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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웃집개구리 Aug 29. 2016

그녀의 '덫' #39

달콤한 꿈

"그런데, 그게 세 번째라면, 마지막 상자는 뭐죠? 거기에 한 개가 더 있었어요."

대화의 끝에 궁금했던 상자에 대해 물었다.
승주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는데,

"모든 상자가 같지는 않아요. 간혹 너무 오래되거나, 변질된 기억들이  있는데, 오히려 기억을  왜곡시킬 수 있기 때문에 열지 않아요.  우린 그것을 '판도라의 상자'라고 부르죠. 열 수는 있지만, 열어서는 안 되는 열쇠."


그렇게 승주와 헤어지고, 나도 모르게 무경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참으려고 했는데, 술을 먹어서인지 오늘따라 그가 더 보고 싶다.


삼십여분을 걸어 그의 집 앞에 도착하여 올려다보니, 텅 비어 있는 듯 집에 불이 꺼져 있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걸까? 아니면 일찍 잠이 들었을까.


옥탑방으로 향하던 계단의 모퉁이에 쪼그려 앉아 그의 집을 올려다보았다.


한참을 찬 바람에 노출되어서인지, 눈이 충혈되고, 코에서 콧물이 나온다.

'으으..... 추워.' 한기를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는데, 자꾸 졸음이 온다.

몇 잔 안 마셨는데.....

며칠 잠을 못 자서인가 보다.


잔뜩 몸을 웅크려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앞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랑씨, 여기서 뭐해요?"


힘겹게 눈을 떠 보니, 시창이 차에서 내려 나에게 다가오고 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해야 하는데, 고개를 까닥할 힘도 없다.

그가 허리를 숙여 내 어깨를 흔든다.


"여기서 잠들면 어떡해요? 괜찮아요? 일어나 봐요."


그러고 싶지만, 두 다리가 얼어붙어 움직일 수가 없다.

 시창이 손을 내밀어 내 이마를 만지더니


"열이 장난 아니네. 예랑씨 정신 차려요!!"


그의 목소리가 내 의식 밖으로 점점 멀어지며, 난 앞으로 고꾸라졌고, 잠시 후, 날 번쩍 안아 올리더니 다급한 그의 발소리가 들렸다.


집으로 들어간 시창이 조심스럽게 날 소파에 내려놓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왜 전화는 안 받는 거야. 아 진짜."


다시 내 이마에 닿는 그의 손.

그가 방으로 들어가 두꺼운 이불을 들고 나왔다.


"몸을 좀 녹이고, 한 숨 푹 자요."


그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몸을 뒤척이며 눈을 떴을 때, 이마 위에 물수건이 손에 잡혔다.

내려다보니, 소파 아래에는 물을 끓이는 전기포터와 면 수건들, 그리고 시창이 몸을 웅크리며 잠이 들어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이불을 덮어주었는데, 몸을 뒤척이던 그가 눈을 떴다.


"잘 잤어요? 몸은 좀 어때요?"

"시창씨가 날 데려온 거예요?"

"예랑씨 어제 많이 아팠어요. 열도 나고 많이 떨고, 그런데 집에 약이 없어서."

"잠깐 정신 좀 차린다는 게 그만...."


시창이 몸을 일으켜 세우며


"형 기다린 거예요? 그 추운데 밤새?"


난 힘없이 그를 바라보았고, 그 모습에 한숨을 내쉬는 시창.


"전화 안 받더라구요. 어제 또 회사에서 밤샜나 봐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난 그의 말을 들으며 창 밖을 내다보았는데 어느새 날이 밝아지고 있다.


"출근해야겠어요. 고마워요 시창씨."

"상태 안 좋으면 꼭 병원 가요."

"그렇게 할게요."


뒤돌아서는 나에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얘기해요. 혼자 고민하지 말고."







센터에서 수업을 하는 내내 오한이 들어 몸을 떨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본 오여사가


"몸 안 좋으면 그만 들어가. 혼자 살면 컨디션 관리를 잘 해야지. 요새 계속 안 좋아 보이던데, 무슨 일 있어? 집에 가서 좀 쉬어."


오여사가 계속 휴식을 권했지만, 난 끝까지 저녁 레슨을 마쳤다.

 

수업이 끝남과 동시에 바닥에 누워 그대로 뻗었는데, 땀을 쏟아서인지, 한기가 몸을 휘감았다.

