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우가 신경 쓰지 않게 하기 위해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를 살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 남자가 어느새 자리를 털고 노트와 펜을 챙기며 일어나서 움직이자 나의 마음도 다급해졌다. 참다가 도저히 안되어서 지우에게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고 하고는 들키지 않게 그 남자를 따라서 커피숍을 나섰다. 바로 조금 전에 나갔지만 거리에는 그와 비슷한 사람도 찾을 수 없었다. 그가 흰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기에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런 복장을 한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놓쳤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나는 좀 더 뛰어다니며 찾아볼까 했지만 그냥 포기하고 지우에게 다시 돌아갔다. 지우는 그 사이 울고 있는 우리와 나라를 양손으로 토닥이며 달래고 있었다.
“아이고, 우리 아기들이 이제 잠이 오나 보네.”
“오빠, 이제 집에 가자. 나 다 마셨어.”
“그래, 그러자.”
우리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차에서 잠이 든 아기들을 한 명씩 안아 들고 집에 돌아왔다. 지금은 5월 2일, 화요일. 저녁 9시이다. 아기들이 지금 잠깐 잠이 들고 새벽에 또 사람을 안 재우고 놀 가능성이 있었지만 곤히 자고 있는 아기들을 깨울 수는 없었다. 지우는 간단히 샤워를 하고는 애들 잘 때 조금이라도 같이 자야겠다고 하며 아기들과 같이 누워서 금방 잠에 들었다. 나는 아까 낮부터 저녁때까지 잠을 자서 아직 잠이 오지는 않았다. 그보다 갑자기 좀 전에 커피숍에서 보았던 그 종이에 펜으로 무엇을 쓰던 흰색 반팔 티셔츠의 그 남자가 고야가 말했던 ‘수상한 남자’와 무엇인가 연관되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신경이 쓰였다. 물론 우연일 수도 있고 아무리 시대가 발전을 하였더라도 커피숍에서 펜으로 종이에 무엇인가를 끄적거리는 것이 또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다만 내가 그곳에서 겪었던 경험들이 아직도 너무나 생생하고 잊히지 않아서 다시 그곳으로 가게 될까 봐 만일의 일을 미리 대비를 하고 싶었다. 만약 그 노트에 펜으로 무엇을 적던 남자가 고야가 말했던 것처럼 나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었다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것에 대한 비밀을 밝혀내야 했다. 그래서 나에게 일어났던 일들과 그것이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알아내야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아마 죽을 때까지 편하게 잠이 드는 일은 이제 어려울지도 몰랐다. 지금도 지우와 아이들이 자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잠이 들면 내일은 또 그곳에서 눈을 뜰까 두려움이 스멀스멀 속에서부터 피어올랐다. 어떤 이유로 그런 일을 경험하였는지 알지 못한다면 이러한 두려움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지우와 아이들이 자고 있는 집에서 나와 다시 그 커피숍을 향해 차를 타고 움직였다.
다행히 커피숍은 문을 닫지 않고 있었다. 24시간 운영하는 곳이 예전보다 많이 흔해지긴 하였지만 아직도 밤 10시가 되면 문을 닫는 곳도 많았기에 닫혀있으면 내일 다시 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환한 불빛이 가득한 커피숍에 들어가 이번에는 달달한 바닐라라테를 한잔 시키고는 커피가 나올 때까지 근처 의자에 앉아서 아까 그 남자가 있었던 자리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 사람이 다시 올까? 언제나 올까? 다시 못 보면 어떡하지? 아까 그냥 무턱대고 가서 물어볼 것을 그랬나? 나에게 무엇인가를 알려주고 싶다면 어떻게든 다시 나타나겠지?
나는 대기 중인 손님이 없었던지 금방 나온 커피를 가지고 이번에는 아까 지우와 앉았던 자리로 가서 커피를 홀짝였다. 씁쓸한 아메리카노만 자주 마시는데 가끔씩 이렇게 스트레스가 순간적으로 쌓인 날에는 달달한 커피도 꽤 괜찮은 선택이었다. 오늘은 아주 좋은 선택이었다고 스스로를 칭찬하며 뜨거운 바닐라라테를 절반이나 열심히 호호 불며 마셨다. 바로 그때, 아까 흰 티셔츠의 그 남자가 조용히 나타나 나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말을 걸어왔다.
“이기남 씨 되시죠?”
“..."
