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유랑

문 아래로(공포단편)

by 윤담

비가 오지 않았는데도 도시는 젖어 있었다.
초저녁부터 내려앉은 안개가 고층 건물의 유리벽을 얇게 핥고 지나가서, 사거리의 네온들은 전부 젖은 붓으로 번진 색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버스는 정류장 앞에 와서 길게 한숨을 뱉었고, 문이 열릴 때마다 안에서 축축한 체온과 젖은 우산 냄새와 피곤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사람들은 각자 휴대전화를 들여다본 채 내렸고, 아무도 서로의 얼굴을 오래 보지 않았다. 그 무심한 시선들이 오히려 이 도시를 지탱하는 기둥처럼 느껴지는 밤이었다. 보지 않음으로써 서로를 견디는 밤.
해인은 정류장에서 내려 오피스텔 쪽으로 걸었다.
구두 굽은 보도블록의 아주 얕은 틈마다 걸렸고, 검은 스타킹 위로 저녁 공기가 올라왔다. 편의점 유리문 안쪽에서 전자레인지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고, 계산대 앞에서는 교복 입은 아이 둘이 컵라면 뚜껑을 손가락으로 눌러가며 웃고 있었다. 웃음은 밝았지만 이상하게 멀었다. 이 도시의 웃음은 늘 유리 한 장 건너편에 있는 것 같았다.
해인은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누가 따라오는 기분은 아니었다. 다만 습관이었다. 퇴근이 늦을수록, 길이 비어 있을수록, 사람은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확인하면 마음이 놓일 줄 알지만, 실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더 서늘한 종류의 확인이 되기도 한다.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횡단보도의 흰 줄 위로 신호등 불빛이 축축하게 번져 있었고, 길 건너 약국의 초록 십자가가 조용히 켜졌다 꺼졌다 했다. 도로를 따라 세워진 차들은 전부 검은 유리로 입을 다문 채 잠들어 있었다. 어느 차 안에는 사람 하나쯤 있을 법했지만, 해인은 들여다보지 않았다. 검은 유리는 늘 누군가를 숨기기에 알맞은 색이었다.
오피스텔 로비는 밤마다 지나치게 밝았다.
천장의 매립등들이 바닥 대리석에 하얗게 박혀 있어서, 막상 그 안으로 들어서면 살아 있는 사람보다 그림자들이 더 선명해졌다. 경비 데스크는 비어 있었고, 택배 보관함 쪽에서는 종이 상자들이 쌓인 냄새가 났다. 벽면의 CCTV 모니터에는 건물의 모든 구석이 작은 사각형들 속에 잘게 나뉘어 떠 있었다. 1층 출입문, 주차장 입구, 엘리베이터 내부, 17층 복도, 18층 복도, 옥상 출입문. 해인은 습관처럼 자기 층 화면을 흘긋 보았다.
18층 복도는 비어 있었다.
늘 그렇듯 하얀 불 아래 길게 누운 복도, 벽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붙은 현관문들, 아무 일도 없는 카펫 무늬. 그 화면은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물속처럼 느껴졌다. 해인은 자기도 모르게 발을 멈췄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냥, 화면 한구석이 이상하게 오래 눈에 남았다. 복도 끝 비상계단 문. 그 문 아래로 검은 그림자가 아주 얇게, 문지방 틈을 따라 길게 깔려 있었다.
하지만 그림자는 늘 있었다.
복도 불과 계단 쪽 센서등의 밝기 차이 때문이었다.
해인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12층에 있었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동안 층수 표시등이 하나씩 바뀌었다. 13, 14, 15. 해인은 거울처럼 닦인 금속 문에 비친 자기 얼굴을 잠깐 보았다. 파운데이션이 조금 무너져 있었고, 입술은 말라 있었다. 오늘 사무실에서 받은 메일과 회의와 엑셀 파일과 누군가의 짧고 예민한 말투가 아직 어깨에 남아 있는 표정이었다. 사람은 피곤할수록 자기 얼굴에서 낯선 사람을 발견한다.
16, 17.
그때 로비 바깥쪽 자동문이 열렸다.
