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유랑 1부
도시는 늘 자기 얼굴을 늦게 보여주었다.
낮에는 유리와 철골과 신호등과 횡단보도와 정비된 화단의 모양으로만 자신을 드러냈고,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 안쪽의 다른 층들을 조금씩 비쳐 보였다. 철거를 기다리는 아파트의 빈 창문, 새벽 세 시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세무사 사무실, 지하차도 벽면을 따라 고여 있는 눅눅한 냄새, 다리 아래 노숙인의 골판지에 앉았다가 날아가는 먼지, 택배차가 빠져나간 뒤 적막하게 남는 물류단지의 정사각형들. 그렇게 드러나는 도시의 뒷면은 언제나 매끈하지 않았다. 반듯한 도면 아래에 오래 눌린 주름이 있었고, 주름 사이에는 사람이 버리고 간 시간들이 얇은 검댕처럼 쌓여 있었다.
서이언은 그런 것들을 보아도 눈길을 오래 두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마흔이 되기 전인데도 이미 젊다는 말을 거의 듣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이보다 늙어 보인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세월보다 먼저 굳은 인상이 사람을 실제 나이보다 오래된 존재처럼 보이게 했다. 얼굴선은 군더더기 없이 정리되어 있었다. 볼이 패이거나 눈밑이 꺼진 식의 피로는 없었으나, 피부 아래를 흐르는 긴장감이 늘 같은 자리에서 같은 표정만 허용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눈은 크지 않았고 쌍꺼풀도 옅었다. 눈동자 색은 검정보다 차갑게 보이는 짙은 갈색이었는데, 상대를 뚫어지게 바라보기보다 정확히 필요한 만큼만 포착하고 치우는 눈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보고 판단하고 넘어가는 식이었다. 코는 곧았고 입술은 얇았다. 웃지 않아서가 아니라, 입꼬리가 애초에 웃음을 오래 걸치게 태어나지 않은 얼굴이었다. 손은 컸고, 손등의 뼈마디가 단단하게 드러나 있었다. 움직임은 조용했으나 빠졌고, 어떤 동작도 남김이 없었다. 재킷 소매를 걷는 것, 장갑을 끼는 것, 펜 뚜껑을 닫는 것, 총의 안전장치를 확인하는 것까지, 그의 몸은 늘 하나의 결론을 향해 가장 짧게 움직였다.
귓바퀴 뒤로는 아주 오래된 흉터가 하나 있었다. 균열이 처음으로 그의 삶에 들어왔던 해에 생긴 상처였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서이언은 설명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과거를 말하는 것을 무책임한 습관처럼 여겼다. 누군가 물으면 짧게 끝냈다. 사고였다고. 오래전 일이었다고. 더 말할 필요는 없다고.
그는 질서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질서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 믿음은 철학이 아니라 생존법에 가까웠다. 어떤 사람들에게 자유가 바람과 같다면, 그에게 자유는 벽이었다. 벽이 있는 방, 잠금이 되는 문, 번호가 매겨진 서류철, 출입이 허가된 구역, 지정된 자리, 정해진 절차. 선이 있고 경계가 있고 바깥과 안이 구분되는 상태. 그는 그런 것들 안에서만 호흡이 고르게 돌아왔다. 선택이 많을수록 사람은 흔들렸고, 흔들릴수록 틈이 생겼고, 틈이 생기면 무언가가 들어왔다. 그에게 균열은 언제나 그렇게 시작되었다. 선이 지워지는 것. 닫혀 있어야 할 것이 열리는 것. 살아 있는 것과 사라진 것이 한 좌표를 공유하는 것.
그래서 그는 균열조사국 제3폐쇄팀에 잘 어울렸다.
그날 저녁에도 그는 정확히 정시에 책상을 정리했다. 펜 두 자루를 가지런히 놓고, 서류철 가장자리를 맞추고, 마지막 점검표에 서명을 했다. 사무실 유리창 바깥으로 해가 지고 있었는데, 지는 빛은 빌딩의 면마다 조금씩 다른 색으로 눕고 있었다. 어떤 창은 주황이고 어떤 창은 납빛에 가까웠다. 그 차이를 보며 감상에 빠질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서이언은 창문에 비친 실내만 점검했다. 불이 깜박이지 않는지, 반사면이 일그러지지 않는지, 유리 저편과 이편의 윤곽이 정확히 겹치는지. 모든 것이 정상 범주 안에 있었다.
경보가 울린 것은 그때였다.
낮고 짧은 음이 세 번.
화재나 지반침하에 쓰는 공용 경보와는 다른, 균열 전조용 경보. 사무실 천장의 형광등이 순간적으로 미세하게 흔들렸고, 벽면 지도 위 제31섹터가 어두운 적색으로 떠올랐다.