“아, 놀라셨겠네요. 사실, 여기서 이렇게 말씀드릴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은 저도 잘 알지만 기남 씨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아셔야 될 일인 것 같아서 이렇게 다시 찾아왔습니다.”
“저기, 누구신지?”
“네, 저는 기남 씨가 겪은 그 사고에 대해서 사과를 하고 설명을 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나는 드디어 올 것이 왔음을 느꼈다.
"사실 이곳보다 좀 더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원칙이긴 하지만 뭐, 우리말에 귀 기울일 사람도 없는 것 같고 상황이 급해서 어쩔 수가 없네요."
"당신 정체가 뭐야?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나는 내가 겪은 그 '이상한 곳에서의 일들'이 이 사람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았다. 나의 질문을 받은 그는 모자를 벗어 짧은 머리지만 다시 쓸어 올린 후 이번에는 똑바로 쓰면서 잠시 숨을 고르는 듯하고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너무 놀라지 마시고 들어주세요. 사실 당신은 저희들이 쓰는 이야기 속 인물입니다. 그러니까.."
"뭐라고?"
나는 이제 더 이상 놀라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였지만 남자의 말에 결국 곧바로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나의 그런 반응도 예상했다는 듯이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럼요. 저도 기남 씨가 많이 놀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셔야 제가 하려는 말을 이해하실 수 있을 거예요. 저희는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씁니다. 기남 씨도 그중에 한 명에 지나지 않죠. 이 세상과 역사와 문화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분', 줄여서 '노네임'이 세팅하신 것을 저와 같은 작가들이 그 세계관을 빌려와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살아가도록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저희는 노트에 펜으로 기록을 하여 큰 흐름을 설정하고 세세한 부분이나 스토리에 나오지 않는 부분은 자유의지를 부여한 노네임, 곧 퍼스트맨이 설정하신 값에 따라서 이야기 속 인물들이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여 결정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가끔 게으른 작가들은 시스템을 돌려 랜덤으로 인물을 만들고 이름을 부여하며 그다음 그 인물의 삶도 최초의 설정에 따라 자유의지만으로 살아가도록 무분별하게 찍어내듯 짓는 일도 있기는 합니다. 그래도 모름지기 작가라면 자신이 만든 인물이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이야기를 쓰고 싶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해피엔딩을 지향하는 작가들을 해피맨(happy man)이라 부르고 슬픈 엔딩을 좋아하는 작가들은 새드맨(sad man), 간혹 고통과 비극적인 결말만을 좋아하는 작가는 배드맨(bad man)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당연히 배드맨이 의도적으로 이야기 속 인물을 괴롭히는 것은 저희 세계에서도 불법적으로 여기는 행위들이라 겉으로는 해피엔딩을 쓰는 것처럼 하면서 뒤에서는 몰래 배드 엔딩을 쓰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것을 발견하는 감찰자들은 그 노트를 압수하고 해피맨들에게 그 노트를 넘겨서 다시금 정상적인 이야기로 이어지도록 도와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감찰자에게 잡힌 배드맨은 자신이 인물들을 괴롭게 한 시간만큼 한동안 펜을 못 잡는 징계의 방에 들어가게 됩니다."
"저기 말씀 중에 미안한데요. 어디 아프세요? 저한테 오셔서 왜 이런 황당한 말을 하시는 거죠?"
나는 듣다 듣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말들을 하는 이 남자가 너무나 미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마도 미친 사람이라고 치부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나의 말을 들은 그 남자는 잠시 인상을 살짝 쓰다가 그런 자신에게 놀랐다는 듯이 급하게 표정을 바꾸고 다시 말을 이었다.
"믿기 힘들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135일 간 그 아무도 없는 서울은 꿈이 아니었다는 사실, 본인이 더 잘 아시잖아요? 많이 힘드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의 불찰입니다."
"우리의 불찰? 당신이 나를 그런 미친 세상에 보낸 거야? 어? 똑바로 사실대로 말해야 될 거야. 안 그러면 바로 이 자리에서 죽여버리는 수가 있으니까!"
나는 원인도 모르고 당했던 그 외로웠던 시간들이 억울하고 화가 나서 너무나 미쳐버릴 것 같은 심정이 되어 앞에 있는 남자에게 협박을 하였다. 하지만 나의 분노를 받는 그는 이제 웃는 얼굴도 지우고 무표정한 상태로 더 냉정히 말할 뿐이었다.
