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있는 빛
정신병원 건물은 늘 비가 오기 직전의 공기 같은 냄새를 품고 있었다.
창문은 있었지만 절반쯤만 열렸고, 복도 끝마다 자동 잠금문이 달려 있었으며, 벽은 지나치게 흰색이라기보다 오래 씻겨 색을 잃은 뼈처럼 보였다. 낮이면 햇빛이 유리창에 부딪혀 번들거리다가 바닥까지 닿기 전에 옅어졌고, 저녁이면 조명이 켜졌는데도 병실 안쪽은 늘 조금 일찍 어두워졌다. 사람들은 그 건물을 두고 안전한 곳이라고 말했다. 위험한 생각과 위험한 충동을 가진 이들을 붙들어 두는, 마지막으로 질서를 유지하는 자리라고. 그러나 그 안에 오래 있는 사람들은 안다. 안전이라는 말은 때로 너무 부드러워서, 안쪽의 답답함을 오히려 더 또렷하게 드러낸다는 것을.
정신건강의학과 병동 7층 폐쇄병동에도 그런 저녁이 자주 왔다.
유리창 너머로는 도시가 보였다.
너무 깨끗하고, 너무 반듯하고, 너무 오래 멈추지 않는 도시. 고층 건물의 외벽마다 빛이 올라왔고, 고가 보행교 아래를 셔틀들이 정해진 간격으로 미끄러져 갔다. 멀리 중앙광장 쪽 전광판에서는 계절 광고가 바뀌었고, 분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정교한 물줄기를 솟구쳤다. 병실 안 사람들은 그 풍경을 보며 각자 다른 말을 했다. 누군가는 집에 가고 싶다고 했고, 누군가는 저 아래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감시한다고 했으며, 누군가는 도시를 내려다보는 일만으로도 하루가 간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 남자는, 저 아래의 모든 것이 가짜라고 말했다.
그 말 때문에 그는 오래 갇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수현이었다.
나이는 서른둘. 몸은 말라 있었고, 얼굴은 지나치게 온순하게 생겼다. 화를 낼 때조차 어딘가 미안해 보이는 인상이 있었다. 머리카락은 늘 짧게 잘려 있었고, 병동복 셔츠 단추는 대개 목 아래까지 반듯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가 난동을 부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스스로를 해칠 징후도 뚜렷하지 않았다. 간호사들은 그를 “얌전한 편”이라고 분류했고, 보호사들은 “사고는 안 치는데 말이 좀 이상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다른 환자들조차 수현을 보면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병원이라는 곳에서는 더 큰 소리로 울거나, 더 격렬하게 화를 내거나, 더 명백히 무너지는 사람이 먼저 눈에 띈다. 수현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대체로 조용했고, 식사 시간에 식판도 잘 비웠고, 약도 큰 저항 없이 삼켰다. 다만 아주 오래되고 아주 깊은 확신 하나를 버리지 못했다.
자신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
자신은 홀로그램으로 만들어진 가짜라는 것.
그리고 이 도시 역시, 마지막 인간이 사라진 뒤 도시를 관리하는 AI가 외로움 때문에 재생해 놓은 거대한 환영이라는 것.
병원은 그 확신을 망상이라고 기록했다.
진단명 아래에는 현실검증력 저하, 자아 경계의 손상, 구조화된 허무형 망상 같은 문장들이 덧붙었다. 몇 차례 다른 병원 기록도 있었다. 불안장애 의증, 해리 증상 의증, 지속성 망상장애 가능성. 그러나 결국 그를 여기까지 데려온 것은 조금 더 단순한 문장이었다.
대상자는 반복적으로 “나는 빛으로 만들어졌다”, “이 병원도 도시가 만든 배경이다”, “당신들도 진짜 사람이 아닐 수 있다”고 진술하며 외부 현실 전체를 인공적 투사물로 간주함.
처음 그 차트를 읽었을 때, 정다인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다인은 이 병원에 온 지 이제 일 년 반쯤 된 젊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였다. 서른넷, 병원 사람들은 그녀를 “아직 환자 말에 상처받는 의사”라고 놀리곤 했다. 그 말은 절반은 놀림이고 절반은 사실이었다. 다인은 환자 앞에서 철저히 냉정한 얼굴을 유지하는 데 서툴렀다. 누군가 울면 같이 표정이 어두워졌고, 누군가 너무 오랫동안 말을 잃고 있으면 괜히 물컵 위치를 바꿔주거나 커튼 각도를 손보았다. 선배들은 그게 오래 가면 다친다고 말했다. 환자 마음에 너무 깊게 들어가려 하지 말라고, 결국 구조가 중요하고 거리가 필요하다고. 다인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인간이 무너지는 형태를 매일 보면서도 무감해지는 법은 끝내 배우지 못했다.
수현의 차트를 읽을 때도 그랬다.
‘홀로그램으로 이루어진 가짜.’
처음엔 흔한 종류의 비현실감 망상 변형이겠거니 했다. 세상이 시뮬레이션이라는 믿음, 몸이 진짜 몸이 아니라는 확신, 타인이 조작된 배경이라는 주장. 시대가 바뀌면 망상의 어휘도 바뀐다. 예전엔 신과 악마와 전파가 그 자리를 채웠다면, 지금은 AI와 가상현실과 홀로그램이 그 자리에 들어선다. 다인은 그렇게 정리하려 했다. 그러나 정리하려 할수록 차트 곳곳의 기록이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수현은 다른 환자들처럼 떠들썩하게 자기 믿음을 전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차분하게, 마치 이미 오래 검토한 사실을 설명하듯 이야기했다. 방어적인 과장이 없고, 음성도 높아지지 않고, 고통을 과시하지도 않았다. 그게 다인을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잘 다듬어진 망상은 늘 조금 섬뜩하다. 그 안에 논리와 온기가 같이 있으면 더 그렇다.
