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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지층

침식-신뢰

by 윤담

신뢰는 금속에 가깝다.
처음엔 단단하고 반짝이지만,
공기와 맞닿는 순간부터 천천히 산화가 시작된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그 내부에서는 분자의 결이 바뀌고 있다.
그리고 어느 날,
손끝에 닿던 매끄러움이 거칠게 변한다.
그게 신뢰의 침식이다.

우리는 종종 말한다.
“한순간의 배신으로 모든 신뢰가 무너졌다.”
그러나 사실 신뢰는 그렇게 무너지지 않는다.
그건 갑작스러운 붕괴가 아니라
시간과 감정이 함께 부식시키는 과정이다.
한마디의 거짓,
늦은 대답,
작은 망설임이 쌓이고 쌓여
결국 관계의 표면을 갈라놓는다.
그 갈라진 틈 사이로는 언제나
‘침묵’이라는 물이 스며든다.

나는 한때 무조건 믿는 사람이었다.
그건 순진함이 아니라,
믿음이 세상을 움직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믿음은 결심이 아니라 유지였다.
유지에는 에너지가 필요했고,
그 에너지는 결국 사람을 닳게 했다.
나는 그걸 너무 늦게 알았다.

사람은 모두 다른 방식으로 신뢰를 닳게 만든다.
어떤 이는 거짓말로,
어떤 이는 무관심으로,
어떤 이는 침묵으로.
가장 조용한 방식이 가장 잔혹하다.
의심은 대화로 풀리지만,
무관심은 아무 말도 남기지 않는다.
그때부터 신뢰는 산소를 잃은 금속처럼,
표면은 멀쩡하지만 속부터 녹슬기 시작한다.

회사에서, 교회에서, 가족 사이에서도
신뢰는 화폐처럼 거래된다.
서로의 선의를 저울질하며,
조금 더, 혹은 조금 덜 믿는다.
“괜찮아요”라는 말은 위로가 아니라
거래의 서명처럼 들릴 때가 있다.
그런 말들이 오갈수록
신뢰의 무게는 가벼워진다.
신뢰는 결코 쌓이지 않는다.
그건 사용될 때마다 닳아 없어지는 자원이다.
우리는 그것을 소비하면서,
다시 채워 넣는 법을 배워야 했다.

가끔 나는 묻는다.
신뢰는 정말 회복될 수 있을까.
경험상, 아니다.
신뢰는 한 번 손상되면
다시 원래의 광택을 찾지 못한다.
그 대신, 다른 결로 재퇴적된다.
그 틈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그 빛은 이전보다 약하지만,
더 현실적이다.
그건 맹목의 빛이 아니라
이해의 빛,
즉 상대의 불완전함까지 포함한 온도다.
그 온기야말로 진짜 신뢰의 시작이었다.

어느 날, 오래된 친구를 만났다.
우리는 오랜 시간 연락이 끊겼다가
우연히 같은 카페에서 마주쳤다.
그는 내 이름을 불렀고,
나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그 잠깐의 침묵 속에서
과거의 수많은 감정이 스쳐갔다.
그와의 오해,
그가 떠난 날의 공기,
그 이후 내가 쌓은 무수한 변명들.
그러나 그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지?”
그 한마디에 나는 알았다.
신뢰의 침식은 끝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회복이라는 걸.
그건 이전의 친밀함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부식된 면을 알아본 뒤에도
여전히 인사할 수 있는 거리로 돌아오는 일이었다.

신뢰가 닳아 사라진 자리에는
항상 ‘관찰’이 남는다.
우리는 그때부터 상대를 믿지 않고, 관찰한다.
그의 눈빛, 말투, 숨소리.
관찰은 불신의 기술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이해다.
믿음이 실패한 자리에서
관찰은 인간의 마지막 윤리가 된다.
그 윤리는 차갑지만 정직하다.

이제 나는 누군가를 믿을 때,
그의 완전함이 아니라
그의 모순을 먼저 본다.
그 모순을 견딜 수 있을 때,
비로소 믿음이 시작된다.
신뢰는 이상적인 상태가 아니라
결함을 포함한 평형이다.

세상은 점점 더 불신의 시대라 불린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신뢰의 형태를 재조정하고 있을 뿐이다.
과거엔 맹목이었다면,
이제는 서로의 결함을 포함한
느린 믿음으로 바뀌고 있다.
그건 냉소가 아니라 진화다.

신뢰의 침식은 인간의 실패가 아니라
인간이 여전히 관계를 배우고 있다는 증거다.
우리는 배신을 겪으며
신뢰의 밀도를 바꾼다.
그 밀도가 쌓여
하나의 윤리적 지층이 된다.
그 지층은 말하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 기록된다.
“여기, 인간이 서로를 견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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