"팩트는 이겁니다. 이기남 씨의 이야기를 쓰던 작가는 해피맨이었어요. 그런데 기남 씨의 이야기가 적히던 노트를 누군가 중간에 훔쳤습니다. 그 사람은 아직 잡히지 않았어요. 하지만 징계가 두려웠던 기남 씨의 원작자는 그 사실을 지금까지 숨겼던 겁니다. 다행히 며칠 전에 양심 고백을 했지만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나버렸고 그래서 우리는 긴급대책반을 움직여 기남 씨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퍼스트 맨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분에게는 모든 노트에도 영향을 주는 글을 적을 수 있는 특별한 노트가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분이 기남 씨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게 하였지만 이곳에서 있을 수 있는 시간은 3일뿐입니다. 내일 밤이 지나도 훔쳐간 원본을 찾지 못한다면 기남 씨가 괴로웠던 그곳으로 언제든지 갈 수도 있는 상태입니다. 물론 남의 노트를 훔쳐서 이런 못된 장난을 치는 사람은 배드맨일 거라 특정하고 전과가 있는 배드맨들을 상대로 조사를 진행 중에 있으니 시일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조만간 잡을 수는 있을 겁니다. 그래도 우리의 규칙상 이러한 사고로 일어난 일이 이야기 속 인물에게 인지가 될 정도로 크게 일어났다면 찾아가 양해를 구하고 설명을 드리는 것이 우리 모두를 만든 퍼스트맨의 세팅 값이기에 그렇습니다. 설명이 먼저 나간 것 같아서 미안하군요. 저는 긴급사고처리반 팀장인 해피맨 '피터'라고 합니다. 모든 작가들을 대표해서 사과합니다. 큰 불행을 당하게 하여서 정말 죄송합니다."
갑자기 일어나 허리를 숙이니 커피머신을 닦고 있던 바리스타마저 관심 없던 이쪽을 쳐다보았다. 멀리서 어린 커플이 수군거리며 우리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했다. 그때, 잠에서 깨어 나를 찾는 지우가 전화를 걸어와 벨소리가 울렸다.
"저기, 일단 알았으니까 앉아 보세요. 잠시만 통화 좀 하고 올게요."
"그러시죠."
나는 얼른 커피숍을 나가서 지우의 전화를 받았다.
"어, 지우야."
"뭐야? 어디야?"
"아, 내가 갑자기 육아휴직을 내니까 친구들이 놀랐는지 연락이 왔더라고. 그래서 잠시 차 한잔하고 있었어."
이제는 선의의 거짓말이지만 예전처럼 아직도 자연스럽게 나오기는 했다.
"아~ 난 오빠가 또 술 마시러 나갔나 했지. 그럼 언제 들어와?"
"술은 무슨. 차 한잔 하는 건데 이제 곧 들어가야지. 30분 내로 갈게, 애들은 일어났어?"
"아니, 아마 새벽 2시나 되면 깨서 놀겠지. 그럼 나는 좀 더 자고 있을게. 들어오면 깨워줘."
"알았어. 걱정 말고 자고 있어. 마무리하고 금방 들어갈게."
"응. 조심히 와."
"오케이~"
통화가 끝나고 다시 커피숍으로 들어가니 스스로를 '피터'라고 소개한 그 남자는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조금 더 기다리다가 오늘은 오지 않을 것 같아서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와서 여전히 잠에 든 가족들을 확인한 후에 내 방으로 들어가 책상 앞에 앉아서 가만히 생각을 하였다.
내가 작가들의 이야기 속의 인물일 뿐이라니... 정말 믿기 힘든 말이었다. 팔을 꼬집어 보면 이렇게 아픈데 어떻게 펜에 적힌 노트 속의 허구가 될 수 있을까. 135일 간 괴로웠던 그곳에서는 어떻게든 진실을 알고 싶었는데 지금 그 진실을 막상 마주하자 오히려 더욱 혼란스러워 마음이 복잡해지기만 했다. 차라리 내가 지금 정신질환에 걸린 나머지 과대망상적인 증상으로 이러한 일을 겪고 있는 거라면 좋겠다. 그러면 치료에 전념하기라도 할 텐데 이것은 분명 꿈이나 망상적인 환각이 아니었다.
나는 그날 새벽에 어김없이 일어나 노는 아이들을 보면서 지우가 깨지 않고 계속 자도록 했다. 아침이 되어 잠든 아이들을 보며 지우가 일어나 놀라서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라고 하였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그저 어제 그 남자를 다시 만나기 위해 그 커피숍으로 갈 생각만 가득했다. 지우에게는 회사에 한번 가서 그래도 예의적으로 인사를 드리고 와야 할 것 같다고 둘러댔다. 지우가 여전히 조금이라도 자고 가라고 하였지만 어제 그 남자를 다시 만나서 일의 진실을 다 듣기 전에는 영원히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기 때문에 간단히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집을 나섰다.