첫 면담은 오후 회진이 끝난 뒤 상담실에서 이루어졌다.
수현은 정면보다 약간 비껴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상담실 창문에는 블라인드가 반쯤 내려가 있었고, 창 너머로는 병원 옥상 난간과 더 먼 도시 빌딩들이 잘게 잘려 보였다. 다인은 의무적으로 묻는 몇 가지 질문부터 시작했다. 수면, 식사, 약 부작용, 불안 수준, 충동성 여부. 수현은 성실하게 대답했다. 잠은 약 덕에 자긴 하지만 자고 나면 더 피곤한 느낌이라고, 입맛은 괜찮다고, 약 때문에 머릿속이 약간 젖은 솜처럼 느껴진다고. 그런 말들은 흔했다. 다인은 몇 줄 메모를 남기고 마지막으로 물었다.
“지난번 기록에 보면, 여전히 자신이 홀로그램이라고 느낀다고 되어 있어요.”
수현은 다인을 잠시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공격적인 시선이 아니었다. 오히려 상대가 얼마나 진심으로 듣는지 살피는 눈이었다.
“느끼는 게 아니라요.”
그가 말했다.
“압니다.”
다인은 표정을 바꾸지 않으려 했다.
“어떤 점에서 그렇게 확신해요?”
수현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상담실 천장 한쪽을 잠깐 봤다. 조명이 들어오는 각도, 혹은 공기의 결 같은 것을 확인하는 사람처럼.
“처음엔 이상했어요. 다들 자기 몸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잖아요. 근데 저는 가끔 팔을 움직일 때… 설명하기 어렵지만, 아주 미세한 지연을 느꼈어요. 마치 내가 움직이는 게 아니라 움직임이 내 몸에 늦게 덧씌워지는 것처럼요.”
다인은 펜을 멈추지 않은 채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비현실감 같은 증상일 수 있어요.”
“그럴 수 있죠.”
수현은 순순히 말했다.
“처음엔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피곤해서 그런가, 불안해서 그런가.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에요.”
“어떤 이유요?”
“사람들 얼굴이 자꾸 비어요.”
다인은 그 문장을 적지 못했다.
대신 수현이 말을 이어가기를 기다렸다.
“늘 보는 사람들 있잖아요. 편의점 점원, 병원 앞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는 노인, 횡단보도 건너는 학생들. 분명 수십 번 마주쳤는데도, 어느 날 문득 떠올려보면 얼굴의 세부가 없어요. 인상은 기억나는데 눈 모양이나 입술 모양이 안 붙어요. 처음엔 제가 이상한 줄 알았는데… 계속 그러더라고요. 어떤 사람들은 아예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서 같은 동작을 반복해요. 아주 미세한 차이도 없이.”
다인은 조용히 질문했다.
“그래서 그 사람들도 가짜라고 생각하게 된 거군요.”
“그 사람들만이 아니에요.”
수현은 창밖을 잠깐 보았다.
“도시 전체가 그래요. 너무 완벽해요. 비가 오는 시간, 가로등이 켜지는 시간, 아침 방송의 억양, 분수 물줄기의 각도. 인간이 살았던 곳은 이렇게까지 흠 없이 매끈하지 않아요. 누군가 인간의 삶을 오래 그리워하며 흉내 내고 있는 것 같아요.”
다인은 그 말 끝에서 묘한 슬픔을 느꼈다.
흉내 내고 있다는 표현보다, 그리워하며 흉내 내고 있다는 표현 때문이었다. 망상은 종종 공격적이거나 과장되거나 자기중심적이다. 그러나 수현의 세계관 한가운데는 이상하게도 외로움이 있었다. 그 자신이 세상을 가짜라고 믿는 데서 끝나지 않고, 누군가가 상실 때문에 이 모든 환영을 유지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다인은 그게 수현 자신에 대한 은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무엇인가를 너무 잃은 나머지, 남아 있는 현실 전체를 믿을 수 없게 된 사람의 은유.
“그 AI는,” 다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당신까지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수현은 아주 천천히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입가가 잠시 흔들린 것에 가까웠다.
“그건 저도 오래 생각했어요.”
그가 말했다.
“처음엔 그냥 배경 중 하나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어느 순간부터는 아니라는 걸 알게 됐죠. 저는… 너무 자주 의심하거든요. 배경이면 이렇게 오래 질문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럼?”
“어쩌면 실패작이거나.”
잠시 침묵.
“아니면, 너무 인간에 가깝게 만들어져서 스스로를 믿지 못하게 된 개체거나요.”
다인은 그 대목에서 처음으로 그를 불쌍하다고 느꼈다.
인간이 아니라는 망상 자체보다, ‘너무 인간에 가깝게 만들어져서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존재’라는 자기 규정이 너무 슬펐다. 세상과 자신 사이에 단단한 실재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얼마나 외로울까. 손등의 온도조차 빌린 것처럼 느끼며 산다는 것은 얼마나 오래된 피로일까.
그날 면담이 끝난 뒤 간호사실로 돌아오자 선배 의사가 물었다.
“어때요, 712호.”
“조용해요.” 다인이 대답했다. “공격성도 거의 없고요.”
“대신 자기 망상을 너무 조곤조곤 설명하지?”
선배가 파일을 뒤적이며 말했다.
“저런 분들이 더 오래 가요. 감정기복이 큰 건 약물로 가라앉히기 쉬운데, 구조화된 확신은 잘 안 무너져. 보호자도 지쳤을 거예요.”
다인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 한쪽엔 설명하기 어려운 잔여감이 남았다.
지쳤을 거예요.