차가운 밤공기가 잠깐 밀려들었다. 누군가 들어오는 줄 알았는데, 문은 잠깐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바깥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동문이 혼자 열릴 때는 대개 바람이 원인이라고들 하지만, 유리문은 그런 식으로 움직일 때마다 늘 누군가가 방금 들어오려다 마음을 바꾼 것처럼 보였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문이 열리고 안쪽의 거울 네 면이 한꺼번에 로비를 비추었다. 텅 빈 상자 속 같은 빛. 해인은 안으로 들어가 18층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닫히려는 순간, 바깥에서 검은 장갑을 낀 손이 문틈을 막았다.
문이 다시 열렸다.
남자가 한 명 들어왔다.
검은 점퍼에 검은 모자, 검은 마스크. 요즘엔 그렇게 입은 사람이 많아서 특별할 것 없었지만, 그에게는 묘하게 계절감이 없었다. 날씨가 아주 추운 것도 아닌데 목 끝까지 잠근 지퍼, 그리고 장갑. 장갑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드물다. 얼굴을 가린 사람보다 손을 가린 사람이 더 이상하다는 걸 해인은 그때 처음 알았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안으로 들어와 해인의 뒤쪽, 버튼 패널 옆에 섰다.
어느 층 버튼도 누르지 않았다.
문이 닫혔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작은 기계음과 함께 층수가 바뀌었다. 2, 3, 4. 금속 벽에 비친 남자의 모습은 실제보다 약간 길었고, 해인의 어깨 뒤에 검은 얼룩처럼 붙어 있었다. 해인은 모니터에 뜬 층수만 보았다. 5, 6. 남자의 숨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마스크 때문인지, 아주 조용한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침묵이 오히려 이상했다. 낯선 사람과 좁은 공간에 둘만 있을 때는 작게라도 기척이 있어야 했다. 옷 스치는 소리, 코로 들이쉬는 숨, 발의 무게. 그런데 남자는 너무 조용해서, 마치 엘리베이터에 처음부터 사람 하나가 아니라 그림자 하나가 타고 있었던 것 같았다.
8층쯤에서 해인은 말했다.
“몇 층이세요?”
아주 평범한 말이었다.
버튼 안 누르셨어요, 라고 돌려 말하는 흔한 문장.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해인은 거울 속으로 그의 얼굴 쪽을 보았다.
검은 마스크 위로 보이는 눈은 생각보다 가까웠다. 그 눈이 해인을 보고 있었는지, 거울 속 해인을 보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검은 모자 챙 아래의 어둠이 눈 주변에 얕은 그늘을 만들고 있었고, 사람 얼굴에서 제일 인간적인 부분이어야 할 눈이 오히려 너무 매끈하고 무표정해서 유리구슬 같았다.
10층.
그제야 남자가 손을 들었다.
검은 장갑 낀 손가락이 버튼 패널로 천천히 움직였다.
18층 버튼 위에 손끝이 닿았다.
이미 켜져 있는 버튼이었다.
남자는 그 빛을 한 번 누르듯 건드렸다가 손을 내렸다.
해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장이 조금 빨라졌다. 아주 조금. 밤에 혼자 귀가하는 여자들이 몸에 익히는 종류의 긴장, 경보라고 부르기엔 아직 작고, 무시하기엔 분명한 것.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근육이 먼저 아는 신호.
14층.
엘리베이터가 잠깐 덜컹했다.
조명이 아주 짧게 흔들렸다. 금속 벽에 비친 두 사람의 형체가 한순간 물 위에 비친 것처럼 일그러졌다. 그 순간 해인은 거울 속에서 남자의 오른손이 조금 더 위로 올라와 있는 걸 보았다. 손은 버튼 패널이 아니라, 해인의 어깨 높이쯤 허공에 떠 있었다. 무엇을 하려는 손인지 알 수 없는 위치. 누군가의 등을 밀 수 있는 거리, 머리카락 끝을 건드릴 수 있는 거리.
해인이 반사적으로 반걸음 옆으로 움직이자, 손은 다시 천천히 내려갔다.
너무 천천히.
18층에 도착했을 때, 문은 바로 열리지 않았다.
잠깐 멈췄다. 기계 안쪽에서 무언가 맞물리는 소리가 두 번 났다. 해인은 숨을 삼켰다. 남자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 짧은 멈춤이 이상할 정도로 길게 느껴졌다. 문이 열리지 않는 몇 초는 사람을 순식간에 아주 오래된 공포 속으로 밀어 넣는다. 밀폐된 공간, 닫힌 문, 낯선 타인. 해인은 손에 든 가방 끈을 세게 쥐었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18층 복도는 비어 있었다.