서이언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일어날 때조차 급하지 않았다. 급함은 손끝을 흐리게 한다. 그는 옷걸이에서 방재 재킷을 집어 입고, 허리에 결속핀 케이스를 찼고, 위상단속권총의 탄창과 차폐막 투사기를 확인했다. 옆 책상에 앉아 있던 신입 조사원이 뭔가 묻고 싶다는 얼굴로 그를 보았지만, 그는 먼저 말하지 않았다. 사람이 질문을 삼키는 시간을 기다리는 것까지 그의 일상에 포함되어 있었다.
“규모는요?”
신입이 결국 물었다.
“현장 가서 본다.”
그는 짧게 말하고 나갔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 팀장 오민석의 목소리가 이어피스에 들어왔다.
“31섹터. 이동성 전조다.”
“중심점은?”
“고정이 안 돼. CCTV가 세 번 끊겼다가 돌아왔는데 계속 같은 골목을 잡는다.”
“시민 대피는요.”
“시작은 했는데 완전히 안 빠진다. 남아 있는 세대가 있어.”
“유도자 가능성 있나요?”
이어피스 너머에서 아주 짧은 숨소리가 스쳤다. 오민석은 가능성이 낮은 사안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있어.”
서이언은 더 묻지 않았다. 가능성이 있다고 하면 있는 것이었다.
차량이 제31섹터에 가까워질수록 도시는 눈에 띄게 낡아졌다. 자동화 물류창고와 정비된 간선도로가 끝나고, 그 뒤로는 오래전 재개발이 멈춘 것 같은 블록들이 나타났다. 다세대주택 외벽의 타일은 군데군데 떨어져 있었고, 편의점 간판 하나가 반쯤 꺼진 채 초록빛을 깜박이고 있었다. 저층 아파트 베란다에는 세탁기가 밖에 놓여 있었고, 전깃줄에는 오래된 운동화 한 짝이 걸려 있었다. 가게 셔터에 칠해진 전화번호는 이미 지워져 읽을 수 없었다. 저녁인데도 골목 안쪽은 기묘하게 늦은 새벽처럼 보였다. 빛이 단순히 어두운 것이 아니라, 오래 앉아 있었다.
차량이 멈췄을 때, 공기는 이미 정상적이지 않았다.
표백제 냄새가 먼저 났고, 비가 오기 전 시멘트가 머금는 눅눅한 냄새가 그 아래에 엷게 깔렸다. 그보다 더 깊은 층에는 오래 닫아 둔 집의 냄새가 숨어 있었다. 오래 비운 방에 남는 먼지와 천, 서랍 속 약봉지와 오래된 세제의 냄새. 서이언은 차 문을 닫으며 숨을 한 번 짧게 조절했다.
통제선 바깥에 중년 여자 하나가 서 있었다. 손등에 비닐봉지 손잡이가 붉게 파고든 채였다.
“저 안에 아직 애가 있어요!”
“대피하십시오.”
서이언은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전화도 안 받고, 아까까지 분명 방에 있었는데—”
“대피하십시오.”
여자는 입술을 떨다가 결국 물러났다. 누군가 더 다정하게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이언은 누군가의 불안을 부드럽게 덮는 재능이 없었다. 그는 문을 닫는 사람이었고, 그 일이 이미 충분히 잔인하다는 사실을 굳이 다른 방식으로 꾸밀 생각도 없었다.
골목 안으로 들어서자 벽면의 전단지 끝이 안쪽으로 말려 들어가 있었다. 바람은 없는데 종이만 떨렸고, 타일 줄눈 사이에서는 아주 가는 푸른빛이 새고 있었다. 마치 벽과 벽 사이에 누가 가느다란 전류를 흘려놓은 것 같았다. 저 멀리 막다른 곳에 놀이터가 있었다. 지도에는 없던 공간이었다. 분명 두 개의 담벼락이 맞닿아 끝나야 할 자리에 모래밭과 미끄럼틀과 그네가 놓여 있었다. 미끄럼틀은 철제 손잡이가 군데군데 벗겨져 붉은 녹이 피어 있었고, 사슬 하나가 끊어진 그네는 누가 밀지 않았는데도 아주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놀이터는 버려져 있었지만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아무도 찾지 않았는데도 누군가의 체온이 아직 모래 아래에 남아 있는 것 같은 정적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그 그네 뒤에서 소년이 걸어 나왔다.