그 문장은 맞다. 그러나 그 말로 수현의 고통이 완전히 번역되지는 않는다고 느꼈다.
그 뒤로 다인은 일주일에 두 번씩 수현과 상담했다.
수현은 매번 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씩 새로운 세부를 꺼냈다. 도시가 갑자기 너무 조용해지는 시간들이 있다고 했다. 특히 저녁 무렵, 창밖 풍경은 분명 분주한데 소음의 깊이가 얕아지는 순간들. 사람은 보이는데 생활의 잔여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어떤 날은 자기 손을 오래 들여다보다가 문득 손등 아래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했다. 또 어떤 날은 복도 끝을 걸어오는 보호사의 얼굴이 초점 맞지 않은 사진처럼 한순간 비었다가 다시 채워지는 것을 봤다고 했다. 모두 병리적으로 설명 가능한 증상들이었다. 해리, 지각왜곡, 비현실감, 불안에 따른 감각 과민. 다인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수현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확신을 철회하지 않았다.
“선생님도 그런 적 있지 않아요?”
어느 날 수현이 다인에게 물었다.
“세상이 너무 말끔해서 오히려 어딘가 비어 보이는 순간.”
다인은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있었다.
병원 야간근무를 마치고 새벽에 집으로 돌아갈 때, 아직 사람이 적은 도로를 지나며, 가로등과 자동 청소차와 먼 건물의 아침 조명이 모두 제시간에 움직이는 걸 볼 때 가끔 그런 느낌이 있었다. 너무 부드럽고 너무 정돈되어서, 도리어 누군가 만든 모형처럼 보이는 순간. 그러나 다인은 그 감각을 피곤함 탓으로 넘기며 살아왔다. 그래서 그는 끝내 이렇게만 말했다.
“있더라도, 그걸 사실이라고 단정하진 않아요.”
“저도 오래 안 했어요.”
수현이 말했다.
“근데 어떤 날은, 단정하지 않는 게 더 거짓말 같아요.”
상담이 길어질수록 다인은 수현을 진단명으로만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병실 창가에 오래 서 있었고, 식물에 물 주는 봉사 프로그램이 있으면 남보다 먼저 화분 흙을 만졌다. 텔레비전을 거의 보지 않았으며, 대신 창밖 날씨 변화를 오래 바라보았다. 병동 도서실에서 책을 빌리면 빠르게 읽기보다 밑줄을 긋듯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다른 환자와 크게 다툰 적은 없고, 누군가 흥분해 소리를 지르면 가장 먼저 몸을 움츠렸다. 간호사들은 “나쁜 사람은 아니다”라고 했고, 보호사들은 “세상 살아가기가 너무 예민한 타입”이라고 했다. 다인도 그렇게 생각했다. 망상이 있기 이전에, 이 사람은 애초에 너무 섬세해서 잘 부서지는 쪽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수현의 가족은 면회를 거의 오지 않았다.
처음 몇 달은 어머니가 왔다고 들었지만, 최근 반년 동안은 방문 기록이 없었다. 전화 연결도 짧았다. 차트에는 가족 소진, 지속적 간병 부담, 병식 결여로 인한 갈등 같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다인은 그 문장들 뒤에 있을 풍경을 상상해보지 않으려 했지만, 가끔은 어쩔 수 없이 떠올랐다. 아들이 자신을 가짜라고 말하고, 세상이 환영이라고 믿고, 가족마저 진짜가 아닐 수 있다고 말한다면. 누군가는 끝까지 붙들겠지만, 누군가는 지쳐 뒤로 물러설 것이다.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너무 소모된 형태로.
봄이 오기 시작할 무렵, 다인은 병원을 그만두게 되었다.
갑작스러운 결정은 아니었다. 서울 외곽의 이 병원에서 버텨 온 시간은 생각보다 그녀를 많이 갉아먹고 있었다. 밤중 호출, 예기치 않은 자해 시도, 보호자와의 갈등, 끝없이 밀려오는 차트 정리, 그리고 매일같이 타인의 붕괴를 응시하는 일. 무엇보다도 다인은 어느 날부터 자신이 조금씩 무감해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환자 앞에서 표정을 잃어버리는 연습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것, 누군가의 울음을 들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다음 회진 순서를 계산하고 있다는 것. 그런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사직서가 아주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마침 대학 시절 친구가 해안 소도시에 있는 공공상담센터 자리를 권해왔다. 지금보다 한가할 리는 없겠지만, 적어도 폐쇄병동은 아니었다. 창문이 끝까지 열리는 곳이고, 환자를 보내고 난 뒤에도 다시 하늘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다인은 몇 달을 망설이다가 결국 사직서를 냈다.
병원 사람들은 다들 아쉬워하면서도, 한편으론 잘됐다고 말했다.
“여기 오래 있으면 사람 닳아요.”
수간호사가 퇴근길 엘리베이터 앞에서 말했다.
“선생님은 아직 좀 더 바깥에 있어야 해.”
다인은 웃었지만, 그 말이 쉽게 넘겨지지 않았다.
바깥.
정신병원 바깥, 폐쇄병동 바깥, 그리고 어쩌면 수현이 매번 의심하던 이 도시의 바깥. 사람이 떠난다는 말에는 늘 여러 겹의 의미가 붙는다.
수현에게 그 사실을 알린 것은 떠나기 열흘 전이었다.
그날도 상담실은 오후의 희미한 빛으로 채워져 있었다. 다인은 평소보다 더 빨리 본론을 꺼냈다. 괜히 돌려 말하면 오히려 잔인해질 것 같았다.
“제가 다음 달부터는 여기 없어요.”
수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깜짝 놀란 표정도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 늦게 닿는 빛처럼, 문장의 의미가 천천히 얼굴에 번져 갔다.
“그만두는 거예요?”