하얀 불, 길고 조용한 카펫, 벽지의 잔무늬, 현관문 밑으로 조금씩 새어 나오는 실내등.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안심이 될 뻔했다. 해인은 거의 서둘러 내렸다. 뒤에서 남자도 내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문이 닫히기 직전 거울 속을 흘긋 보았을 때 그는 그대로 안에 서 있었다. 내리지도, 버튼을 누르지도 않은 채.
문이 닫혔다.
해인은 잠깐 멈춰 섰다.
닫힌 문에 자기 얼굴이 희미하게 비쳤다. 층수 표시등은 그대로 18에서 멈춰 있었다. 누군가 안에 있으면 다시 문이 열리거나 다른 층으로 움직여야 하는데, 몇 초가 지나도 아무 변화가 없었다.
그 순간 엘리베이터 안쪽에서 아주 가벼운 소리가 났다.
손톱인지, 금속이 긁히는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얇고 마른 소리.
문짝의 반대편을 누군가 손가락 끝으로 천천히 긁고 있는 것 같은.
해인은 돌아서 걸었다.
빠르게, 그러나 뛰지는 않고. 뛰면 오히려 등 뒤의 것들이 살아나는 기분이 들어서. 복도 카펫은 발소리를 삼켰고, 그 침묵 속에서 자기 호흡만 유난히 크게 들렸다. 1803호, 1805호, 1807호. 끝 쪽 창문으로 도시의 불빛이 엷게 보였다. 아주 멀리서는 세상이 여전히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지상으로 내려가면 택시가 달리고, 누군가는 야식을 시키고, 누군가는 연인과 통화하고, 누군가는 아직 회의실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 수많은 정상의 중심에 이렇게 길고 비어 있는 복도가 있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해인의 집은 1812호였다.
가방에서 키를 꺼내는데 금속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났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카드키를 대고, 비밀번호를 누르려다가 멈췄다.
등 뒤가 느껴졌다.
아주 가까운 것도 아니고, 분명한 발소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사람은 누군가가 자기 뒤를 보고 있으면 몸이 먼저 안다. 목덜미 아래 피부가 조용히 오그라들고, 어깨뼈 사이가 얇아진다. 해인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복도 끝 어디쯤 누군가 서 있을 것 같았고, 아무도 없어도 더 나쁠 것 같았다.
삑, 삑, 삑, 삑.
비밀번호 숫자를 하나씩 누르는 동안 손끝이 말을 듣지 않았다.
삑. 마지막 숫자를 누르고 문이 열리기까지의 짧은 전자음이 너무 느렸다. 해인은 거의 문을 밀치듯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닫고 잠금장치를 걸었다. 철컥, 철컥. 위쪽 보조잠금까지 채운 뒤에야 숨이 터져 나왔다.
집 안은 따뜻했다.
아침에 급히 나가며 정리하지 못한 소파 위 담요, 싱크대에 놓인 머그컵, 식탁 위 우편물. 너무 익숙하고 사소한 물건들이라 오히려 순간 울고 싶어졌다. 사람은 안전하다고 느껴질 때보다, 방금 위험했을지도 모른다고 깨닫는 순간 더 약해진다.
해인은 현관문에 귀를 대 보았다.
아무 소리도 없었다.
아무도 없는 게 정상인데, 정상이라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거실 불을 켰다. 노란 불빛이 방 안에 번졌다. 텔레비전을 켤까 하다가 말았다. 소리가 있으면 덜 무서울 것 같지만, 때로는 소리가 오히려 다른 소리를 가린다. 지금은 작은 기척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엄마였다.
해인은 전화를 받지 못했다.
목소리를 내는 순간 울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대신 메시지가 들어왔다.
집에 갔니?
해인은 잠시 화면을 보다가 짧게 답했다.

곧바로 다시 진동했다.
문 잘 잠그고 자
그 문장을 읽는 순간, 해인은 다시 현관 쪽을 보았다.
방금 채운 잠금장치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얼마나 얇은 믿음인지 갑자기 선명해졌다. 쇠와 나무와 나사 몇 개. 그리고 그 뒤편에 있는 어둠.