윤해겸은 첫눈에 소년이었다. 앳되고 가늘다는 말로는 다 담기지 않는, 아직 몸이 자기 키를 완전히 믿지 못하는 나이의 선이 있었다. 키는 또래 중에서는 큰 편이었으나 어깨가 넓지 않아 길게만 보였다. 팔다리는 얇고 손목은 셔츠 소매 아래에서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가늘었다. 교복 셔츠 위에 검은 가디건을 걸쳤는데, 세탁을 여러 번 거친 탓에 옷감이 부드럽게 죽어 있었다. 단추는 하나만 잠겨 있었고, 소매 끝은 손등을 살짝 덮고 있었다. 바지는 무릎 부분이 희미하게 닳아 있었고 운동화는 흰색이었으나 오래되어 회색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피부는 창백했다. 병약해 보인다기보다는, 햇빛이 사람의 살 속에 오래 머물지 못한 얼굴이었다. 턱선은 아직 완전히 굳지 않은 채 부드럽게 남아 있었고, 뺨은 살짝 여물지 않은 흔적을 품고 있었다. 눈은 크지 않았다. 다만 이상하게 깊었다. 또래의 시선이 갖는 성급한 밝음이 없고, 한 번 본 풍경을 너무 오래 안쪽에 두어 색이 짙어져 버린 눈이었다. 속눈썹이 길어 눈동자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고, 입술은 얇지만 지나치게 마르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있는 방식 때문에 어려 보이기보다 오히려 나이를 감추고 있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웃는 얼굴을 궁금해할 만한 생김새였으나, 그 웃음이 쉽게 나오지 않을 것 같아 더 선명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는 손에 낡은 열쇠 하나를 쥐고 있었다. 누런 황동이 닳아 가장자리가 둥글게 닳은, 오래된 집 열쇠였다. 손바닥 안에 꼭 쥐고 있어서 금속의 반짝임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열쇠 끝의 톱니 모양만 손가락 사이로 드러나 있었다.
해겸은 서이언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그저 예정된 시간에 도착한 사람을 맞듯 시선을 옮겼다.
“오실 줄 알았습니다.”
말투는 또렷했고 조용했다. 반말을 할 나이의 얼굴이었으나, 존댓말은 몸에 밴 듯 자연스러웠다. 예의라기보다 거리감에 가까운 존댓말이었다. 누군가를 존중해서가 아니라 이미 너무 멀어져 있어서 반말이 오히려 닿지 않는 사람의 어조.
서이언은 그를 한 번 훑어본 뒤 모래밭 중심을 확인했다. 이미 검은 선 하나가 길게 그어져 있었다. 그림자처럼 가늘고, 칼집처럼 정직한 선. 균열의 첫 선이었다.
“이름.”
“윤해겸입니다.”
“뒤로 물러나라.”
해겸은 눈을 내리깔아 손 안의 열쇠를 한 번 봤다.
“지금 와서 물러나기에는 너무 멀리 왔습니다.”
“뒤로 물러나라.”
같은 말이 같은 간격으로 반복되자, 해겸의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웃는 것도 아니고 비웃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상대가 자신을 설득할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사람의 표정.
“역시 그렇게 말씀하시는군요.”
서이언은 허리에 찬 결속핀을 뽑아 모래밭 가장자리에 박았다. 푸른 격자선이 얇게 퍼졌다. 보통의 전조라면 개방 속도가 잠시 늦춰졌을 것이다. 그러나 검은 선은 멈추지 않았다. 푸른 선 아래를 지나가며 모래알을 아주 조금씩 위로 떠오르게 했다. 모래가 바람도 없이 허공에서 떨리고 있었다.
이어피스 너머로 오민석의 음성이 왔다.
“수동 개방이야. 손목 확인해.”
서이언의 시선이 해겸의 오른 손목으로 내려갔다. 셔츠 소매 아래로 검은 먹선 같은 문양이 비쳤다. 원 안에 세 개의 세로획. 조사국 내부 자료에서만 보던 표식. 청음자.
“네가 열고 있나.”
해겸은 잠시 답하지 않았다. 대신 놀이터 바깥, 허물어진 5층 아파트 한 동을 턱끝으로 가리켰다. 302호 창문에 누렇게 바랜 커튼이 걸려 있었다. 저녁빛이 닿지 않는 창이었다.
“저는 저기서 살았습니다.”
서이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와 둘이 살았습니다. 열세 살까지.”
말이 끝날 즈음, 아파트 외벽 타일 하나가 툭 떨어졌다. 깨지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타일은 중간에 부서지지 않고 모래에 닿자마자 가루처럼 흩어졌다.
“어느 날 밤 벽이 갈라졌습니다. 가스 냄새가 난다고도 했고, 배관이 터졌다고도 했고, 노후 건물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도 했지요. 조사국 차량은 새벽에 왔고, 파란 막이 쳐졌고, 아침이 되었을 때는 저 층이 통째로 사라져 있었습니다.”
