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노래의말들 167화 후기
책을 좋아합니다만, 좋아하는 만큼 읽지는 못합니다. 늘 언젠가 읽겠다는 마음으로 사고선 쌓아두곤 하지요. 책을 살 당시에는 분명 당장이라도 밤을 새워서 읽을 것 같은 마음입니다만, 정작 택배를 뜯고 새 책 냄새를 한번 들이키고 난 후에는 흥미가 조금 떨어져서 책장에 대충 꼽아둡니다. 냄새에 책의 영혼 비슷한 게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올해 여름도 어김없었죠. '이 책 진짜 사면 바로 읽겠다 -> 바로 구매(구매하면서 몇 권 더 사기) ->냄새 맡고 안 읽기 -> 약간의 죄책감 -> 이 책은 진짜 사면 바로 읽는다' 패턴을 반복하던 중, 실제로 완독한 한 권이 있어 방송에서 나누고 싶어졌습니다.
<슬픔에 이름 붙이기>라는 책인데요. 원래 독서모임에서 읽고 만나기로 했다가, 일정이 안돼서 독서모임은 못 가고 책만 읽게 되었어요. 파란 물감이 파도처럼 일렁이는 표지, '마음의 혼란을 언어의 질서로 꿰매는 감정 사전'이라는 아름다운 부제, 신조어를 만든다는 독특한 컨셉. 모두 이 책의 매력이지만, 이 책의 진짜 매력은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들에 몇 년간 꾸준히 이름을 붙여온 작가의 집요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책에 등장한 단어만 300여 개라고 하니, 만들었지만 책에 싣지 못한 단어는 더 많을 것이고, 만들려고 시도했지만 도무지 그 미묘함을 표현할 길이 없어 포기한 단어는 그보다 많겠지요? 덕분에 책을 읽다 울컥할 때가 있습니다. 신조어로 감정 사전을 만드는 일은 감정이라는 깊고 어두운 동굴을 탐험하는 일일 텐데, '못난 자신의 모습을 만날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하면서 탐험을 지속한 작가의 용기가 느껴져서요. '나도 잘 모르겠는 내 감정'을 말이라는 실에 기대 더듬더듬 찾아 나선 작가 존 케닉, 출판사 소개에 의하면 미네소타에 산다는 존 케닉, 아.. .이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인세 부자 존 케닉에게 한국... 서울시 은평구 독자들을 대표해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Thank U John."
붙잡지 않으면 소실되어버릴 것들을 붙잡아 이름을 붙여주는 일은, 비단 예술가들에게만 위탁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시 이름을 붙여주는 일,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신이 우리에게 준 선물 같은 능력이니까요. 거대한 세상이 마치 법전처럼 느껴질 때가 있잖아요? "이 나이에는 이런 걸 해야 해!, 이 정도는 벌어야지! 너가 지금 그러고 있을 때냐! 소리치는 것 같을 때요.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나의 작은 사전이 되어야 합니다. 쓰여있는 낱말을 비슷한데, 낱말의 해설은 다 다른 80억 개의 사전! 지구가 거대한 도서관이 되어있는 풍경이라니... 세상이 책 냄새로 가득 찰 생각을 하니 신나는군요.
사전이 되어가기로 다짐하는 밤입니다. 세상이 정한 보편적인 뜻이 아니라, 나만의 뜻을 하늘하늘한 종이에 써 내려갈 생각입니다. 얇은 페이지가 한 겹 한 겹 쌓이다 보면 어느샌가 단단해지겠죠. 그러나 딱딱해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전이라고 해서 재미가 없어지는 건 질색이거든요. '뭐야 이 사전은? 방귀의 뜻이 31개나 있어?' 같이 냄새나는 유연함(?)을 갖춘 사전이 되어볼게요. 여러분은 어떤 사전이 되어보실 건가요?
p.s. 방송으로만 끝내기 아쉬워서 후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왜 후기를 쓰니까 아쉬움이 더 남는 것인지... '사람을 닮은 책'을 만들고 싶다는 꿈에 대한 이야기, 표현해 보고 싶었던 미묘한 감정들, 나만의 일의 의미를 찾으려 고민했던 밤들에 대한 얘기는 나중에 해요. 좋은 밤 되세요 :)
[167화 방송 듣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