어제 그 커피숍에는 혹시나 했지만 그 '피터'라는 남자가 없었으며 한 시간 정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그를 만날 수 있을지 고민을 하며 있는데 내가 나가려고 생각하는 순간 문을 열고 어떤 여자가 걸어 들어왔다. 검은색 트렌치코트에 단발로 펌을 한 검은 머리는 윤기가 흘러 고급스럽게 어울렸다. 검은색 선글라스까지 올 블랙 콘셉트인데도 자연스러웠다. 그 여자는 커피 가게 안에 있는 몇 안 되는 손님들의 시선을 순간적으로 다 사로잡을 만큼 얼굴도 괜찮아 보였다. 물론 선글라스를 벗어야 더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겠지만 풍기는 분위기와 새하얀 피부톤과 오뚝 솟은 코와 균형 잡힌 입매는 상당히 미인일 것 같은 예감이 들도록 호기심을 자아냈다. 점점 다가올수록 분명히 들려오는 '또각또각' 구두 소리에 시선을 아래로 옮기니 올 블랙의 코디에서 구두만이 높은 하이힐의 빨간색이어서 더 자극적으로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얼굴에서도 새빨간 립스틱을 바른 입술이 이제야 아래의 빨간 구두와 함께 위아래로 온통 검은 세상에서 균형을 이루어 주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일순간 장내가 조용해졌는데 그녀가 나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을 때는 어떤 의미에서인지는 몰라도 조금의 탄성마저 들려왔다. 나도 조용히 벌어져 있던 입을 다물고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예의 주시하였다.
"기남 씨, 어제 피터에게 이야기는 들었어요. 요즘 그가 일이 많아서 그런지 제대로 된 설명도 전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고요. 그래서 제가 왔어요. 저는 일레븐이라고 해요. 피터의 직속상관이죠. 우리 자세한 이야기는 여기보다 다른 곳에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어쩌시겠어요?"
이 여자도 분명 어제 그 남자와 같이 정신 나간 소리를 할 것이 분명해 보였지만 그래도 좀 더 명확한 진실을 말해 줄 것처럼 똑똑해 보여서 희망을 가졌다.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를 주고받기에는 이곳은 역시 적절한 장소가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자리를 옮길 것에 동의를 표했고 그녀가 곧 일어나서 움직이자 나도 그녀를 따라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피터가 나쁜 사람은 아닌데 이번에 팀장으로 승진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의욕만 높아요. 그래서 매뉴얼을 제대로 숙지도 하지 않은 채 기남 씨에게 찾아갔던 것이죠. 우리는 사실 당사자와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노출시킬 수 없는데 어제처럼 공공장소에서 그렇게 떠들어 댄 건 상부에서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어요. 우리는 피터가 좀 더 똑똑한 사람인 줄 알았거든요. 아마도 세팅 값에 문제가 생긴 것인지도 몰라요. 퍼스트맨이 주기적으로 보완을 하고 고쳐야 할 부분을 수정하고는 있다고 하지만 역시나 모든 인물에게 완전한 자율성을 주는 것이 맞는지는 저도 아직 확신이 없어요. 저는 사실 캐릭터의 설정에 작가들이 많이 개입할수록 인물의 완성도가 더욱 높아진다고 믿거든요. 하지만 퍼스트맨이 최초로 우리 작가들을 만들면서 설정한 세팅에서 자유의지에 대해서 만큼은 자기 자신을 포함한 그 어떤 인물도 건드릴 수 없도록 못을 박아버려서 그 부분이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문제예요. 한마디로 그 문제로 지금도 아쉬워하고 있는 저도 바보라는 이야기죠."
나는 일레븐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또 들으며 묵묵히 그녀를 따라 걸었다. 그녀는 쉬지도 않고 계속 무언가 떠들어댔는데 가까이 따라붙어 들으면 간신히 들릴 정도의 소리라 은근히 집중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사람들 틈 속에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으며 말하는 그녀의 소리를 듣기 위해 재빨리 걸어야 했고 또 귀를 기울여 그 내용에 집중해야 했지만 막상 들어도 솔직히 어떤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정확히 알아챌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