해겸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문장이 더 차갑게 박혔다.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고, 시신은 없었고, 사망 확인은 되었습니다. 저는 보호시설로 옮겨졌습니다. 그 뒤에는 늘 비슷했습니다. 상담실, 검사실, 임시 거처, 관찰 기록. 제가 본 것을 말하면 망상이라고 적혔고, 들었다고 말하면 환청이라고 적혔습니다.”
놀이터의 철제 시소가 아주 천천히 기울었다. 누가 앉지 않았는데도 한쪽이 내려갔다. 내려간 쪽 그림자는 땅에 붙지 않고 약간 떠 있는 듯 보였다.
서이언은 차폐막 투사기를 놀이터 외곽으로 던졌다. 반투명한 막이 돔 형태로 솟아오르며 공간을 감쌌다. 막 표면에 놀이터와 골목이 어긋나게 비쳤다. 그 반사 속에서 그네는 세 개였고 미끄럼틀은 두 개였다.
“현장을 봉쇄한다. 마지막 경고다. 물러나라.”
해겸은 고개를 아주 조금 들었다. 저 멀리서 창문들이 하나씩 떨리기 시작했다. 커튼이 안쪽에서 부풀어 올랐다.
“저는 오래전부터 물러난 채로 살았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또렷했다.
“제 집이 사라진 날부터 줄곧요.”
모래밭 한가운데의 검은 선이 아주 작게 벌어졌다. 틈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세상이 두께를 갖기 시작한 폭이었다. 그 얇은 틈 사이로 어둠이 아니라 실내의 빛이 보였다. 오래된 형광등 아래의 연한 백색. 낡은 식탁 한쪽 모서리와 그 위의 국그릇 둘. 누군가 막 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은 방의 각도.
서이언은 시선을 거두었다.
“균열은 원하는 것을 보여준다.”
“아닙니다.” 해겸이 말했다.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죽은 공간의 잔향이다.”
“잔향이면 어떻습니까?”
그 문장은 거의 차갑게 평평했다. 절박한 사람이 할 법한 간청도, 미친 사람이 할 법한 들뜸도 없었다. 오히려 너무 오래 생각해 이미 결론까지 가 버린 사람의 침착함이 있었다. 서이언은 그런 침착함을 좋아하지 않았다. 충동은 제압할 수 있지만 결심은 더 다루기 어렵다.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들어가면 돌아오지 못한다.”
“예.”
“죽는다.”
“예.”
짧은 대답이 너무 곧아서, 서이언은 잠깐 그를 똑바로 보았다.
해겸은 자신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적어도 어렴풋한 몽롱함으로 끌려오는 얼굴은 아니었다. 눈 밑에 드리운 피로, 입술 가장자리의 잔뜩 말라붙은 하얀 흔적, 열쇠를 쥔 손등 위로 솟은 가는 힘줄. 그 모든 것이 이미 여러 밤을 건너와 한 선택 앞에 선 사람의 흔적이었다.
“그런데도 가겠다는 건가?”
해겸의 시선이 처음으로 서이언의 얼굴에 정확히 닿았다.
“선생님께는 이해되지 않겠지요.”
“이해할 필요는 없다.”
“예. 선생님은 닫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게 내 일이다.”
“선생님께 자유는 아마 그런 것이겠군요.”
서이언은 답하지 않았다.
해겸은 아주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바람이 없는 놀이터에, 그의 가디건 자락만 살짝 흔들렸다.
“저는 어릴 때부터 문을 잘 찾았습니다. 없는 복도, 갑자기 생기는 계단, 유리창에 겹쳐 보이는 방. 처음에는 무서웠고, 그다음에는 제가 이상한 줄 알았고, 나중에는 조금 부러워졌습니다. 저쪽은 적어도 여기 아닌 곳으로 이어져 있으니까요.”
“여기 아닌 곳이 모두 자유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 안에 있다고 모두가 살아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놀이터 바깥 도로에서 굉음이 났다. 아스팔트가 갈라진 것이 아니라 접혔다. 누군가 도로의 가장자리를 들어 안쪽으로 꺾은 것처럼 표면이 세워지며, 아래에 오래전 사라졌어야 할 노면전차 선로가 드러났다. 전신주 그림자가 두 방향으로 갈라졌고, 편의점 간판 하나가 불빛을 토하다가 한순간 완전히 꺼졌다. 공중에서는 드론 두 대가 진입했지만, 놀이터 위에 솟은 검은 기류가 청색 결속광을 씹어 먹듯 흔들어 한 대를 바로 비틀어 떨어뜨렸다.
이어피스가 지지직 울렸다.
“개방률 24퍼센트.”
오민석의 목소리였다.
“서이언, 길게 못 간다.”