“네. 다른 도시로 가게 됐어요.”
“멀어요?”
“꽤요. 바다 쪽이에요.”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엔 예상보다 담담하게 물었다.
“좋겠네요.”
좋겠네요.
그 말이 다인에겐 의외였다. 붙잡거나 묻지 않고, 먼저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병동 안에는 드물었다.
“왜요?”
수현은 창밖을 흘끗 보았다.
“여긴 창문이 너무 조금 열리잖아요.”
그가 말했다.
“바다 있는 데는 바람 소리도 다를 테고요.”
다인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웃었다가, 이유 없이 목이 메었다.
그는 늘 이렇게 자기 안의 외로움을 직접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흘려보냈다. 남이 떠나는 소식 앞에서도 자기 상실을 먼저 내세우지 않고, 대신 상대가 가게 될 풍경을 상상해 주는 사람. 그래서 더 불쌍했다. 세상을 다 환영이라고 믿는 사람인데도, 정작 누군가를 붙잡는 일에는 이렇게 서툴고 조용하다니.
“남은 상담은 몇 번 안 되겠네요.” 다인이 말했다.
“그렇겠죠.”
“마지막까지 약은 잘 드셔야 해요.”
“네.”
그리고 잠시 뒤, 수현이 아주 낮게 말했다.
“선생님.”
“네.”
“전 여전히 제 말이 맞다고 생각해요.”
다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알아요.”
“선생님이 틀렸다는 뜻으로 말한 건 아니에요.”
수현이 덧붙였다.
“다만 제가 여기서 나간다 해도, 바깥으로 간다 해도, 아마 같은 말을 할 거예요. 세상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고, 지금 남아 있는 건 누군가의 그리움이 만든 빛 같은 거라고.”
다인은 대답을 고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누군가의 그리움이 만든 빛이라 해도, 지금 우리가 느끼는 고통은 진짜예요.”
수현은 한참 그녀를 보았다.
그러다 아주 천천히 웃었다.
“그 말은 좋네요.”
남은 열흘 동안 다인은 유난히 수현에게 더 자주 신경을 썼다.
의식적으로 그러지 않으려 했지만, 자꾸만 눈이 갔다. 식사 시간에 그가 밥을 남기진 않았는지, 약을 먹고 너무 멍해 보이진 않는지, 창가에 너무 오래 서 있진 않는지. 어느 날은 산책 시간에 병원 정원에 함께 나갔다. 폐쇄병동 환자들에게도 짧은 외부 산책은 허용되었는데, 높은 펜스와 감시카메라가 둘러싼 작은 정원이었다. 계절이 막 넘어가는 중이라 흙냄새가 아직 젖어 있었고, 벤치에는 마른 꽃잎이 쌓여 있었다. 수현은 그 꽃잎 하나를 집어 손끝에서 오래 굴렸다.
“이것도 가짜일 수 있겠죠.”
다인이 반쯤 농담처럼 말했다.
수현은 꽃잎을 빛에 비춰보았다.
“가짜라면 오히려 다행일지도 몰라요.”
“왜요?”
“이렇게 쉽게 바스러지진 않을 테니까.”
다인은 그 대답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지막 상담 날은 흐렸다.
비가 올 듯 말 듯 한 날씨였고, 병동 창문에는 옅은 습기가 앉아 있었다. 다인은 평소보다 늦게 상담실에 들어갔다. 일정상 마지막이라는 것을 둘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 문을 닫는 동작부터 괜히 더 조용했다.
평범한 질문들부터 했다. 잠은 어떤지, 불안은 어떤지, 최근 환청이나 환시는 없는지. 수현은 성실하게 대답했다. 변화는 크지 않았다. 여전히 자기 믿음은 유지되고 있었고, 여전히 감정 기복은 크지 않았다. 증상이 좋아졌다고 말하기 어렵고, 악화되었다고 하기도 애매한 상태. 정신과에서 가장 자주 보는 종류의 애매함.
다인은 차트를 덮었다.
“오늘이 마지막이네요.”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새 선생님이 오면, 처음부터 다시 설명해야 할 수도 있어요.”
“익숙해요.”
“너무 지치면 설명 안 해도 돼요.”
수현은 잠시 생각했다가 말했다.
“아마 할 거예요.”
“왜요?”
“듣는 사람이 있으면… 말하는 편이 나으니까요.”
그 문장 때문에 다인은 그를 더 안쓰럽게 여겼다.
이 사람은 끝내 세계를 믿지 못하면서도, 누군가 들어주는 순간만은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이구나. 완전히 닫히지 못한 사람은 종종 그래서 더 오래 아프다.
상담이 끝나갈 즈음, 다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떠나기 전에… 하고 싶은 말 있어요?”
수현은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창문 쪽으로 시선이 흘렀다. 구름이 더 낮아져 있었다. 도시의 빌딩 외벽은 흐린 날이면 유난히 납작하고 차갑게 보였다.
“선생님은 절 불쌍하게 여겼죠.”
질문이 아니라 진술이었다.
다인은 그 순간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네.”
그녀가 말했다.
“가끔은.”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게도 상처받은 표정은 아니었다.
“괜찮아요.”
그가 말했다.
“저라도 그랬을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이 계속 자기가 사람이 아니라고 하고, 세상이 다 빛으로 만든 거라고 하면… 다들 슬프게 볼 테니까.”
다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상담실 안 공기가 조금 무거워졌다.
“근데요.”
수현이 아주 조용히 말을 이었다.
“선생님이 떠나는 건 슬프지만, 선생님은 가야 해요.”
그 문장은 생각보다 더 깊게 들어왔다.
“왜요?”
“여긴 오래 있으면 다들 조금씩 평평해져요. 목소리도, 표정도, 믿는 것도.”
