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지층 III
딸아이가 일기를 썼다.
작은 노트 한쪽, 연필로 꾹꾹 눌러 쓴 글씨.
맨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이상한 아이일까?”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 천천히 갈라졌다.
소리도, 색도 없었지만
그건 분명한 단층이었다.
그날 나는 아이를 혼냈다.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책을 덮지 않았다거나,
장난이 지나쳤다거나,
그런 사소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의 내 목소리는
오래된 지층이 무너지는 소리처럼 거칠었다.
나는 자주 생각한다.
사람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이에게
가장 불투명해진다고.
사랑이 깊을수록 가려야 할 것도 많아진다.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상처 주고 싶지 않아서,
결국은 솔직하지 못하게 된다.
그날의 나는 아버지가 아니라,
불안으로 응고된 하나의 벽이었다.
아이의 일기는 그 벽을 통과했다.
짧은 문장 한 줄이
내 마음의 어두운 층을 꿰뚫었다.
나는 그 문장을 오래 바라봤다.
그건 질문이었지만, 동시에 선언이었다.
‘나는 나로 살아도 되나요?’
그 말이 그 안에 숨어 있었다.
밤이 되자 아이는 잠들었다.
나는 거실 불을 끄고 혼자 앉았다.
책상 위의 일기장이 희미하게 빛났다.
그 빛이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제 네가 대답할 차례야.’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니, 넌 이상하지 않아.
너는 너무 투명해서 아픈 거야.”
세상은 불투명한 것들로 가득하다.
눈치, 규칙, 타인의 시선,
그리고 어른이 되며 배운 억제의 언어들.
그 속에서 아이의 투명함은 쉽게 다친다.
그러나 바로 그 투명함이야말로
이 세계를 다시 비추는 첫 번째 빛이다.
그날 이후 나는 아이를 다르게 본다.
그녀는 말보다 먼저 감정을 느끼고,
침묵보다 빨리 세상을 관찰한다.
그건 이상한 게 아니라,
가장 인간적인 감각이다.
아이의 눈에는 아직 지층이 형성되지 않았다.
모래처럼 느슨하고,
비가 오면 금세 흔들린다.
그러나 그 느슨함 속에서
세상은 빛난다.
그건 어른이 잃어버린 투명한 결이다.
나는 일기장을 덮으며 생각했다.
우리의 역할은
아이를 단단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그 투명함이 너무 일찍 흐려지지 않게
지켜주는 일이라고.
지층은 시간의 무게로 만들어지지만,
사람의 마음은 그 반대다.
시간이 쌓일수록
우리는 더 투명해져야 한다.
용서와 이해, 슬픔과 사랑이
서로를 통과할 때,
그 사람은 빛을 품게 된다.
나는 여전히 아이를 혼낸다.
그러나 그때마다
‘이건 내 투명함의 시험’이라 중얼거린다.
내 말, 내 표정, 내 침묵이
그녀의 세계를 흐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오늘 아이는 창가에서 그림을 그렸다.
연필로 하늘을 칠하고,
노란색으로 땅을 그렸다.
그 사이에 아주 얇은 흰색 선이 있었다.
나는 물었다.
“이건 뭐야?”
그녀가 대답했다.
“아빠랑 내가 있는 곳이야.”
나는 웃었다.
그 한 줄의 흰색.
그게 바로 투명한 지층,
하늘과 대지 사이의 인간,
그리고 우리가 함께 서 있는 자리였다.
“나는 이상한 아이일까?”
아니다.
넌 세상을 너무 맑게 보고 있을 뿐이야.
그리고 언젠가 너도 알게 되겠지.
투명함이야말로,
이 세상을 버티게 하는
가장 단단한 층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