그날 밤 그녀는 샤워도 하지 못하고 옷을 입은 채 침대에 앉아 있었다.
거실 불과 주방 불을 모두 켜 둔 채, 침실 문도 닫지 않았다. 밤은 천천히 깊어졌고, 건물 전체가 조용해지는 시간이 왔다. 윗집 의자 끄는 소리, 어딘가의 물 내리는 소리, 멀리서 오토바이 지나가는 소리. 도시의 밤에는 늘 누군가의 삶이 얇게 겹쳐져 있어서 완전한 침묵은 오지 않는다. 그런데 그 작은 생활 소리들이 하나둘 사라질수록, 남는 것은 이상하게도 안심이 아니라 기다림이었다. 무엇인가 더 선명한 소리가 올 차례라는 듯한 기다림.
자정을 조금 넘겼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띵동.
해인의 몸이 굳었다.
한 번이었다.
택배 기사도, 배달원도 아닌 시간이었다.
잘못 누른 것일 수도 있다. 옆집이랑 헷갈렸을 수도 있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심장은 이미 그 설명들을 믿지 않고 있었다.
띵동.
두 번째 벨은 조금 길었다.
해인은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발바닥이 차가운 바닥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현관까지 나가서 도어뷰를 봐야 한다는 생각과, 절대 가까이 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휴대전화 화면이 켜졌다.
배달 앱 광고 알림이었다.
방금 그 사소한 진동에도 해인은 숨을 삼켰다.
띵동.
세 번째.
이제는 확실했다.
누군가 해인의 집 벨을 누르고 있었다.
실수라면 두 번에서 끝났어야 했다.
이 시간에, 이렇게 규칙적으로.
해인은 아주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맨발이 바닥에 닿자 차가운 감각이 종아리까지 올라왔다. 그녀는 가능한 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현관 쪽으로 걸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집 안의 익숙한 물건들이 전부 새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식탁 모서리, 선풍기, 벽에 걸린 액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누군가 문밖에 서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집 안 전체가 낯설어졌다.
현관 앞까지 갔을 때, 벨은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그 고요가 더 무서웠다.
해인은 도어뷰를 바로 보지 못했다.
작은 렌즈 저편에 눈이 마주칠 것 같았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도어뷰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복도 불 아래 빈 카펫과 맞은편 1811호 문, 그리고 복도 끝 벽.
정말 아무도 없었다.
해인은 한참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몸이 천천히 저려 왔다. 아무도 없다는 사실은 안심이 되기보다는, 방금까지 여기 있었던 누군가가 아주 조용히 사라졌다는 뜻처럼 느껴졌다. 복도는 숨을 쉬지 않는 긴 동물처럼 가만했다.
그때 도어뷰 아래, 문 하단 쪽에서 아주 작은 소리가 났다.
툭.
무언가가 문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소리.
해인은 숨을 멈췄다.
고개를 조금 숙였다. 문과 바닥 사이의 좁은 틈으로 복도 불빛이 얇게 들어오고 있었다. 그 틈을 가리는 그림자는 없었다. 그런데, 틈 바로 앞에 무엇인가가 놓인 것 같은 어둠이 생겨 있었다.
해인은 움직이지 못했다.
잠시 뒤, 바닥을 긁는 소리가 아주 천천히 이어졌다.
사각, 사각.
누군가 문 아래 틈으로 종이나 사진 같은 것을 밀어 넣고 있었다.
하얀 종이 모서리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조금, 더 조금.
해인은 뒤로 물러나고 싶었지만 눈을 뗄 수 없었다.
종이는 끝내 절반쯤 들어오다가 멈췄다.
밖의 발은 보이지 않았다.
그림자도 없었다.
오직 문틈과 종이.
몇 초 뒤, 종이는 다시 아주 천천히 바깥으로 끌려나갔다.
사각, 사각.
들어왔던 속도보다 더 느리게.
마치 안쪽에서 누가 집어 들기를 기다렸다가, 아무 반응이 없자 포기한 것처럼.
해인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목 안쪽이 바싹 말랐다. 소리를 지르거나 경찰에 전화해야 한다는 생각은 이상하게도 뒤늦게 왔다. 공포는 사람을 날카롭게 만들기보다 둔하게 만들 때가 있다. 뇌가 알아듣기 싫은 것을 몸이 먼저 알기 때문이다.