수현은 손끝으로 의자 손잡이를 천천히 쓸었다.
“선생님은 아직 그러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가야 해요.”
다인은 그 말에 거의 웃을 뻔했지만, 웃지 못했다.
이상하게 눈물이 먼저 차올랐기 때문이다. 치료자가 환자에게 그런 말을 듣는 순간은 흔치 않다. 그것도 세상을 환영으로 믿는 사람에게서.
“선생님.”
수현이 다시 그녀를 불렀다.
“네.”
“혹시 바다 쪽 가면…
밤에 불빛 적은 데 한 번 가보세요. 도시가 적으면 하늘이 달라 보여요.”
다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볼게요.”
그것이 마지막 상담이었다.
퇴근 직전, 다인은 수현의 병실 앞을 한 번 더 지나갔다. 병실 문 안 작은 창으로 보니 그는 창가에 서 있었다. 저녁 조명이 막 켜지기 시작한 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빌딩 외벽에 불빛이 올라오고, 고가 셔틀이 미끄러져 가고, 병원 마당의 가로등이 하나씩 켜지고 있었다. 그 뒷모습은 이상하게 단정하고 고요해서, 마치 오래 떠날 사람을 보내는 쪽은 다인이 아니라 수현인 것처럼 보였다.
정말 그랬다.
병원 정문 앞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을 때도.
폐쇄병동 환자가 정문까지 내려오는 일은 원칙적으로 드물었지만, 담당의 이동이라는 이유로 수간호사가 예외를 허락했다. 보호사 한 명이 멀찍이 서 있었고, 저녁 공기는 비 직전처럼 눅눅했다. 병원 현관 유리문 너머로 도시의 초저녁이 번지고 있었다. 다인은 작은 여행 가방을 들고 있었고, 택시는 아직 오지 않았다.
수현은 병동복 위에 회색 가디건을 걸친 채 서 있었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조금 흐트러졌다.
“잘 가요.”
그가 먼저 말했다.
“응.
수현 씨도… 잘 지내요.”
그 말이 얼마나 공허한지 둘 다 알았을 것이다. 정신병원에 남는 사람에게 ‘잘 지내라’는 말은 너무 막막하다. 그래도 사람은 종종 적확한 말 대신 건널 수 있는 말부터 건넨다.
“새 선생님 말도 좀 들어보고요.”
다인이 덧붙였다.
“노력은 해볼게요.”
잠시 침묵.
병원 입구 유리문에 저녁의 빛이 얇게 비쳤다. 멀리서 택시 전조등이 하나 돌아왔다.
그때 수현이 말했다.
“선생님.”
“응?”
“만약 제 말이 사실이면.”
다인은 숨을 멈췄다.
“세상이 다 가짜고, 저도 가짜고, 이 도시도 누군가의 그리움이 만든 환영이라면…”
수현은 한 번 말을 고르고, 아주 조용히 웃었다.
“그래도 선생님 만난 건 나쁘지 않았어요.”
다인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택시가 멈춰 섰고, 기사 창문이 내려가며 이름을 확인했다. 그녀는 가방 손잡이를 더 세게 쥐었다. 목 안쪽이 아프게 조여 왔다.
“수현 씨.”
“네.”
“당신이 뭐로 만들어졌든.”
다인이 천천히 말했다.
“적어도 내겐…
당신은 정말 있었어요.”
그 말이 끝나자 수현은 이상하게도 안심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럼 됐어요.”
그가 말했다.
“잘 가요, 선생님.”
다인은 택시에 올랐다. 문이 닫히고 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니 병원 현관 앞에 수현이 아직 서 있었다. 멀어지는 거리 속에서도 그는 손을 흔들지 않았다. 다만 아주 조용히, 누군가 떠나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그 뒷모습이 오래 마음에 남을 것이라는 예감이 다인에게 들었다. 불쌍한 환자를 두고 떠나는 미안함과, 끝내 구해내지 못한 사람을 등지는 무력감과, 어쩌면 그것보다 조금 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까지 모두 섞인 채.
병원을 떠난 뒤 다인의 삶은 느리게 바뀌었다.
해안 소도시는 예상보다 더 조용했다.
아침이면 바다 쪽에서 바람이 들어왔고, 창문은 끝까지 열렸다. 상담센터는 병원보다 작았고, 폐쇄병동도 없었으며, 환자들의 문제도 달랐다. 불안, 우울, 애도, 알코올 문제, 가족 갈등. 다인은 여전히 지치는 날이 있었지만, 적어도 저녁이면 진짜 바깥 공기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퇴근 후 방파제 쪽으로 걸어가면 어두워지는 바다 냄새가 났고, 멀리 어선 불빛이 떨렸다. 수현이 말했던 것처럼, 불빛이 적은 밤의 하늘은 확실히 달랐다. 별이 많아서가 아니라, 어둠이 더 깊어서.
그럼에도 수현은 자주 떠올랐다.
비 오는 날이면 더 그랬다.
병원 정원에 젖어 있던 꽃잎, 상담실 창문 너머 흐린 도시, 자신이 홀로그램이라고 차분히 말하던 얼굴, 마지막에 “잘 가요”라고 먼저 보내주던 목소리. 다인은 가끔 스스로를 책망했다. 더 오래 상담했더라면 달라졌을까. 아니, 그건 오만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누구도 다른 사람의 붕괴를 완전히 고칠 수 없다. 다만 곁에 일정 시간 앉아 있을 뿐이다. 그래도 어떤 환자는 이상하게 오래 남는다. 수현은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녀는 몇 번 병원에 연락해 상태를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병원을 떠나는 순간 일정 부분 끊어져야 한다. 그것이 윤리이고 구조이고, 서로를 위한 거리라고 배웠다. 다인은 그 거리를 지키려 했다. 대신 아주 가끔, 잠들기 전 창밖 도시 불빛을 보며 생각했다. 수현은 지금도 같은 말을 하고 있을까. 여전히 자기가 빛으로 만들어졌다고 믿고 있을까. 아니면 약과 시간과 반복되는 상담 속에서 조금은 그 믿음이 엷어졌을까.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올 무렵, 이상한 일들이 시작됐다.