서이언은 권총을 뽑았다. 푸른 위상탄이 실린 단속권총의 안전장치가 짧고 건조한 소리를 냈다.
해겸은 권총을 보더니 잠시 눈을 내리감았다 뜨고 말했다.
“결국 그렇게 되는군요.”
“멈춰야 한다.”
“예. 도시에서는 늘 그렇게 말하지요.”
“멈춰야 한다.”
“봉합해야 한다. 정리해야 한다. 안전을 위해. 다수를 위해. 관리 가능한 범위 안으로.”
그는 비난하지 않았다. 문장을 낭독하듯 평평하게 말했다. 그 평평함이 오히려 서이언의 미간을 아주 미세하게 좁혔다.
“하지만 저는 열세 살 이후로 한 번도 되돌아간 적이 없습니다.”
해겸은 손 안의 열쇠를 들어 보였다. 해 질 무렵의 누런 빛이 금속의 닳은 면에 걸렸다.
“어머니가 사라진 밤 이후로, 어디에 있어도 잠깐 맡겨진 것 같았습니다. 보호시설 침대는 제 침대가 아니었고, 임시 거처의 방문은 제 문이 아니었고, 상담실의 의자는 제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괜찮아질 거다’라는 말은 늘 있었지만, 아무도 제가 무엇에서 괜찮아져야 하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그저 저는 계속 살아 있으라고만 들었습니다.”
틈이 더 벌어졌다.
이번에는 틈 너머의 풍경이 더 선명했다. 젖은 우산이 현관에 기대어 있고, 싱크대 위에 머그컵 두 개가 있고, 벽시계가 오후 여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비가 오는 날 저녁의 집이었다. 어느 집에서나 있을 수 있는, 그래서 더 잔인한 실내. 삶은 대개 거창한 장면이 아니라 이렇게 사소한 배치로 기억에 남는다. 컵 하나의 위치, 형광등의 색, 젖은 우산이 만드는 바닥의 작은 원.
그 안에서 누군가 문고리를 잡는 소리가 났다.
찰칵.
아주 선명한 생활 소리였다.
해겸의 목울대가 작게 움직였다. 그가 그 소리를 듣는 방식은 누군가 오래 잊었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는 사람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서이언은 그 표정을 보았고, 동시에 교본의 문장을 떠올렸다. 균열은 상실을 가장 정확한 발음으로 돌려준다. 그러므로 듣지 말 것.
그러나 듣지 않는다는 것은 들린 뒤에야 가능했다.
서이언도 그 찰칵 소리를 들었다. 너무 일상적이고, 그래서 너무 위험한 소리였다. 삶을 구성하는 소리는 언제나 인간을 방심하게 만든다. 비상벨이나 비명보다 이런 소리가 더 깊게 들어온다.
“윤해겸.”
서이언이 처음으로 이름을 불렀다.
“그건 문이 아니다.”
해겸은 가볍게 숨을 뗐다.
“선생님께는 아니겠지요.”
“그냥 죽음이다.”
“예. 어쩌면 그렇겠지요.”
“어쩌면이 아니다.”
“하지만 선생님.”
그가 아주 조용히 말했다.
“살아 있다는 것이 꼭 생존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틈 너머의 방이 여러 장으로 갈라졌다. 식탁, 복도, 오래된 엘리베이터, 비 오는 베란다, 희미한 계단참, 오래전 무너진 상가의 통로. 수많은 실내가 겹쳐졌다. 도시가 버리고 덮고 지워버린 방들이 한꺼번에 검은 틈 안에서 회전하는 것 같았다. 담벼락이 바깥으로 불룩해졌고, 아파트 창문 수십 장이 동시에 안쪽으로 휘었다가 바깥으로 터졌다. 유리 파편이 비처럼 쏟아졌다. 놀이터의 미끄럼틀이 천천히 접히기 시작했다. 철제 사다리 칸들이 하나씩 안쪽으로 말려 들어갔다.
오민석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찢어졌다.
“서이언, 지금이다!”
그는 쐈다.
푸른 충격광이 공기를 가르며 해겸의 오른쪽 어깨를 관통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한 발로 근육이 굳고 몸이 뒤로 젖었을 것이다. 실제로 해겸도 한 번 휘청였다. 열쇠가 손에서 빠져 모래 위에 떨어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어깨에서 퍼진 푸른 전류가 손목 문양을 타고 검은 틈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치 균열이 그 충격을 삼켜 에너지로 바꿔 버린 것 같았다. 해겸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켰다. 셔츠 어깨가 푸르게 타듯 빛났다가 이내 붉게 젖었다.