한참 뒤에야 그녀는 관리실 번호를 찾았다.
야간 경비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건물 대표번호는 자동응답으로 넘어갔다.
경찰에 신고할까 하다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막혔다. 초인종이 울렸고, 도어뷰를 봤는데 아무도 없었고, 종이가 들어왔다 나갔다고. 말로 옮기는 순간 다 너무 애매해졌다. 도시의 공포는 늘 그렇게 애매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분명한 위협이 아니어서 신고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잊기엔 너무 선명한 것.
결국 해인은 부엌에서 가장 큰 식칼을 꺼내 침대 옆에 두었다.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렇지 않으면 손 둘 곳이 없었다. 새벽 세 시쯤 잠깐 졸았고, 꿈속에서도 초인종이 계속 울렸다. 벨소리는 꿈 안에서 점점 짧아지고 빨라져서 나중엔 심장 박동 같은 소리가 되었다.
아침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출근 준비를 하면서 그녀는 전날 밤이 과장된 불안이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려 했다. 해가 들자 모든 것이 작아졌다. 커피포트 김, 화장대 위 로션 병, 창문에 맺힌 미세한 먼지. 밤의 공포는 늘 낮에 설명 가능한 크기로 줄어든다. 다만 설명은 되는데, 사라지지는 않는다.
문을 열기 전까지는.
해인은 잠금장치를 풀고 현관문을 아주 조심스럽게 열었다.
복도는 환했다. 출근 시간이라 엘리베이터 쪽에서 멀리 사람 말소리도 들렸다. 평범한 아침이었다. 그런데 문 앞 바닥에 작은 흰 종이 하나가 놓여 있었다. 접히지도 구겨지지도 않은, 네모반듯한 메모지.
해인은 한참 서 있다가 그것을 집게손가락과 엄지로 집어 들었다.
아무 글도 없었다.
대신 종이 한가운데에 아주 작게, 연필로 그린 듯한 직사각형이 있었다.
직사각형 안에 점 하나.
그림이라기엔 너무 단순했고, 의미를 읽기엔 지나치게 조용한 표식.
해인은 종이를 뒤집어 보았다. 뒤에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날 회사에서 그녀는 거의 일을 하지 못했다.
메일을 읽다가도 자꾸 그 종이를 떠올렸다. 사각형 안의 점.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표시.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오래 붙들게 된다. 차라리 욕설이나 협박이면 분명해서 덜 무서울지도 모른다. 의미를 모를 때 공포는 스스로 자란다.
점심시간에 동료 민지가 물었다.
“너 오늘 얼굴 왜 그래. 잠 못 잤어?”
해인은 대충 웃었다.
말하면 별것 아닌 일처럼 들릴 것 같았다.
아니면 민지가 웃어넘기지 않더라도, 그 일을 한 번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부터 자기 일상 전체가 그 사건의 그림자 안으로 들어갈 것 같았다.
“그냥, 어제 좀 늦게 잤어.”
민지는 더 묻지 않았다.
회사라는 공간은 늘 그렇다. 사람들은 서로의 피곤에 익숙하고, 피곤 뒤에 어떤 밤이 있었는지까지 묻지 않는다. 그 무심함이 편할 때도 있고, 잔인할 때도 있다.
퇴근 무렵, 해인은 사무실 건물 1층 카페에서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
해가 완전히 지고 난 뒤에 집으로 가기 싫었다. 커피는 이미 식었고, 창밖으로는 직장인들이 떼지어 흘러갔다. 모두가 어딘가로 가고 있는데, 그들 중 누구도 자기 집 문 앞에서 누가 벨을 눌렀는지 모를 것이다. 그런 생각이 문득 이상했다. 도시에서는 수만 개의 문 앞에서 각기 다른 일들이 일어나고, 그 모든 공포는 대개 문 하나의 안쪽에만 갇힌다. 세상은 그대로 돌아가고, 그 문 안 사람만 조금씩 변한다.
결국 집에 돌아왔을 때는 밤 아홉 시가 넘었다.
로비의 CCTV 모니터를 해인은 일부러 보지 않으려 했지만, 시선은 저절로 그쪽으로 갔다.