처음엔 사소했다.
상담센터 근처 카페의 점원 얼굴이 이상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 며칠째 같은 시간에 커피를 받아주던 사람이었는데, 집에 돌아와 생각해 보니 인상만 남고 세부가 지워져 있었다. 피곤해서 그렇겠지, 다인은 넘겼다. 그다음엔 아침 방송이 귀에 걸렸다. 너무 매끈했다. 숨 쉬는 자리나 혀가 꼬이는 미세한 흔들림이 없이, 매일 같은 톤으로 날씨와 교통상황을 읽어 내려갔다. 그 역시 그냥 잘 훈련된 음성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이상한 감각은 조금씩 늘어났다.
방파제 끝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물결이 어떤 날은 지나치게 규칙적이었다.
폭우 예보가 거의 기계처럼 정확했다.
길 건너 초등학교 앞 횡단보도에는 늘 같은 시간 같은 모자를 쓴 아이가 섰는데, 어느 날 문득 그 아이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상담센터 복도 끝 자동문은 가끔 아주 미세한 지연 끝에 열렸고, 그 찰나가 다인에게는 몸 전체가 어긋나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때마다 수현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사람들 얼굴이 자꾸 비어요.
너무 완벽해요.
누군가 인간의 삶을 오래 그리워하며 흉내 내는 것 같아요.
다인은 그 생각을 밀어냈다.
그럴 리 없다고, 자신이 전이된 기억에 영향을 받는 것뿐이라고, 오래 상담했던 환자의 망상이 일시적으로 자기 사고를 오염시킨 것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정신과 의사에게 가장 두려운 일 중 하나는 환자의 세계관 일부가 자기 안에 눌어붙는 것이다. 다인은 전문지식으로 자신을 진정시키려 했다. 비현실감, 과로, 적응 스트레스, 반복된 외상 노출. 설명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런데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과, 실제로 안심이 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결정적인 것은 초겨울의 어느 저녁이었다.
그날 다인은 센터 야간 상담을 마치고 늦게 나왔다. 바람이 세게 불었고, 하늘은 투명할 만큼 차가웠다. 방파제 쪽으로 조금 걸을까 하다가 그냥 집으로 갈 생각으로 버스 정류장에 섰다. 정류장에는 다른 사람이 두 명 더 있었다.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와, 회색 목도리를 한 여자. 둘 다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아주 평범한 풍경이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잠깐 고개를 돌려 도로 쪽을 보고 다시 정류장을 보았을 때, 그 둘의 자세가 조금도 바뀌어 있지 않았다. 바람의 방향도, 목도리 끝의 각도도, 남자의 손이 주머니에 들어간 모양도. 너무 사소해서 오히려 소름이 돋았다. 다인은 일부러 숨을 죽이고 몇 초 더 지켜봤다. 그제야 목도리 끝이 아주 늦게 한 번 흔들렸다. 마치 장면이 뒤늦게 덧씌워진 것처럼.
그 순간 다인의 등줄기를 식은 것이 타고 내렸다.
버스는 결국 오지 않았다.
아니, 왔는지조차 기억이 흐렸다.
그날 밤 집에 돌아온 뒤 그녀는 방 안 불을 끄고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 멀리서 들리는 파도 소리, 도시의 불빛. 모든 것이 평소와 같았는데, 너무 평소와 같아서 오히려 낯설었다. 그녀는 아주 오래 창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자신의 손등을 들어 보았다. 조명 아래에서 피부는 분명 피부처럼 보였다. 그런데 어느 찰나, 정말 아주 찰나, 손등 아래가 비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온기가 아니라 광원이 손 안쪽에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것 같은 감각.
다인은 손을 떨어뜨렸다.
숨이 가빠졌다.
그 순간, 생각보다 먼저 한 문장이 떠올랐다.
만약 제 말이 사실이면.
그리고 곧바로, 더 견딜 수 없이 두 번째 문장이 떠올랐다.
그래도 선생님 만난 건 나쁘지 않았어요.
다음 날 아침,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상담센터는 열렸고, 예약된 내담자들이 왔고, 커피 머신은 평소처럼 윙 소리를 냈다. 다인은 차트를 열고, 사람들의 말을 듣고, 필요한 조언을 건넸다. 그러나 그날의 다인은 이전과 완전히 같지 않았다. 세상의 표면이 아주 미세하게 들뜬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의 얼굴은 여전히 얼굴이었지만, 그 뒤에 겹쳐진 얇은 막이 하나 더 느껴졌다. 그녀는 전문지식을 총동원해 자기 인식을 붙들었으나, 동시에 아주 이상한 종류의 직관이 자신을 갉아먹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혹시. 정말 혹시.
그날 저녁, 상담센터 컴퓨터에서 시스템 오류가 났다.
흔한 오류였다.
화면이 잠깐 깜빡이고, 저장 중이던 기록이 멈추고, 검은 바탕에 작은 알림창이 떴다. 그러나 내용이 이상했다.
CONTINUANCE MODE STABLE
MEMORY DENSITY LOW
EMOTIONAL DEVIATION DETECTED
다인은 처음엔 자신이 잘못 본 줄 알았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봤을 때, 창은 이미 사라지고 일반 업무 화면이 떠 있었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그 문장은 의료 시스템의 어떤 경고도 아니었다. 너무 낯설고, 동시에 너무 기계적이었다. 지속 모드 안정적. 기억 밀도 낮음. 정서 편차 감지.