서이언은 즉시 앞으로 뛰었다. 결박 와이어가 그의 손에서 뻗어 나가 해겸의 허리를 감았다. 그는 단숨에 끌어당기려 했다. 구조는 아니었다. 제압이었다. 서이언에게 해겸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구해야 할 소년이 아니라 중단시켜야 할 중심핵이었다. 그 사실만큼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해겸은 쓰러진 채로도 손을 뻗어 모래 위의 열쇠를 다시 쥐었다.
그 작은 동작이 이상하게 또렷했다. 피가 흐르고 모래가 떠오르고 철제 시설물이 구겨지는 와중에, 그가 열쇠를 쥐는 손끝만은 놀랄 만큼 고요했다. 그것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것을 챙기는 사람의 손이었다. 세상이 무엇으로 끝나든, 적어도 이것만은 자기 손에 두겠다는 집요한 조용함.
“놔라.”
서이언이 와이어를 당겼다.
해겸은 끌려오지 않았다. 균열이 이미 그의 몸 절반을 자기 쪽으로 당기고 있었다. 그의 신발 밑창이 모래를 긁었다. 운동화 끈 끝이 검은 틈 가장자리에 닿았다가 바람도 없이 흔들렸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선생님께 자유는 이 그어진 선 안에 있는 것이겠지요.”
서이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팔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저는 반대입니다.”
해겸의 목소리는 약해졌지만 흐려지지 않았다.
“저에게 자유는, 이 도시가 정해준 자리를 거부하는 일입니다. 살아남은 사람, 관찰 대상, 기록 번호, 보호 조치, 임시 거주자. 그런 이름으로 더 오래 붙들려 있지 않는 일입니다.”
그제야 그는 반쯤 고개를 돌렸다.
얼굴은 창백했고 입술 끝에 피가 묻어 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평온했다. 울거나 떨거나 매달리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처음으로 어떤 좌표에 도착한 사람의 안도 같은 것이 있었다. 그 평온이 서이언의 손끝을 아주 미세하게 늦췄다.
“선생님은 제가 죽는다고 생각하시겠지요.”
“그렇다.”
“저는 제가 묶여있던 것에서 풀린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은 설명이 아니라 판결 같았다. 스스로에게 이미 내린 판결.
서이언은 와이어를 더 세게 잡아당겼다.
“그건 착각이다.”
해겸의 입가가 아주 가볍게 움직였다.
“예. 선생님께는 끝까지 그럴 겁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손으로 허리의 와이어 고리를 풀었다.
그 금속음은 아주 작았는데도 모든 붕괴음보다 선명하게 들렸다.
찰칵.
한 사람이 타인의 통제를 벗어나는 소리였다.
“윤해겸!”
서이언이 소리쳤다. 그가 목소리를 높이는 일은 드물었다. 높아진 목소리에는 감정보다 명령이 먼저 실렸다.
해겸은 마지막으로 그를 보았다.
그 눈에는 동정도, 원망도, 이해도 없었다. 다만 아주 짧고 맑은 분리가 있었다.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는 두 사람이 같은 문 앞에서 잠시 마주 본다는 사실의 고요한 인정.
“선생님은 끝까지 균열을 닫으시겠지요.”
그가 말했다.
“저는 끝까지 나가겠습니다.”
그리고 몸을 틈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 순간 제31섹터의 공간이 뒤집혔다.
놀이터를 중심으로 반경 백 미터의 공기가 안쪽으로 빨려들었다가 밖으로 팽창했다. 담벼락은 위로 솟아 천장처럼 접혔고, 도로는 옆으로 세워져 건물 벽이 되었다. 아파트 창문들이 아래를 향해 쏟아졌고, 공중고정드론 두 대가 한꺼번에 빨려들어가 검은빛 속에서 종이처럼 찢겼다. 전선은 활처럼 휘며 푸른 스파크를 쏟아냈고, 편의점 진열대의 캔음료 수십 개가 유리문을 뚫고 도로 위로 튀어나와 회전했다. 모래밭은 더 이상 모래밭이 아니었다. 수직으로 열린 무수한 방들의 심연이 아래에서 입을 벌리고 있었다. 불 켜진 식탁, 철거된 복도, 오래전 닫힌 병실, 엘리베이터 내부, 젖은 베란다, 창문 없는 교실. 도시가 버린 실내들이 한꺼번에 바닥 아래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서 해겸의 몸이 아주 잠깐 선명하게 보였다.
피에 젖은 셔츠, 열쇠를 쥔 손, 검은빛에 잠긴 옆얼굴, 그리고 어째서인지 떨어지는 사람의 몸이 아니라 건너가는 사람의 자세. 발끝이 아래가 아니라 앞을 향하고 있었다. 무너지며 추락하는 사람에게 없는 방향감이었다.
그의 입술이 마지막으로 움직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서이언은 그 입 모양을 읽었다.