18층 복도 화면은 비어 있었다.
그녀는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택할까 고민했다가 그만두었다. 계단은 더 싫었다. 문 하나 없이 층과 층이 이어진 콘크리트 통로, 센서등이 늦게 켜지는 어둠, 아래위로 뚫린 공간. 어떤 공포는 차라리 엘리베이터처럼 문이 닫히는 상자가 낫다.
엘리베이터는 금방 왔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18층까지 올라가는 동안 해인은 거울을 보지 않았다.
층수 표시만 보았다. 7, 8, 9. 손에는 어제 발견한 메모지가 접힌 채 들어 있었다. 괜히 가져나온 것이었다. 버려도 될 텐데, 버리면 더 이상한 방식으로 다시 나타날 것 같았다.
18층 문이 열리자 복도 끝에 사람이 서 있었다.
해인은 순간 숨을 멈췄다.
복도 맨 끝, 비상계단 문 앞.
누군가 벽을 향해 서 있었다. 검은 옷차림. 움직임이 없어서 처음엔 마네킹처럼 보였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알 수 없었다. 어깨선만 둥글게 보였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 사람은 복도를 등지고, 계단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아니면 이미 문 안쪽의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처럼.
해인은 내릴지 말지 망설였다.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 했다. 자동으로.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내렸다. 문이 등 뒤에서 닫히고, 금속 상자가 떠나가는 소리가 멀어졌다. 이제 복도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해인은 발소리를 죽이며 걸었다.
그 사람이 돌아보지 않기를 바라면서.
1812호까지 가려면 그 앞을 지나갈 필요는 없었지만, 복도 구조상 어느 정도는 시야 안에 둘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몇 걸음 옮길 때까지도 그 사람은 미동이 없었다. 사람이 그렇게 오래 한 자세로 서 있으면, 살아 있는 쪽보다 세워진 물건 쪽에 가까워 보인다.
해인이 1810호쯤 지나갔을 때, 그 사람이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없었다, 라고 해인은 나중에 기억했다.
실제로는 검은 마스크와 검은 모자 때문에 윤곽이 지워져 있었을 뿐인데, 그 순간에는 정말 얼굴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피부 대신 그림자가 있고, 눈 대신 어둠이 있는 것처럼. 그 사람은 해인을 보지 않았다. 정확히는, 보고 있는 방향을 알 수 없었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의 검은 부분이 너무 고요해서, 시선이라는 것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사람은 아주 천천히 한 손을 들었다.
장갑 낀 손.
손가락 끝이 비상계단 문을 가리켰다.
아무 말도 없이.
해인은 그 자리에서 굳었다.
비상계단 문은 닫혀 있었다. 문 아래 틈은 까맣고, 손잡이는 스테인리스 빛을 받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말없이 문을 가리키는 순간, 닫힌 문은 그 자체로 다른 종류의 의미를 갖게 된다. 열리면 안 되는 것, 혹은 이미 열렸어야 하는 것.
해인은 뒤로 한 발 물러섰다.
그 사람은 다시 손을 내렸다.
천천히, 너무 천천히.
그리고 고개를 원래대로 돌렸다.
다시 벽과 문 쪽을 향해.
그 순간 1811호 문이 열렸다.
중년 여자가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들고 나왔다. 복도에 사람 셋이 된 순간, 모든 장면이 이상할 만큼 평범해졌다. 여자는 해인을 보고 고개를 살짝 숙였고, 복도 끝 사람을 한 번 흘긋 보더니 아무 말 없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그 사람도, 해인도, 아무 말이 없었다. 서로가 서로의 이상함을 확인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얼굴들이었다.
해인은 거의 떨리는 손으로 집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날 밤에는 초인종이 울리지 않았다.
대신 새벽 두 시 십삼 분에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발신번호 표시 제한.
해인은 받지 않았다.
진동이 멎고, 다시 울렸다.
세 번. 네 번.
마지막 통화가 끝난 뒤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문 안 열어줘도 괜찮아요
해인은 문자를 오래 읽었다.
‘괜찮아요’라는 말이 그렇게 차가울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협박도 아니고, 욕도 아니고, 다정한 문장처럼 보이는데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전혀 다른 것.
곧이어 또 하나.