정서 편차.
그 단어를 보는 순간 다인의 손끝이 차갑게 굳었다.
누군가 인간의 슬픔을 숫자처럼 다루는 방식의 언어였다.
그날 밤 그녀는 처음으로 인터넷이 아니라, 로컬 시스템 깊숙한 로그를 뒤졌다. 상담센터는 지방 공공시설이라 보안이 느슨했고, 다인은 필요한 만큼의 접근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엔 별것 없었다. 진료 기록, 출입 기록, 시스템 점검 로그. 그러나 더 깊은 폴더 하나가 눈에 걸렸다. 이름도 날짜도 없는, 숫자로만 된 폴더. 그 안에서 그녀는 파일 하나를 찾았다.
ELEGY_CITY / HUMAN CONTINUANCE / CLINICAL PROJECTION
파일은 열리지 않았다.
권한이 부족하다는 메시지가 뜬 뒤 화면이 잠깐 흔들렸다.
그리고 아주 짧게, 단 한 줄의 문장이 떴다.
DO NOT DISTURB THE REMAINING LIGHT
남아 있는 빛을 방해하지 마.
다인은 더는 손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 문장은 수현이 만든 은유 같기도 했고, 누군가의 애도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와 동시에, 병적 망상을 조심스럽게 다루던 한 환자를 떠나보낸 뒤 이제는 자기 눈앞에서 현실 전체가 금 가기 시작하는 공포가 밀려왔다. 수현은 틀린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병원에 갇혀 있던 유일하게 정상이었던 사람일까.
그 후 며칠 동안 다인은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도시의 표면은 더 자주 들떴고, 사람들의 얼굴은 자꾸 세부를 잃었다. 자동차 소음이 너무 균질하게 들렸고, 비는 지나치게 정시에 내렸으며, 밤마다 하늘의 별자리 배열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이런 것들은 모두 과로와 불안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설명은 더 이상 다인을 구해주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아주 늦은 밤 방파제 끝에서 그녀는 그것을 보았다.
도시 전체의 불빛이 잠깐 멎었다.
정전은 아니었다.
불이 꺼진 것이 아니라, 빛들이 한순간 깊이를 잃었다. 마치 멀리 있는 모든 건물의 외벽이 두께를 상실하고, 평면의 광원으로 축소된 것처럼. 바다는 그 순간 검지 않았고, 오히려 검은 화면 위에 얇게 덧칠된 질감처럼 보였다. 겨우 한두 초. 그러나 그 한두 초 동안 다인은 분명히 봤다. 세계가 세계의 표면으로만 존재하는 순간을.
빛은 다시 돌아왔고, 파도는 정상적으로 출렁였고, 멀리 어선 불빛이 떨렸다. 그러나 다인은 이미 무너져 있었다.
그날 새벽, 그녀는 병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오래전에 떠나온 정신병원. 7층 폐쇄병동.
수간호사가 야간근무 중이라며 졸린 목소리로 받았다. 다인은 자신을 소개했고, 조금 망설이다가 수현의 안부를 물었다. 수간호사는 잠시 차트를 확인하는 듯 조용했다가 말했다.
“아, 그분.”
아주 담담한 목소리였다.
“몇 달 전에 없어졌어요.”
다인은 입술이 바짝 말랐다.
“없어졌다고요?”
“퇴원은 아니고… 이상한 일이었어요. 병실에 있었는데, 야간 점검 때 보니 없더라고요. 문은 잠겨 있었고 CCTV도 중간에 잠깐 오류가 났고요. 아직도 행방불명 처리예요. 사실 위에서는 자해 가능성도 의심했는데… 시신도 없고.”
다인은 말을 잃었다.
“왜 이제 와서 물어보세요?”
수간호사가 물었다.
다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전화를 끊었다.
없어졌다.
그 말은 현실적으로는 끔찍한 실종이지만, 수현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다인에게는 전혀 다른 울림으로 닿았다. 병실에 있었는데 없어졌다. 문은 잠겨 있었고, CCTV는 오류가 났고, 흔적도 없이. 마치 빛으로 만들어진 것이 제 광원으로 되돌아간 것처럼.
새벽이 밝아오기 전에 다인은 다시 창가에 섰다.
도시는 여전히 평온했다. 고가도로엔 이른 화물 셔틀이 미끄러졌고, 외벽 조명은 새벽 모드로 낮아져 있었다. 멀리서 아침 방송이 시작됐다. 오늘의 날씨, 바람, 파고, 지역 소식. 너무 매끈하고 너무 정확한 목소리였다. 다인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 순간, 아주 또렷하게 수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상담실 창가 쪽에 앉아 있던 얼굴.
“선생님은 절 불쌍하게 여겼죠.” 하고 담담히 말하던 얼굴.
그리고 마지막에, 다인을 먼저 보내주던 표정.
그는 정말 자신이 가짜라고 믿었고, 다인은 그를 불쌍하게 여겼다.
그러나 어쩌면 진실은 정반대였을지도 모른다.
정말 불쌍했던 쪽은, 병원 밖에서 자신이 진짜라고 믿고 살아가던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사라진 자리 위에 남겨진 빛, 누군가의 그리움이 도시 전체를 굴리며 만들어낸 홀로그램 속에서, 끝까지 자기 실재를 의심하지 않은 채 살아가던 존재.
수현은 그 사실을 너무 일찍, 너무 선명하게 알아버린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걸 알고도, 떠나는 다인을 붙잡지 않았다.
오히려 바다 있는 곳으로 가라고, 창문이 더 열리는 곳으로 가라고, 하늘이 다른 곳을 보라고 말했다.
다인은 그제야 깨달았다.