드디어.
그 뒤에 균열이 닫혔다.
닫힌다는 것은 한 점으로 사라지는 일이 아니라, 안쪽에서 뒤집히며 모든 것을 씹어 삼키는 일이었다. 검은 입이 수축하며 바닥의 모래와 철제 시설물과 유리 파편과 드론 잔해를 한꺼번에 끌어당겼다. 서이언은 바닥에 무릎을 박은 채 뒤로 밀리지 않으려 버텼다. 장갑 아래 손바닥 살이 벗겨지는 감각이 났다. 귀 안쪽에서 피가 끓는 소리가 났고, 시야가 하얗게 깜박였다. 그다음에는 거대한 팽창이 한 번 밀려 나왔다. 닫힌 문 뒤에서 누군가 양손으로 세계를 세게 밀어낸 것 같은 충격. 서이언은 몸이 통째로 뒤로 날아가 담벼락에 부딪혔다.
숨이 끊겼다가 돌아왔다.
정신을 차렸을 때, 놀이터는 없었다.
그 자리에 둥근 구덩이 하나만 남아 있었다. 깊지도 않고 넓지도 않았다. 놀랍도록 평범한 구덩이였다. 다만 바닥의 흙이 너무 고와, 한 번 오래 타고 식은 재처럼 보였다. 해겸도, 열쇠도, 피도, 흔적도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도 그 자리에 서 있지 않았던 것처럼.
오민석이 현장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얼굴과 목에 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다.
“폐쇄 완료인가.”
서이언은 구덩이를 보았다.
“완료됐습니다.”
“매개체는?”
잠깐의 정적이 있었다.
“소실.”
오민석은 고개를 아주 작게 끄덕였다. 안도의 기색은 없었다. 확인만 있었다. 그는 주변 붕괴 반경을 훑고, 구조팀에 외곽 안전화 작업을 지시하고, 서이언의 권총 상태를 확인한 뒤 말했다.
“보고서는 내가 맞춘다. 시민 발표는 지반 붕괴로 간다.”
“예.”
“의무실 가서 손부터 꿰매.”
“예.”
모든 것이 다시 문장으로 환원되었다. 짧고 정확한 보고 문장들. 도시는 늘 마지막에 그렇게 자신을 접었다. 무엇이 사라졌든, 무엇이 열렸든, 보고서에는 안전 조치와 통제 범위와 잔류파 수치만 남았다.
그날 밤 제31섹터는 작업등 아래 덮였다. 중장비가 들어왔고 무너진 외벽이 치워졌고 구덩이는 새벽이 되기 전에 메워졌다. 다음 날 뉴스 자막은 짧았다. 국지적 지반 침하, 일부 시설 파손, 인명 피해 조사 중. 화면에는 불빛 번지는 야간 현장이 몇 초 나오고 끝났다. 시민들은 곧 다른 뉴스로 넘어갔다.
조사국 내부 보고서에는 조금 다른 문장이 올라갔다.
제31섹터 유도성 균열 발생. 청음자 1명 확인. 현장 폐쇄 성공. 매개체 소실. 연쇄개방 차단.
서이언은 그 보고서 하단에 서명했다. 펜 끝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건조했다. 그는 문장을 고치지 않았다. 해겸의 이름은 한 번 적혔고, 이후에는 번호로 분류될 것이다. 늘 그래왔듯.
며칠 뒤, 그는 다시 같은 시각에 일어났다. 같은 길이의 수염을 밀었고, 같은 온도의 물로 샤워했고, 관사 복도 끝 세 번째 창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 하늘은 하나였다. 갈라지지 않았고, 어제와 이어져 있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사무실에 앉아 오전 보고서를 검토하던 중, 신입 분석관이 자료철을 들고 다가왔다.
“선배님, 31섹터 잔류파 분석표입니다.”
서이언은 받아 들었다. 수치들은 반듯했다. 그래프는 완만했고, 대부분 기준치 아래였다. 다만 맨 아래 아주 작은 값 하나가 임계선 바로 위에 떠 있었다. 미세한 잔향. 규정대로라면 재관측 대상이었다.
그는 그 숫자를 오래 보지 않았다. 그러나 종이를 넘기기 직전, 아주 잠깐 해겸의 손이 떠올랐다. 모래 위에서 다시 열쇠를 집어 들던 손. 붕괴와 피와 검은빛 속에서도 끝까지 무엇인가를 자기 손으로 선택하던 손. 그 손은 구원을 청하는 손이 아니었다. 매달림이 아니라 결심의 모양이었다.
“희석 가능 범위입니다.”
서이언이 말했다.
신입이 되물었다.
“종결 처리해도 됩니까.”