오늘은 계단 쪽 냄새가 심했죠
해인은 휴대전화를 떨어뜨릴 뻔했다.
비상계단 문 앞에 서 있던 사람.
말없이 문을 가리키던 장갑 낀 손.
계단 쪽 냄새.
오늘 그녀는 계단 문을 열어보지 않았다.
냄새를 맡은 적도 없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걸 알고 있었다. 아니, 알고 있는 척하고 있었다. 그 척함조차 충분히 무서웠다. 모른다는 사실이 오히려 안심이 안 됐다. 확인되지 않는 관찰이 가장 끈질기게 사람을 망가뜨린다.
해인은 경찰에 신고했다.
순찰차가 왔고, 경찰 두 명이 집 안과 복도를 확인했다.
문자도 보여주었다.
경찰은 번호 추적이 쉽지 않을 수 있다고 했고, CCTV를 확인해보겠다고 했다. 목소리는 친절했지만 피로가 묻어 있었다. 그들도 이런 신고를 자주 받는 얼굴이었다. 확실한 침입도 폭행도 없는, 그러나 분명히 사람 하나를 무너뜨릴 수 있는 종류의 신고.
한 경찰이 비상계단 문을 열어 보았다.
문이 열리자 콘크리트 냄새와 먼지 냄새, 그리고 조금 오래된 물비린내 같은 것이 올라왔다. 계단 아래쪽 어딘가에서 형광등이 웅웅거렸다. 손잡이 옆 벽에는 검은 얼룩이 얇게 문질러져 있었다. 먼지 묻은 장갑이 스친 자국처럼. 경찰은 아래층까지 내려가 보았지만 특별한 것은 찾지 못했다. 다만 17층과 18층 사이 계단참에 작은 흰 종이들이 몇 장 떨어져 있었다. 빈 메모지였다.
아무 말 없는 종이들.
경찰이 돌아간 뒤에도 집 안은 조금도 안전해지지 않았다.
누군가가 밖에 있고, 경찰이 왔다 갔고, CCTV를 확인할 거라는 사실은 오히려 그 바깥의 존재를 더 현실로 만들었다. 전에는 불안일 수도 있었는데, 이제는 기록과 절차가 붙었다. 불안은 그렇게 사건이 된다.
다음 날 관리사무소에서 연락이 왔다.
CCTV를 확인했는데, 이상한 점이 있다고.
해인은 점심시간에 급히 건물로 돌아갔다.
관리소 직원은 모니터를 돌려 보여주었다. 18층 복도 화면이었다. 시간은 어젯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 끝 사람을 본 시각 전후.
영상 속에서 해인은 분명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리고 놀란 듯 멈춰 섰다.
하지만 복도 끝에는 아무도 없었다.
직원은 몇 번이나 영상을 되감았다.
비상계단 문 앞은 비어 있었다.
해인 혼자 멈춰 서서, 아무도 없는 곳을 보는 장면만 계속 반복되었다.
“혹시 그림자 같은 거 잘못 보신 거 아닐까요.”
직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의 말투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 순간 해인은 자기 몸이 아주 얇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어젯밤 분명 있었던 검은 옷, 장갑 낀 손, 문을 가리키던 동작이 화면 속에서는 몽땅 지워져 있었다. 공포는 때로 너무 뚜렷해서 오히려 증명되지 않는다. 카메라는 언제나 필요한 장면만 놓친다는 듯이.
해인은 그날 반차를 내고 집을 비우기로 했다.
친구 집으로 갈까, 호텔에 묵을까 고민하다가 결국 짐을 챙기러 집에 잠깐 들렀다. 낮 두 시의 복도는 밤과 전혀 달랐다. 창문 끝으로 부서진 햇빛이 들어와 바닥에 네모를 만들고, 멀리 청소기 소리가 났다. 그러나 낮의 밝음은 사물을 드러내는 대신, 밤의 기억을 더 선명하게 윤곽 잡아 주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 캐리어를 꺼내는데, 침실 문틈 아래에 뭔가 끼어 있는 것이 보였다.
하얀 종이였다.
해인은 피가 식는 기분으로 다가갔다.
그 종이는 침실 안쪽에서 바깥으로 밀린 모양이었다. 문 아래 틈을 통해. 하지만 침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창문도 닫혀 있었다. 에어컨 바람으로 움직였다고 보기엔 너무 똑바로 끼어 있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종이를 잡아당겼다.