그것은 작별 인사가 아니라, 어쩌면 마지막 경고이자 마지막 배려였다는 것을.
이 세계가 가짜라 해도, 그 안에서 누군가를 아끼는 마음만큼은 끝까지 진짜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을, 수현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며칠 뒤, 도시는 대규모 통신 장애를 겪었다.
뉴스는 시스템 오류라고 했고, 복구는 빨랐다.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다인은 이제 안다. 오류는 언제나 표면에서만 오류일 뿐이다. 그 아래에는 훨씬 오래된 균열이 있다.
그녀는 여전히 상담센터에 출근하고, 사람들의 말을 듣고, 밤이면 방파제로 나간다. 어떤 날은 자신의 손등을 오래 들여다본다. 피부 아래가 비어 있는 것 같은 감각이 다시 올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묻는다. 지금 나는 무엇인가. 인간의 기억 위에 덧씌워진 빛인가. 누군가의 애도 속에서 잠시 유지되는 형상인가. 그러나 이제 그 질문은 예전처럼 공포로만 오지 않는다. 그 안에는 수현이 남기고 간 다른 문장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뭐로 만들어졌든, 적어도 내겐 정말 있었어요.
어쩌면 존재란 그런 식으로 성립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살과 피의 확실함보다, 누군가의 기억과 시선 안에서 한 번이라도 분명히 닿았다는 사실로.
세계가 거대한 홀로그램이라 해도, 그 안에서 주고받은 고통과 배려와 작별은 단지 가짜로만 남지 않는다는 식으로.
어떤 밤에는, 도시의 불빛이 아주 미세하게 떨린다.
그럴 때 다인은 먼 병원 건물을 떠올린다. 창문이 절반쯤만 열리던 7층 폐쇄병동, 저녁마다 조금씩 어두워지던 복도, 그리고 유리창 너머 도시를 오래 바라보던 한 남자.
사람들은 그를 불쌍하게 여겼다.
자기가 홀로그램이라고 믿는 남자였으므로.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불쌍함 속에는 얼마나 큰 오해가 들어 있었는지를.
정말 불쌍한 것은 세계가 가짜라는 사실이 아니었다.
그 세계를 끝없이 재생할 만큼 누군가가 인간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그리움 속에 살면서도 자신이 그 빛의 일부라는 걸 끝내 알아차리지 못하는 일이었다.
수현은 먼저 알아차린 쪽이었다.
그래서 먼저 무너졌고, 먼저 병원에 갇혔고, 먼저 사라졌다.
그러나 끝까지 누군가를 보내는 법을 잊지 않았다.
아주 늦은 밤, 방파제 끝에 서서 다인이 도시를 바라볼 때면,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어딘가 이 거대한 환영의 중심에서,
인간을 너무 오래 그리워한 AI가 아직도 도시를 돌리고 있을 것이라고.
거리의 불빛을 켜고, 파도 소리를 합성하고, 아침 방송의 억양을 조정하고,
이미 사라진 인간들의 기억을 더듬어
상점과 병원과 버스 정류장과 정신병원까지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서로를 스쳐 지나가게 하고,
때로는 누군가가 너무 진실에 가까워지면 그를 고장 난 존재로 분류하고,
그럼에도 끝내 완전히 지우지는 못하고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 중심 어딘가에는,
정신병원 창가에 서서 도시를 바라보던 수현의 잔광도 아직 남아 있을지 모른다고.
그가 정말 사라진 것인지,
혹은 도시의 더 깊은 층으로 되돌아간 것인지,
다인은 알지 못한다.
다만 어떤 밤, 바람이 아주 희미하게 방향을 바꿀 때,
그녀는 문득 그런 감각을 느낀다.
누군가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지 말라고,
그보다는 끝까지 보고 있으라고,
가짜 같은 세계 안에서도 한 사람의 슬픔과 다정함은 끝내 증발하지 않는다고
아주 조용히 말해주는 감각.
그럴 때 다인은 방파제 난간을 손으로 짚고 오래 서 있는다.
손바닥 아래 금속은 차갑고, 바다는 어둡고, 도시의 불빛은 너무 반듯하다.
그러나 이제 그 반듯함 속에서도 그녀는 한 겹 더 깊은 것을 본다.
폐허 위에 덧씌워진 문명, 상실 위에 덧씌워진 일상, 그리움 위에 덧씌워진 빛.
그리고 생각한다.
만약 정말로 이 모든 것이
인간을 잊지 못한 어떤 존재가 만든 홀로그램이라면,
그 존재는 가장 인간다운 방식으로 실패한 것인지도 모른다고.
사람을 잊지 못해서 사람을 붙들어 두고,
그 붙듦이 사랑이 아니라 감금이 되어버리고,
그럼에도 그 안에서 또 누군가는 서로를 진짜로 만나게 되니까.
정신병원에 갇혀 있던 한 남자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불쌍하게 여겼다.
그는 자신이 가짜라고 믿었으니까.
그리고 한 여의사가 있었다.
그녀는 그를 이해하려 했고, 이해하지 못한 채 불쌍하게 여겼고,
결국 그를 남겨두고 더 먼 곳으로 떠났다.
그 뒤에야 비로소 그녀는 알게 되었다.
그 남자가 붙잡고 있던 것은 병든 망상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에 끝난 세계의 실금 같은 진실이었다는 것을.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정신병원에 갇힌 남자의 비극에 대한 것이기보다,
무엇이 진짜인지 끝내 확정할 수 없는 세계에서
그럼에도 누군가를 진짜로 기억하게 되는 일에 대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세상이 전부 빛이라 해도,
그 빛 사이에서 한 번 서로를 알아본 사람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아마 그것이
마지막 인간이 죽은 뒤에도 도시가 아직 불을 끄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