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지층 IV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은
눈에 보이지 않는 눌림으로 오래 축적된 지층 같았다.
그들은 자신의 하루를 조금씩 접어
자식의 시간 아래에 차곡차곡 밀어 넣었고,
그 여백에서 나의 어린 시절이 자랐다.
그들의 ‘이후’가 언제나 나의 ‘지금’을 떠받쳤다.
아버지는 말을 아끼는 사람이었다.
대신 손이 있었다.
벽을 세우던 손, 밥을 퍼 올리던 손.
그 표면은 늘 거칠었고
작은 굳은살들이 오래된 침전물처럼 자리했다.
감정은 말이 아니라 몸을 통해 흘러나왔고,
책임이 언제나 가장 먼저 도착하곤 했다.
어머니의 하루는 쉼 없이 이동했다.
빨래를 접고, 밥을 짓고,
식탁 위에 이름을 여러 번 올렸다가 내려놓았다.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언제나 조금 모자랐지만
웃음만큼은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
피로의 마디 위에서 흔들리다가도
다시 조용히 제자리를 찾는 빛 같은 것.
그렇게 부모의 지층이 만들어졌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수많은 희생이 눌리고 압착되면서
보이지 않는 기반암처럼 굳어 갔다.
나는 그 위에서 자라났고
지금도 그 기반이 흔들림 없이 나를 떠받치고 있다.
아버지는 예순을 넘겼고
나는 어느새 마흔의 문턱을 지나 있었다.
시간은 늘 뒤편에서 밀어 올려
서로의 그림자를 이어 붙인다.
나는 그의 젊은 날을 닮아가고,
그는 내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웃는다.
세대는 그렇게 서로를 잇는 연속체가 된다.
아버지는 술을 하지 않는다.
대신 가끔 밤늦게 전화를 건다.
“밥은 먹었냐.”
짧은 문장 뒤로 내려앉는 침묵.
그 침묵은 비어 있지 않았다.
천천히 가라앉아
사랑의 형태로 굳어가는 시간이었다.
어머니는 여전히 부엌을 지킨다.
라디오를 들으며 칼질을 하고,
오래된 노래를 작은 목소리로 따라 부른다.
그 음색에는 젊은 날의 그림과
지금의 평온이 동시에 묻어 있었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배웠다.
사람은 자신이 견딘 하루의 방식으로
사랑을 남긴다는 것을.
나는 가끔 그들의 삶을 더듬는다.
그건 기억을 소환하는 일이 아니라
내 안쪽 깊은 곳의 지층을 천천히 탐사하는 일이다.
그들의 희생은 결핍의 기록이 아니라
윤리의 축적이었다.
내려놓음 속에 깃든 단단함,
비움 속에서 느리게 응고된 태도.
그게 세대를 잇는 방식이었다.
지층은 압력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그 압력은
사랑이 다른 얼굴로 머무는 과정이었다.
그들이 밀어 올린 땅 위에서
나는 지금의 나를 세우고 있고,
이제는 내 무게가
다음 세대의 지층을 준비할 차례가 되었다.
어느 날,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괜찮냐.”
짧은 숨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나는 조용히 대답했다.
“괜찮아요.”
그 말은 서로의 마음을 천천히 통과했고
그 순간만으로 문장은 완성되었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의 아래에
지층을 만든다.
아버지의 손, 어머니의 시간,
그리고 아들의 하루.
그 모든 고요한 층들이
세대를 잇는 땅이 된다.
시간이 지나면 그 지층은 조금씩 투명해지고,
투명한 땅 위로
또 다른 생이 천천히 자라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