이번에는 글자가 있었다.
집 안이 제일 조용하네요
해인은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머릿속이 이상할 만큼 맑아졌다. 사람이 정말로 위험해질 때, 오히려 공포는 폭발하지 않고 차갑게 가라앉는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 하나만 남는다.
그녀는 캐리어도 포기하고 현관으로 뛰었다.
잠금장치를 푸는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겨우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을 때, 비상계단 문이 열려 있었다.
조금.
새카만 틈 하나.
낮인데도 그 틈 안은 어두웠다.
형광등이 나갔는지, 아래층 센서가 꺼져 있는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문은 바람도 없는데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삐걱, 아주 작게. 마치 누군가 방금 안으로 들어가고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은 것처럼.
해인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미친 듯이 눌렀다.
위층에 있던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동안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비상계단 틈은 그대로였다.
그 안에서 누군가 보고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이미 오래전부터 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그녀는 안으로 뛰어들었다.
문 닫힘 버튼을 연달아 눌렀다.
문이 서서히 닫히는 그 순간, 비상계단 문틈이 조금 더 벌어졌다.
검은 장갑 낀 손이 문 가장자리를 잡고 있었다.
문이 닫혔다.
엘리베이터는 내려갔다.
해인은 무너져 내리듯 주저앉았다.
1층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건물을 뛰쳐나와 큰길로 나왔다. 낮의 차 소음과 사람들, 햇빛과 카페 음악이 한꺼번에 덮쳐 왔다. 세상은 너무 환하고 평범했다. 방금 전까지의 일은 거짓말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손바닥에는 아직 식은땀이 마르지 않았고, 휴대전화 화면에는 발신번호 제한 통화 기록이 검게 남아 있었다.
그날 이후 해인은 그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사는 급하게 진행되었다.
짐은 친구 둘과 이삿짐 기사들을 불러 낮에만 빼냈다.
관리사무소와 경찰은 특별한 단서를 찾지 못했다.
CCTV에는 늘 아무도 없거나, 너무 흐리거나, 해인 혼자만 찍혔다.
문자 발신은 추적이 어렵다고 했다.
집 안에서 발견된 종이에 대한 지문도 마땅한 것이 나오지 않았다.
도시의 많은 일들이 그렇듯, 사건은 있었는데 범인은 형태를 얻지 못했다.
새 집은 강 건너편, 더 크고 더 밝은 아파트였다.
출입이 엄격했고, 로비에는 경비원이 늘 앉아 있었고, 엘리베이터도 카드키가 있어야만 층을 누를 수 있었다. 친구들은 이제 괜찮을 거라고 했다. 해인도 그러고 싶었다. 새 집 현관문을 닫을 때마다 예전보다 두 번 더 잠금장치를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지만,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간다. 익숙해지는 것은 회복과 다르지만, 바깥에서 보면 비슷하게 보인다.
한 달쯤 지났을 때였다.
늦은 저녁,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해인은 우편함에서 고지서들과 광고 전단을 꺼냈다.
그 사이에 아무 주소도, 우표도 없는 흰 봉투 하나가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해인은 그 봉투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봉하지 않은 봉투였다. 안에는 작은 메모 한 장.
사각형 안에 점 하나.
그 아래, 이번엔 글씨가 있었다.
높은 데로 이사 오면 더 잘 보여요
엘리베이터 거울 속에서 해인의 얼굴이 아주 천천히 창백해졌다.
층수 표시등이 올라가고 있었다. 11, 12, 13.
상자 같은 빛 속에 그녀 혼자 서 있었다.
그런데 거울 맨 뒤쪽 구석에, 닫힌 문틈 가까이에, 검은 장갑 같은 것이 잠깐 비친 것 같았다.
해인은 뒤돌아보지 못했다.
14, 15.
엘리베이터 안은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금속 벽 너머 어디선가 누군가 손톱으로 천천히 긁는 것 같은 얇은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사각, 사각.
문이 열리기 전까지 그녀는 숨을 쉬지 못했다.
그리고 도시의 밤은 언제나처럼 아무 일도 없다는 얼굴로,
수천 개의 불을 켠 채 아래에서 조용히 반짝이고 있었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