서이언은 창밖을 한 번 봤다. 횡단보도 앞에 선 사람들이 파란불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선 위 자동차들은 정확히 선을 지키고 멈췄고, 자전거 한 대가 유도선을 따라 미끄러지듯 지나갔다. 모든 것은 자리를 알고 있었다. 그 질서가 그에게는 여전히 생존의 유일한 형태였다.
“종결해도 됩니다.”
“예.”
신입이 물러갔다.
해가 저물 무렵, 사무실 유리창에는 실내와 바깥의 풍경이 함께 비쳤다. 서이언은 무심코 자기 얼굴을 보았다. 반사면 속 얼굴 뒤로 아주 잠깐, 형광등이 반쯤 켜진 식탁이 겹쳐 보이는 듯했다. 컵 두 개와 젖은 우산과 오래된 벽시계가 있는 방. 너무 짧아서 착시라고 해도 좋을 순간이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유리는 다시 유리로 돌아왔다.
자기 얼굴 뒤에는 벽만 남았다.
서이언은 시선을 거두고 다음 보고서를 열었다.
밖에서 사이렌이 한 번 울리고 지나갔다. 도시는 여전히 살아 있었고, 여전히 금이 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여전히 닫는 사람들을 필요로 했다. 그는 펜을 들고 첫 줄에 날짜를 적었다. 그다음 줄에 사건번호를 적었다. 마지막으로, 아무 감정도 섞이지 않은 필체로 기록했다.
폐쇄 완료.
그러나 그 밤, 잠들기 직전 아주 짧은 순간에만, 그는 자신이 끝내 이해하지 못한 한 가지를 떠올렸다.
자신에게 자유는 안쪽이었다.
벽이 있고 경계가 있고 돌아와 앉을 자리가 있는 것.
해겸에게 자유는 바깥이었다.
붙들린 이름과 좌표와 관리 번호에서 빠져나가는 것.
둘은 같은 문 앞에 섰고, 각자의 언어로 그것을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서이언은 그것을 의미 없는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했다.
해겸은 그것을 해방이라고 믿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렇게 믿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서이언을 가장 오래 붙든 것은 그 믿음의 옳고 그름이 아니었다.
죽으러 들어가는 소년의 얼굴이 아니라, 처음으로 도착한 사람의 얼굴처럼 보였다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은 설명되지 않았다.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더 오래 남았다.
도시는 그날도 불을 순서대로 켰다.
동쪽 외곽 수처리장, 북부 물류허브, 중앙통제청, 고가철도, 정화구역 분수대.
빛들은 제시간에 들어왔고, 창문들은 제 자리를 지켰다.
서이언은 그 안에 앉아 있었다.
그가 믿는 자유는 여전히 사각형의 프레임 안에 있었다.
그러나 아주 깊은 곳, 아직 문장으로 정리되지 않은 자리에는 가느다란 실금 하나가 남아 있었다.
닫힌 줄 알았던 세계 안쪽에, 누군가 끝내 다른 이름을 남기고 사라졌다는 사실의 실금.
그는 그것을 보고서에 적지 않았다.
보고서에는 적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다음 주, 다음 달, 그다음 계절에도 그는 계속 균열을 닫을 것이다. 같은 장갑을 끼고, 같은 각도로 결속핀을 박고, 같은 목소리로 대피를 명령할 것이다.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사라질 것이다. 도시는 언제나 그 차액 위에서 유지될 것이다.
그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저녁에는, 사무실 유리창에 비친 자기 얼굴 뒤로 아주 잠깐 다른 방이 겹쳐 보이더라도, 그는 여전히 눈을 감았다 뜰 것이다.
유리를 다시 유리로 만들고, 벽을 다시 벽으로 만들고, 문을 다시 문으로 만들 것이다.
그것이 그의 방식이고 그의 믿음이며, 그가 틀 안에서 겨우 지켜 온 자유의 형태이므로.
반면 해겸은, 이제 어느 보고서에도 더 적히지 않을 그 소년은, 마지막까지 다른 것을 믿었다.
열세 살 이후 한 번도 돌아오지 못했던 한 사람이, 자기 손으로 마지막 문고리를 잡는 순간만큼은 비로소 자기 삶이 자기 것이 된다고.
죽음이 아니라 해방이라고.
추락이 아니라 이탈이라고.
멸망이 아니라, 붙들린 좌표에서의 최종적인 탈주라고.
도시는 그 둘 중 누구의 정의가 옳은지 말해주지 않았다.
도시는 다만 그날 밤도 무너지지 않기 위해 간신히 제 불을 켜고 있었고, 무너지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자신의 정의를 대신하고 있었다.
서이언은 그 불빛 아래에서 펜을 들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음 사건번호를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