이 지나야 이유를 알게 됩니다.”
회의실 안의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 모였다. 그녀는 흔들리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등을 더 곧게 세웠다.
“이번 향은 처음부터 소리를 높이는 타입은 아닙니다. 대신 시간이 지나면서 체온과 만나 색이 바뀝니다. 흰색으로 시작해서 아주 옅은 살구색, 마지막엔 젖은 금빛처럼 남습니다. 저는… 그런 변화가 이 브랜드에 더 오래 갈 얼굴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훈은 그 문장을 듣는 순간 숨을 잊었다.
서인이 자신의 향을 수치가 아닌 색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옹호가 아니었다. 그녀가 자기 방식 바깥으로 한 걸음 나와, 아직 익숙하지 않은 감각을 자기 언어로 번역해 건네는 순간이었다.
대표가 물었다.
“확신합니까?”
서인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네. 이번엔 그렇습니다.”
회의는 길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강훈의 향이 선택되었다. 다만 첫 향의 집중도를 아주 조금만 보강하는 조건이 붙었다.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흩어진 뒤, 빈 회의실에는 물컵에 남은 반쯤의 물과 아직 식지 않은 긴장감이 얇게 남아 있었다. 강훈은 잠깐 그대로 서 있었다. 서인이 자료를 정리하다 말고 그를 보았다.
“왜 그렇게 봐요.”
그녀가 말했다.
강훈은 한동안 적절한 말을 찾지 못했다.
“저한테 유리한 쪽으로 말해주실 줄은 몰랐어요.”
서인은 파일을 닫았다. 덮개가 닫히는 소리가 그날따라 유난히 부드럽게 들렸다.
“유리한 쪽이 아니라 맞는 쪽으로 말한 거예요.”
“그래도요.”
“강훈 씨 말이 맞는 부분이 있었으니까.”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그 짧은 머뭇거림이야말로 서인에게는 거의 고백과 비슷한 망설임이었다.
“그리고… 저도 이제는 보이지 않는 게 전부 거짓은 아니라는 걸 조금은 알아요.”
그 말은 사과보다 더 깊었다.
강훈은 웃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어떤 순간은 너무 정확해서, 거기에 덧붙일 말이 오히려 모자라 보인다.
프로젝트가 마무리된 뒤에도 둘은 여전히 함께 일했다.
하지만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아니었다. 강훈은 중요한 순간마다 감각을 문장으로 번역하는 연습을 했고, 서인은 판단하기 전에 한 번쯤 눈을 감고 냄새를 먼저 들여다보는 법을 익혔다. 둘의 습관은 조금씩 서로를 닮아 갔다. 강훈은 회의실에서 말문이 막힐 때 더는 손끝만 문지르지 않고 “제가 지금 정확히 설명해볼게요”라고 말할 줄 알게 되었고, 서인은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하기 전에 화면부터 켜는 대신 샘플 병을 먼저 열어 공기에 한 번 흔들어 보는 사람이 되었다. 아주 작은 변화였지만, 사람의 성격은 대개 그런 사소한 습관들 속에서 가장 분명하게 바뀐다.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천천히 달라지다가, 어느 날 문득 전과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되는 쪽으로.
사랑은 그다음에 왔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전부터 와 있었는데 둘 다 너무 조심스러워 이름 붙이지 않았는지도 몰랐다.
어느 늦가을 저녁, 두 사람은 퇴근 후 한강 근처를 걸었다.
바람은 차가웠고, 강물 위로 도시의 불빛이 잘게 부서져 있었다. 멀리서는 다리 위 차들이 주황빛 목걸이처럼 이어졌고, 강변 산책로의 가로등은 은은한 호박색으로 젖은 바닥을 적셨다. 지나가는 사람들 틈에서 붕어빵 굽는 냄새와 목도리에 밴 섬유 냄새가 엷게 섞였다. 물가 바람은 금속처럼 차가웠지만, 누군가 포장마차 문을 여닫을 때마다 안쪽의 따뜻한 기름 냄새가 한순간씩 밀려 나왔다. 그런 저녁의 도시는 차갑고 따뜻한 것이 동시에 가능한 곳처럼 느껴졌다.
서인이 말했다.
“나 요즘 이상한 버릇 생겼어요.”
“뭔데요.”
“엘리베이터 타면 거울 보기 전에 먼저 숨 쉬어요.”
강훈이 웃었다.
“좋은 버릇이네요.”
“별로예요. 전에는 그런 적 없었는데.”
“전에는 안 보이던 게 보이나 봐요.”
