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우리 같이 학교 다니던 때로. 그때는 최소한 이런 고민은 안 했을 텐데."
하나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가,
"하나야."
"응?"
"기억 안 나? 너 2년 동안 음악과 선배 짝사랑했잖아. 복도에서 마주치면 내 뒤에 숨고, 매일 나만 보면 그 선배 얘기만 했어."
"그게 언제 적 얘기인데?"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그때, 아주 볼만했어 김하나. 선배 졸업식 때 하루 종일 울어서 눈이 오징어 됬었잖아. 결국 고백 한 번 못해봤다고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
그녀가 옛 생각이 나는지 입꼬리가 삐죽삐죽 올라가며,
"야! 그건 그 선배 때문이 아니고, 내가 고3이 되니까 그랬던 거지. 성적은 안 오르는데, 입시는 다가오니깐."
"뻥치지 마. 그래서 내가 그 날, 너 기분 풀어준다고 밥 사주고, 노래방 가서 몇 시간을 탬버린 쳐주고, 너네 집까지 데려다줬잖아.
"서예랑. 너 쓸데없이 기억력이 좋다?"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에서 일어나 커튼을 활짝 열었다.
"너만 그런 거 아니야. 나도 그랬고, 아마 다들 그럴 거야. 누구나 사랑에 빠지면 바보가 된다고 하잖아. 넌 항상 진심이었고, 솔직했어. 그러면 된 거잖아. 난 네가 빨리 잊어버리고 남아있는 찌꺼기를 모두 버렸으면 좋겠어. 그런데, 지금 몇 시니?"
"으....... 출근하기 싫다. 오늘 컨디션 최고야. 나 잠을 못 자서 그런지 손발이 저려. 나 좀 봐봐. 상태 괜찮아 보여?"
"괜찮겠니? 일어나. 이럴 땐 더 움직여야 해."
하도 울어서 퉁퉁 부은 하나의 얼굴을 보다가, 냉동실에서 얼음을 꺼내어 수건에 둘둘 말아주었다.
다리가 저려서 걷지 못하겠다는 하나를 부축하고 힘겹게 스포츠센터에 도착하였는데, 한 손에 얼음수건을 들고 계속 얼굴을 비비던 하나가 점점 크게 웃기 시작하더니 배를 잡고 깔깔댔다.
"아, 너무 웃겨. 생각해보니까 정말 재미있어."
난 그녀의 반응에 손을 올려 이마에 갖다 대었는데,
"너 왜 그래, 무섭게?"
"아니, 그렇잖아. 억울하고 비참한데, 그러면서도 출근하겠다고 바둥대는 내가 너무 웃겨. 어제는 세상이 끝나는 줄 알고, 정말 죽는 줄 알았는데, 하루도 안돼서 이렇게 멀쩡하잖아. 하도 울었더니 이제 눈물도 안 나와. 눈도 안 떠지고. 어떡하냐. 오여사가 날 보면 분명히 한 마디 할 텐데."
"실연당했어?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건물 5층. 출입구로 들어서자, 새로 산 꽃무늬 트레이닝복을 입고 카운터로 나오던 오여사가 하나를 보더니 망설임 없이 묻는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풉' 웃음을 터뜨렸고, 옆에 있던 하나가 속삭이며 '봐, 맞지?'
"무슨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어? 좋은 일이면 나도 같이 알자. 응?"
"아니에요. 사장님. 저희 레슨 준비할게요."
웃음을 참으며 래커룸으로 발을 돌린 하나와 나.
잠시 후, 래커룸에서 옷을 갈아입는데, 잠시 후, 밖에서 웅성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린다. 방 안을 두리번거리던 피티 강사가 들어오며,
"예랑 언니. 누가 찾아왔어. 좀 나와 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밖으로 나가자, 강사들이 원을 그리듯 둘러싸있고, 그 가운데에 장시창이 있었다.
잠시 후, 상담실에 마주 보고 앉아있는 시창과 나. 그리고 그 옆에 오여사.
"사장님이 VIP 회원권 50프로 할인해주신다고 해서, "
오여사를 쳐다보자, 그녀가 맞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거기에 1년 래커룸 무료랑 개인 요가 레슨 포함. 그건 서 선생이 해줬으면 좋겠어."
"제가 왜요? 저 아직 생초짜 초보강사예요."
"서선생하고 친하잖아. 다른 사람보단 편할 거 아냐."
"저요? 저 이 사람하고 안 친해요."
그때, 시창이 내 옆으로 다가와 앉으며 다정스럽게 어깨를 감싼다.
"예랑씨가 요새, 욕구불만인 것 같아요. 예민한데 사장님이 이해 좀 해주세요. 그럼, 전 예랑씨랑 얘기 좀 더 할게요."
"그래요. 그럼 내일부터 또 봐요. 시창씨 안녕"
아쉬워하며 상담실 밖으로 나가는 오여사. 문이 닫히기를 기다리다가. 시창을 쏘아보며
"욕구불만? 그게 여기에서 할 소리예요?"
"또 화내는 것 봐. 내가 보기엔 무경이 형도 그렇고, 예랑씨도 증상이 비슷한데 그게 원인이지 않을까 싶어서. 걱정하지 말아요. 서울에 친구들도 있으니까 내가 조만간 집을 비워줄게요. 잘해봐요."
"시창씨!!"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나를 보며 그가 즐거워하며,
"센터 구경 좀 시켜 줄래요?"
저녁에 무경과 통화를 하다가 시창이 얘기가 나왔다.
"그랬어? 자기가 불편하면 얘기해."
"아니야..... 사장님하고 여기 회원들이 좋아해."
"그래? 그건 그렇고, 하나 씨는 괜찮아?"
"응...... 원래 내색 잘 안 하는데, 많이 힘들어해서. 옆에서 지켜줘야지."
"하나씨가 부러워."
"왜?"
"자기랑 같이 살잖아. 같이 잠들고, 같이 눈뜨고."
"자기는 평소에 참 괜찮은데, 한 번씩 좀 그래. 철이 없어."
"내 매력이지."
"갑자기 졸리네. 자야겠어."
"자기야, 나 다시 글 써보려 해."
"응?"
"그동안 바쁘기도 하고 다른 작가들 신경 쓰느라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요새 들어 스토리가 자꾸 떠올라서. 그래서 다시 시작하려고....."
그는 구상하고 있는 스토리를 들려주었는데,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마치 자장가처럼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모두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위해, 오늘보다 내일을 생각하며, 조금씩 자신의 벽을 허물며 세상 속으로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