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식-무너진 것들의 공통점
무너진 것들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형태를 잃지만, 그 자리엔 빛이 남는다.
그 빛은 화려하지 않다.
오히려 흐릿하고, 손끝으로 더듬어야만 느껴지는 정도의 온도다.
나는 그 미세한 빛을 회복이라 부른다.
회복은 돌연히 찾아오지 않는다.
그건 오래된 부식의 끝에서,
남은 파편들이 서로를 향해 다시 맞물리는 순간에만 나타난다.
부서진 유리처럼 흩어져 있던 기억들이
어느 날 햇빛을 받아
한 조각의 색으로 되돌아올 때
그 느린 반짝임이 바로 인간의 회복이다.
시간은 우리를 닳게 만들었다.
신뢰는 우리 사이를 깎아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모든 상실을 겪은 후에야
우리는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
마치 바다의 돌처럼,
날카로움이 모두 닳아 없어지고
손바닥에 얹어도 다치지 않는 결로 변했다.
그 부드러움이야말로,
회복의 표면이다.
나는 오랫동안 회복을 ‘회귀’로 착각했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일,
혹은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틀렸다.
회복은 복원이 아니라 변형의 수용이다.
한 번 부식된 철은 다시 예전의 광택을 가지지 않는다.
그 대신, 산화된 표면이 새로운 색을 만든다.
회복은 그 색을 받아들이는 기술이다.
나는 가끔 사람들을 본다.
버스를 기다리는 노인,
휴대폰을 내려놓은 젊은 부부,
놀이터에서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들.
그들의 표정엔 피로와 평화가 동시에 깃들어 있다.
그건 오래된 상처 위에 자란 피부 같다.
아물었지만, 그 아래엔 여전히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이야말로,
인간이 다시 세상과 연결되는 지점이다.
회복은 잊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견디는 일이다.
모든 인간은 결국,
자신의 결핍을 통해 타인과 연결된다.
완전함은 고립을 낳지만,
불완전함은 공명을 낳는다.
우리는 서로의 틈새를 알아볼 때
비로소 가까워진다.
그 틈 사이로 스며드는 공기가 관계의 숨결이 되고,
그 공기가 조금 따뜻할 때,
사람은 살아 있다고 느낀다.
신뢰가 닳고, 사랑이 침식되어도
우리가 다시 손을 내밀 수 있는 건
그 틈 때문이다.
상처는 관계의 흠이 아니라,
새로운 연결의 접착면이다.
회복은 그 면적을 넓혀가는 일이다.
나는 언젠가 바닷가의 절벽에서
오래된 암석을 본 적이 있다.
수백만 년의 침식 끝에 드러난 단면에는
모래, 조개껍질, 화산재, 그리고 무수한 시간의 층이 겹쳐 있었다.
그것들은 각기 다른 시대의 흔적이었지만,
지금은 한 몸으로 붙어 있었다.
나는 그 표면을 손으로 쓸며 느꼈다.
회복이란 어쩌면 이런 것 아닐까.
무너진 층들이 서로를 감싸며
새로운 결합을 이루는 일.
그 결합은 완전하지 않지만,
그 불완전함이야말로 생명적이다.
회복의 단면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건 인간의 내부에서,
천천히 다시 쌓이는 빛의 층위다.
그 빛은 때로 기억의 반사로 나타나고,
때로는 용서라는 이름으로 변한다.
용서는 사건의 끝이 아니라,
삶이 다시 시작되는 문턱이다.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은,
사실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침식을 멈추기 위해서 하는 일이다.
그렇게 인간은 자신을 되살린다.
지금의 나는 더 이상 회복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건 오지 않는 손님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조용한 생명체다.
그 생명은 매일 조금씩 나를 다듬고,
내 안의 어둠을 더 견고한 색으로 변환한다.
그 변환이 느리더라도,
나는 이제 그것을 믿는다.
회복은 도착이 아니라,
지속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침식시킨 흔적 위에
신뢰가 다시 퇴적되고,
그 위에 사랑이 엷게 스민다.
그 모든 층이 인간의 역사다.
우리는 그 표면을 걸으며,
누군가의 빛을 잠시 밟고 지나간다.
그 발자국이 덧입혀지며
또 다른 인간의 결이 만들어진다.
이것이 삶이다.
닳고, 부서지고, 그러나 여전히 남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