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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지층

침식의 침식-존재와 심연

by 윤담

모든 침식에는 끝이 있다.

그러나 끝이 도달한 자리엔 언제나 또 다른 침식이 시작된다.

표면이 무너진 다음엔, 내면이 깎인다.

그것이 바로 존재의 침식이다.

나는 그 느린 붕괴를 오랫동안 지켜봤다.

사람들, 관계, 신념, 그리고 나 자신.

겉은 이미 다 닳았는데, 안쪽은 아직 모양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그 안쪽마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삶은 단단함으로 유지되는 게 아니라,

무너짐을 감내하는 힘으로 지속된다는 것을.


인간의 존재는 늘 지층처럼 쌓여간다.

언어, 기억, 신념, 직업, 사랑.

모두 퇴적되어 한 사람의 형태를 만든다.

그러나 그 구조는 결코 안정되지 않는다.

시간은 바람처럼, 믿음은 물처럼

조금씩 그 표면을 깎아내린다.

우리는 그 침식의 과정을 ‘성장’이라 부르지만,

사실 그것은 서서히 사라지는 일에 더 가깝다.

삶은 확장이라기보다,

조용히 줄어드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나는 오랫동안 “왜 살아야 하는가”를 물었다.

젊을 때의 질문은 철학 같았고,

나이가 들수록 그건 생존의 호흡에 가까워졌다.

삶의 이유를 찾는 일은

결국 존재의 바닥을 향해 내려가는 일이다.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 깨닫게 된다.

그 바닥은 생각보다 깊지 않다.

오히려 얕고, 따뜻하다.

심연은 추락의 공간이 아니라,

존재가 자기 자신을 다시 만나는 자리였다.


나는 한 번 완전히 침묵 속으로 떨어진 적이 있다.

모든 소리가 꺼진 밤,

누군가의 이름조차 부를 수 없는 순간.

그곳은 무섭지 않았다.

그저 낯설었다.

말이 사라지면, 마음이 오히려 또렷해진다.

심연의 중심에는 무(無)가 있다.

그러나 그 무는 공허가 아니라,

모든 가능성이 눌려 있는 ‘밀도’였다.

그 밀도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느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이유가 아니라 상태라는 것을.

존재는 목적이 아니라 현상이며,

그 현상이 지속되는 동안

우리는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삶이란 단어를 오래 바라보면,

그 끝에는 언제나 “견딤”이 있다.

시간의 풍화 속에서 남는 것은

화려한 의미가 아니라, 작은 지속성이다.

밥을 짓고, 문을 열고,

누군가의 이름을 기억하는 일.

그 모든 행위가 거대한 형이상학보다

더 진실하게 존재를 증명한다.

우리가 ‘사는 이유’는

삶을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계속하기 위해서다.


어느 날, 바닷가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파도와 하얀 포말이 교차하고,

깎인 바위는 무심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수천 년 동안, 바다는 그 벽을 깎고 있었다.

나는 그 장면이 사람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삶이란 결국 스스로를 깎아내며

조금씩 모양을 찾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 깎임의 결과로만 우리는 자신을 알게 된다.

완벽한 인간은 없다.

단지, 더 오래 깎인 인간이 있을 뿐이다.


어느 철학자는 말했다.

“인간은 스스로를 닳게 하는 존재다.”

그 말의 의미를 이제는 조금 안다.

닳는다는 것은 버림이 아니라 기억의 다른 형태다.

모난 부분이 닳을 때,

우리는 타인을 받아들일 수 있는 면을 얻는다.

닳은 표면에는 온기가 스민다.

그 온기가 관계를, 신뢰를, 사랑을 다시 잇는다.

결국 인간은 침식된 형태로서만 사랑할 수 있다.


심연은 더 이상 나를 두렵게 하지 않는다.

그곳엔 그림자 대신 울림이 있다.

어둠은 존재의 부재가 아니라,

빛이 잠시 머무는 또 다른 장소다.

나는 이제 안다.

삶의 끝에는 공허가 있는 게 아니라,

아직 남은 진동이 있다.

그 진동이 이어지는 한,

인간은 다시 일어선다.


삶의 이유를 묻는 대신,

나는 이제 이렇게 중얼거린다.

“나는 아직 닳지 않았다.”

그 말은 희망이 아니라 자각이다.

내 안의 심연은 여전히 살아 있고,

그 심연이 나를 지탱한다.

침식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무너짐이 아니라,

존재의 단면 속에 남은 온기였다.

우리는 무너져도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조금 더 투명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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