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지층 I
한 시대가 무너질 때, 세상은 잠시 숨을 멈춘다.
『침식의 시대』는 그 침묵을 기록한 책이었다.
모든 것이 닳고 깎여나가던 동안,
인간은 자신을 지탱하던 이유와 질서를 하나씩 잃어갔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없었다.
무너진 잔해 속에는 여전히 공기와 온기,
보이지 않는 입자들이 떠돌고 있었다.
그 입자들은 서로를 기억하듯 천천히 모여들었고,
그때부터 세상은 응결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비가 그친 도시의 공기는 묘하게 무거웠다.
하수구 근처에서는 김이 피어오르고,
젖은 간판은 전류를 놓지 않은 듯 미세하게 깜박였다.
사람들은 허공을 응시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잃어버린 것을 입에 올리진 않았지만,
그 침묵 속에는 되살아남의 미세한 숨결이 섞여 있었다.
무너짐의 시대를 지나온 인간은 단단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투명해진다.
그 투명함은 상처의 반대말이 아니라,
상처가 충분히 식고 난 뒤 머금는 평온의 색이다.
고통의 열기가 식어갈 때,
사람들은 다시 서로를 바라본다.
말보다 눈빛이, 설명보다 숨결이 더 많은 것을 전한다.
그건 복원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의 연결이다.
기억이 응결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은 바람과도 같아서
너무 빠르면 흩어지고, 너무 느리면 눅눅해진다.
적절한 온도에서만 잃어버린 감정이 다시 모인다.
미워하던 마음, 금이 간 신뢰,
이미 식었다고 여겼던 관계들.
그 모든 것은 사라지는 법이 없다.
공기 중을 떠돌다
어느 바람결에 닿는 순간 다시 온도를 얻는다.
그 시기 인간은 잃음과 회복 사이에서
새로운 윤리를 배운다.
사랑은 다시 시작하는 일이 아니라,
흩어진 조각을 인정하고
그 안의 온도를 더듬어 찾는 일이라는 것을.
조각은 닳았지만, 닳은 만큼 빛을 품고 있었다.
겨울 끝자락, 나는 오래된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눈은 이미 녹아 사라지고 습기만 남은 오후였다.
누군가 버리고 간 커피컵에서
얇은 김이 피어올랐다.
김은 금세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작은 물방울 하나가 남았다.
나는 그 물방울을 오래 바라보았다.
모든 응결은 그렇게 조용히 시작된다.
눈에 띄지 않게, 그러나 또렷하게.
무너진 뒤에 남는 것은 ‘의지’가 아니다.
응축되지 못한 감정의 입자들이다.
사람은 그 입자들로 다시 살아간다.
누군가의 눈빛, 오래된 냄새,
낡은 노래 한 소절이
그 입자들을 끌어당겨 새로운 형태를 만든다.
사람이 사는 이유는 의미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시 모이기 위해서다.
응결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은 절망을 믿지 않는다.
절망의 구조를 이미 통과해 본 사람만이 갖는 시선 때문이다.
내면은 여전히 균열투성이지만
그 틈 사이로 스며드는 빛 덕분에
다시 세상을 바라본다.
세상이 조금씩 맑아지는 이유는
사람이 완전해져서가 아니다.
불완전함이 서로를 통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침식은 경계를 만들었고,
응결은 그 경계를 희미하게 지웠다.
이제 인간은 결핍을 통해 이어진다.
채워짐이 아니라, 비워진 자리에서 손을 내민다.
이해하지 않아도, 용서하지 않아도,
서로의 공기 속에서 숨을 쉰다.
그것이 응결의 윤리,
투명하지만 끊어지지 않는 관계의 형태다.
밤이면 도시의 창문마다 불이 켜진다.
각자의 방에서 누군가는 뒤척이고,
누군가는 눈을 뜬 채 하루를 흘려보낸다.
그 불빛들이 공기 속에서 포개지며
어딘가 희미한 빛의 지층을 만든다.
사람들의 체온이 남긴 흔적,
보이지 않는 연결망이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신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사랑이라 부른다.
그러나 본질은 같다.
사라지지 않은 온도.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서로의 공기 속에 이름을 남기는 일이다.
하지만 응결은 되돌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시 모이지 않는 감정도 있고,
더 이상 온도를 회복하지 못하는 관계도 있다.
그럼에도 공기 속의 입자들이 사라지지 않는 까닭은
‘기억의 지층’이 우리의 바닥에서
늘 천천히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지층은 단단한 돌이 아니다.
모래와 물이 섞여 스스로 무너졌다가 다시 쌓이며
형태를 바꾸고 색을 바꾼다.
나는 그 지층의 미세한 움직임에 귀 기울일 때마다
내 안의 낡은 균열들이 서서히 흔들리는 것을 느끼곤 했다.
그 진동은 불안이 아니라
어디선가 나를 향해 다가오는
새로운 관계의 징조 같았다.
기억의 결은 도시에도 번졌다.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이 달라졌다.
낯선 이의 걸음에서도,
지하철 창에 흐릿하게 비친 얼굴에서도,
말로 설명되지 않는 온도의 흔적을 찾는 듯했다.
그들은 묻지 않고, 재촉하지 않고,
그저 서로의 공기를 허락했다.
나는 그것을 응결의 시대가 도착했다는
가장 작은 징후라 생각했다.
어느 밤, 젖은 골목을 걷다
나는 오래 전의 나와 마주친 듯한 기분에 멈춰 섰다.
가로등 아래 돌바닥에 비친 그림자는
예전보다 길고, 얇고, 더 투명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 투명함 속에는
이전보다 깊은 체온이 깃들어 있었다.
그건 아마
무너짐을 통과한 사람만이 품을 수 있는
은근한 온도의 흔적이었을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이해했다.
삶은 복원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서로를 감싸며
조용히 다시 이어지는 것임을.
말하지 않아도 이어지고,
손을 잡지 않아도 온도가 전해지는 방식.
그것이 응결의 시대가 남긴 윤리였다.
삶은 거대한 돌처럼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수없이 부서지고 흩어진 조각들이
다시 모이며 만들어낸
투명한 지층이다.
그 지층은 완전하지 않다.
그러나 그 불완전함 때문으로
빛은 더 멀리 스며들고,
온도는 더 깊게 남는다.
무너진 시대를 지나온 사람들은
완전함을 꿈꾸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아직 흩어지지 않은 빛의 조각들을
천천히, 정직하게 모으며
다음 시대를 살아간다.
그 빛이 늘 미약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미약함이 사람을 사람으로 잇는
가장 오래된 방식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