몸을 추스려 입구로 내려갔는데, 건물 앞에 필상 선배가 서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모습.


"선배! 웬일이에요? 미국 갔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가 다가오더니


"공연 마치고 돌아왔어. 잘 지냈어?"


다정한 눈으로 날 쳐다보는 필상.


"전 똑같죠. 무슨 일 있어요?"

"집에 가는 거지? 데려다줄게. 타."

"아니에요. 버스 타고 가면 돼요."

"너한테 할 말 있어. 같이 가자."


그가 내 손을 잡더니, 차에 태웠고, 잠시 후 홍제동으로 출발했다.


"갑자기 찾아와서 놀랬지? 연락했는데 핸드폰이 꺼져있더라."


어제 여분의 배터리를 챙기지 못해 하루 종일 방전 상태였다.


"무슨 일 있어요?"

"나 정연이랑 선후배 사이로 남기로 했어."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자


"너 때문이 아니야. 신경 쓰지 마. 그 말하려고 온 것도 아니고."

"그럼......"

"이번 뉴욕 공연에서 정연이가 꽤 잘해서 미국 에이전시와 계약하기로 했어. 나한테도 같이 제안이 들어왔는데, 지금은 아닌 것 같아서 거절했어. 국립단에서 아직 할 일도 있고. 아무튼 그래서 단원을 모집하고 있는데, 네가 아직 할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려고."


그의 말이 이해되지 않아 그를 계속 바라보았는데,


"물론, 그냥 들어올 수 있는 건 아니고, 한 달 후에 테스트가 있어. 거기에 네가 통과를 해야 해. 다신 안 할 거면 모르지만, 다시 할 거라면 그래도 내가 있을 때,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서. 공석을 채우는 거라 비공식적으로 인맥 통해서 테스트 진행할 거고. 나도 추천까지 시간이 필요하니까, 잘 생각해 봐. 너무 오래 걸리진 말고."






그의 차가 집 앞에 도착했고, 난 차에서 내려 집 앞에 섰다. 그가 집 주변을 둘러보더니


"여기야? 춥다. 어서 들어가."

"선배도 조심히 가세요."

"그래. 또 보자."


그가 뒤돌아섰고, 난 잠시 머뭇거리다가


"선배."

"응?"

"고마워요. 얘기해줘서."


그가 웃으며


"결정은 네가 해야지. 갈게. 잘 자."


그가 멀어지고,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몸살이 난 데다가 하루 종일 긴장해서일까. 온몸이 노곤해 마치 이불속으로 녹아들어 가는 느낌이다.


깜빡 잠이 들었을까.

멀리서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고, 난 그 소리를 듣다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몸을 뒤척이다가 스르르 눈을 떴다.

얼마나 잠을 잤을까.....

꿈에서 무경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아련하고 그리운 이 느낌은 무엇일까.

이불 밖으로 손을 뻗어 이마를 만져보았다.

열이 내렸는지 숨쉬기가 한결 편해졌고, 땀이 멈추었다.


'따뜻해. 포근하고 넓고 단단한..... 으응?'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옆을 보았는데, 내 옆에 무경이 누워있었다.

두 팔로 날 꼭 끌어안고 잠들어있는 무경.

그 모습에 놀라 몸을 일으켜 세우려다가, 그의 단단한 팔에 눌려 꼼짝할 수 없었고, 난 떨리는 마음으로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길고 짙은 그의 속눈썹과 반짝이는 그의 입술.

가슴이 두근거린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꿈인가?'


믿기지 않아, 그의 볼을 꼬집었는데, 잠시 후


"아파."


그가 천천히 눈을 떴는데, 바다처럼 깊은 그의 눈동자에 난 정신이 아득해졌다.


"무경 씨.....? "

"전화는 왜 안 받아?"


그렇게 듣고 싶었던 그의 목소리.


"계속 문을 두들기다가 안 되겠어서 창문을 뜯었어. 기척은 있는데, 무슨 일 있는 것 같아서. 시창이한테 들었어. 병원은 왜 안 갔어?"


그의 말에 난 목이 잠겨


"꿈인가?"


날 바라보는 그의 눈이 깊어지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꿈이라고 생각해."


그의 입이 내 입술을 덮쳐왔고, 부드럽고 달콤한 그 감촉에 난 눈을 감아버렸다.



그녀의 ''은 연속간행물입니다. 1편부터 보시면 스토리 이해에 더욱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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