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지층 II
이민 이야기는 어느 날 아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건 처음엔 물방울 같았다.
가볍고, 잠시 떠다니다가, 어느 순간 공기 속에서 응결되었다.
“이 나라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게 맞을까.”
그 한 문장이 방 안의 습도를 바꿔놓았다.
그날의 공기는 무겁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하게 맑았다.
불안은 언제나 맑은 공기를 닮아 있다.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 깊이 흔들린다.
그녀는 오래된 식탁에 앉아 있었다.
커피는 식었고, 아이들의 장난감이 발치에 흩어져 있었다.
그 사이를 빛이 건드리고 있었다.
그 빛은 낡은 나무 위에 둥근 얼룩을 만들었다.
삶이란 결국, 이런 얼룩을 지우지 않고 품는 일일지도 몰랐다.
“이민을 간다고 세상이 달라질까?”
내가 물었지만,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커튼을 걷고, 하늘을 바라봤다.
창문에 맺힌 습기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 빛 속에 먼지들이 춤추고 있었다.
그건 마치, 이곳의 공기가 마지막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듯한 장면이었다.
삶이란 결국, 응결의 연속이다.
한 사람의 선택, 한 가족의 이주, 한 시대의 침묵까지
모두 공기 속에 머물다, 일정한 온도에서 맺힌다.
그것은 감정의 물리학이다.
사랑이 식고, 믿음이 흔들리고, 언어가 낯설어질 때조차
인간은 여전히 서로의 체온으로 돌아가려 한다.
이주란, 그 회귀의 또 다른 형태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우리가 떠나는 이유는 미래 때문이 아니라,
현재의 밀도를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이곳의 공기는 너무 촘촘하고,
우리의 말은 그 안에서 자주 막혔다.
언어의 벽보다 먼저 찾아온 건,
말하지 못한 마음의 벽이었다.
아내는 밤마다 지도를 폈다.
화면 속에는 다른 나라의 하늘이 있었다.
그곳은 더 파랗고, 덜 혼탁해 보였다.
“이곳보다 나을까?”
그녀가 중얼거렸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그래야겠지’라는 동의가 아니라
‘그럴 수도 있겠지’라는 체념에 가까웠다.
그날 밤, 아이들이 잠들고 나서 우리는 창문을 열었다.
도시의 불빛이 아래로 번졌다.
바람이 지나갔고, 유리창 위로 한 줄의 물길이 생겼다.
그 물길은 나뭇잎 하나를 닮았다.
나는 그것을 오래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이민이란, 물이 다른 곳으로 스며드는 일일지도 모른다.”
물은 자신이 고여 있던 자리를 떠나지만,
그 자리엔 여전히 습기가 남는다.
그건 완전한 이별이 아니라, 형태의 이동이다.
우리가 떠난다면, 이 집은 또 다른 계절을 맞이하겠지.
누군가 이 바닥의 흠집을 밟고 지나갈 것이고,
아이들의 손길이 닿던 벽은 다른 사람의 그림으로 덮이겠지.
그러나 나는 안다.
벽지 아래, 아주 얇은 층 속엔
우리의 온기가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그건 인간이 남기는 가장 미세한 퇴적물이다.
이민을 생각하며 나는 역설적으로 ‘남음’을 생각했다.
모든 이동의 본질은 사실 ‘남겨짐’에 있다.
사람은 떠나도, 냄새는 남는다.
목소리는 사라져도, 그 파동은 공기 속에 오래 맴돈다.
삶이 응결한다는 건, 바로 그 파동을 붙잡는 일이다.
언젠가 그것이 다시 비로 변해 내리면,
우리는 다른 시간대에서 같은 향기를 맡게 될 것이다.
아내는 여전히 떠날 준비를 한다.
그러나 아직 떠나지 않았다.
그 사이, 우리는 묘하게 평온하다.
그 평온이야말로 응결의 순간이다.
불안과 사랑, 체념과 희망이
같은 온도에서 잠시 머무는 시기.
그 안에서 나는 느낀다.
응결은 떠남이 아니라, 잠시의 멈춤이라는 것을.
삶은 끝내 어디론가 흘러가지만,
그 흐름의 한가운데에서 맺히는 순간이 있다.
그건 단단하지 않지만, 진실하다.
지층이 만들어지고, 침식이 지나가고,
이제는 응결이 우리를 붙잡는다.
이민이든, 잔류든, 결국 인간은
머무는 방식으로 존재를 증명한다.
오늘도 창문에 물방울이 맺힌다.
나는 그것을 손끝으로 닦는다.
그러나 곧 다시 맺힌다.
그건 실패가 아니라, 지속의 증거다.
삶이란, 그렇게 계속 맺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