서인은 한참 걷다가 멈춰 섰다. 강물 위로 흔들리는 빛이 그녀 눈동자 안에서도 아주 작게 흔들렸다. 그리고 아주 솔직한 사람처럼, 그러나 여전히 조금은 두려운 사람처럼 말했다.
“강훈 씨는요. 사람을 향처럼 기다리게 만들어요.”
강훈은 그녀를 보았다.
“그게 좋은 뜻인가요.”
“모르겠어요.”
서인이 웃지도 울지도 않는 얼굴로 대답했다.
“근데 자꾸 생각나요. 왜 그런지는 아직 잘 안 보이는데.”
그 말은 서인에게 거의 고백이나 다름없었다.
강훈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향이 너무 빨리 이름 붙는 걸 아쉬워하는 사람이었고, 마음도 때로는 그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대신 그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손끝이 닿기 직전까지 서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의 손이 그의 손 안에 들어왔을 때, 차가운 손등 아래쪽으로 아주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강훈은 그 떨림을 놓치지 않았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한 것들. 그는 늘 그런 것들을 믿어 왔다.
연인이 된 뒤에도 둘은 쉽게 완성되지 않았다.
서인은 여전히 중요한 계약을 앞두면 서류 모서리를 맞추는 버릇부터 했고, 강훈은 감정이 복잡해질수록 말을 줄이고 향료 병 정리부터 했다. 어떤 날은 서인이 “그냥 말로 해주면 안 돼?” 하고 짜증을 냈고, 어떤 날은 강훈이 “모든 걸 바로 정의하려고 하지 말아요” 하고 지쳐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 둘은 상대의 습관을 성격 결함으로만 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것이 두려움이 자라온 형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서인의 정렬은 불안을 무너지지 않게 붙드는 방식이었고, 강훈의 침묵은 상실을 너무 직접적으로 만지지 않기 위한 완충재였다. 사랑은 상대의 상처를 치료해 주는 능력이 아니라, 그 상처가 왜 그런 모양으로 굳었는지 끝내 배우려는 의지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들은 싸울 때도 예전만큼 함부로 깊은 곳을 찌르지 않았다. 상처를 알게 된 뒤의 싸움은 오히려 조심스러워진다. 아프게 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겨울이 깊어질수록 도시는 더 화려해졌다.
거리마다 조명이 걸리고, 상점 유리창 안에는 짙은 초록 리본과 붉은 장식이 늘었다. 그러나 강훈은 그 계절의 진짜 색이 쇼윈도 속 금빛이 아니라, 퇴근길 사람들 코트 어깨 위에 얇게 내려앉는 보랏빛 그림자라고 생각했다. 전철역 출구 계단을 올라오는 사람들 머리 위로는 희끄무레한 입김이 퍼졌고, 그 위를 가로등 불빛이 담담하게 덮었다. 서인은 예전 같으면 그런 말을 듣고 “또 시작이네” 하고 웃었겠지만, 이제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실제로 그 보랏빛을 찾곤 했다. 그리고 어느 날엔 먼저 말했다.
“오늘 공기 색이 좀 파래요.”
강훈이 놀라서 그녀를 보자 서인이 민망한 듯 어깨를 으쓱했다.
“왜요. 이제 나도 좀 보여요. 아니, 보여서가 아니라…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강훈은 그 말을 오래 기억했다.
보는 것만 믿던 사람이 느껴진다고 말하는 순간.
그 변화는 크지 않아 보였지만, 실은 한 사람의 세계가 아주 깊은 방향으로 넓어졌다는 뜻이었다.
강훈 역시 달라졌다.
예전의 그는 향을 만들고 나면 설명을 꺼렸다. 누군가 알아봐 주기만 기다렸다. 그러나 서인을 만나고 나서 그는 알게 되었다. 사랑도 향도, 닿고 싶다면 때로는 자기 안의 모호함을 문장으로 번역해 건너가야 한다는 것을. 어느 봄 저녁, 서인이 힘든 프로젝트로 지쳐 집 앞에서 말없이 서 있었을 때, 강훈은 더는 향수를 손목에 뿌려주거나 어깨를 감싸는 것으로만 마음을 표현하지 않았다. 그는 분명하게 말했다.
“나 지금 당신 걱정돼요.”
그 한 문장을 듣고 서인은 아주 오래 눈을 감고 있었다.
골목 끝 편의점 불빛이 그녀 속눈썹 아래에 얇게 비쳤고, 바람은 아직 조금 차가웠다. 그리고 나중에 조용히 말했다.
“이상하다. 그런 말, 별거 아닌데 왜 이렇게 오래 남지.”
강훈은 웃었다.
“향보다 말이 더 오래갈 때도 있나 보죠.”
사람들은 흔히 사랑이 서로를 닮게 만든다고 말하지만, 어쩌면 더 정확한 말은 서로에게 없던 감각을 하나씩 빌려 쓰게 만든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강훈은 서인을 통해 설명하는 용기를 배웠고, 서인은 강훈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의 밀도를 배웠다. 한 사람은 향을 문장으로 옮기는 법을, 다른 한 사람은 문장 바깥에서도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을 조금씩 신뢰하는 법을 익혔다.
도시는 여전히 눈부셨다.
아침마다 창문은 은빛으로 번쩍였고, 저녁마다 도로 위 불빛은 와인 잔 가장자리의 붉은 반사처럼 흔들렸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 그 도시는 더 이상 차갑고 단단한 배경만은 아니었다. 어느 골목은 오래된 재즈 레코드의 짙은 갈색 같았고, 어느 카페 앞은 잘 익은 복숭아의 주황빛 같았으며, 어느 지하철 출구 바람은 민트 캔디를 깨문 직후의 푸른 서늘함을 닮아 있었다. 도시는 그렇게, 보는 사람의 감각에 따라 매번 다른 색과 향으로 다시 쓰였다. 예전엔 그냥 지나쳤을 풍경들이 이제는 둘만의 비유를 기다리는 표면처럼 보였다.
어떤 밤에는 둘이 함께 집으로 돌아와 외투를 벗어 의자에 걸어두고, 말없이 거실을 가로질러 서로의 가까이에 앉아 있곤 했다. 서인은 습관처럼 소파 쿠션의 각도를 맞추다가도 어느 순간 멈추고 강훈의 손목을 맡았다. 강훈은 그런 그녀를 보며 웃다가, 예전처럼 숨지 않고 물었다.
“무슨 냄새나요?”
서인은 천천히 대답했다.
“겨울 끝에 남아 있는 햇빛 냄새.”
“그게 무슨 냄새예요.”
“차가운데 따뜻한 냄새.”
강훈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사랑이란 결국 상대를 정확히 아는 일이 아니라 상대를 위해 새로운 비유 하나를 만들어내는 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색 이름과 향 이름을 둘만의 말로 불러보는 일. 그러다 어느 순간, 그 비유가 사실은 사랑 자체의 다른 이름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 일.
강훈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것 뒤에만 숨지 않았고, 서인은 더 이상 보이는 것만으로 세상을 닫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판단했지만, 그 다름이 이제는 벽보다 창에 가까웠다. 서로를 통과해 들어오는 빛과 공기의 방향을 바꾸는 창.
그래서 이 사랑의 끝에서 남는 장면은 거창한 약속이 아니다.
누가 먼저 더 사랑했는지 증명할 수도 없다.
다만 이런 것들이다.
회의실에서 서인이 발표를 시작하기 전, 눈을 감고 먼저 향을 한 번 맡는 습관.
강훈이 중요한 말을 해야 할 때, 손끝만 만지작거리지 않고 결국 문장으로 건너오는 버릇.
비 오는 날 젖은 도시의 불빛을 함께 보다가, 누군가 먼저 “오늘은 공기가 연보라색이네”라고 말할 수 있게 된 저녁.
그리고 하루가 끝난 집 안에서, 외투와 머플러와 머리카락 끝에 남아 있는 서로의 미세한 체온과 향을, 이제는 둘 다 믿게 되었다는 사실.
보이는 것만 믿던 여자와 보이지 않는 것들을 오래 들여다보던 남자가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만나 각자의 감각이 유일한 정답이 아니라는 걸 배웠다.
사랑은 상대를 내 방식으로 바꾸는 일이 아니라, 내가 미처 쓰지 못하던 감각 하나를 조심스레 건네받는 일에 가까웠다.
그러니 어떤 사랑은 인생을 뒤엎지 않는다.
대신 공기의 결을 바꾼다.
도시의 빛을 이전과 다른 색으로 보이게 하고, 늘 지나치던 거리에 전에는 없던 향 하나를 남긴다.
혼자라면 그냥 회색이었을 하루에, 아주 옅은 살구빛과 젖은 금빛을 섞어 놓는다.
그리고 그런 변화는 대개 오래간다.
향처럼, 아주 천천히.
빛처럼, 설명하지 않아도 결국 어디에나 스며드는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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