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없던 어린이 표지판 프로젝트를 위한 글
이도키가 놀이터에 간 사이 겨우 몸을 일으켜 밀린 설거지를 하고 커다란 냄비를 꺼내 소고기를 볶았다. 달디 단 냄새가 올라오는 겨울 제주 무를 숭덩숭덩 썰어 국을 끓였다. 국자로 불순물을 걸러내길 여러 번,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드니 현관 앞에 아이가 나와 거리를 두고 조용히 서 있었다.
“엄마, 나 괜찮아. 놀라지 마.”
고 조그만 입술이 오리처럼 부풀어 있다. “무슨 일이야.” 하며 달려가 아이를 꼭 안았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일어났을 그 일에
대해 아는 것이 두려워 눈물이 차오른다. 내 표정을 살피는 아이의 눈에 걱정이 가득하다. 너는 오늘도 엄마보다 의연하구나.
집에서 한참 떨어진 옆 동네 놀이터에서 뛰어놀다 벽돌 모서리에 발이 걸려 얼굴로 넘어졌다. 코피가 나고 입술이 터졌다.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 친구들이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다 했다며 입술을 움직이지 않은채 웃는 소리를 낸다. 그제서야 살펴본 검은 패딩과 흰 운동화에 피자국이 선명하다.
아이는 얼굴의 피를 다 닦고 혼자 자전거를 끌고 한참을 걸어왔다. 엄마한테 전화를 하지그랬냐고 했더니 대답을 피하며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씻고 싶다고 한다. 팟캐스트가 틀어진 스마트폰을 보니 아이 친구들이 내게 두 번이나 전화를 했었다. 나는 국을 끓이느라 몰랐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아이를 따뜻한 물로 씻기니 너무 배가 고프단다. 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소고기 뭇국을 터진 입술 사이로 밀어 넣으며 오물오물 한 공기를 다 먹는다. 그리고 그런다.
“아픈 건 너무 싫은데 내가 아프면 엄마가 내게 신경을 써줘서 좋기도 해요.”
주변 어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그랬냐고 했더니 “그 사람들도 다 바쁠 거잖아 그냥 내가 해결할 수 있어서 그러고 싶지 않았어” 한다. 한 친구가 도와달라고 외쳤지만 영하 14도 추위에 잔뜩 웅크리고 걷던 아주머니의 귀에 들릴 만큼 큰 소리는 아니었다. 아이는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서 넘어진 그 자리에 조금 앉아 있었고 친구들은 옆에서 조용히 기다려줬다.
다친 아이는 엄마나 지나가는 사람들을 놀라게 할까 봐 놀이터 화장실 세면대에서 그 얼음장 같은 물로 세수를 했다. 10살 어린이의 씩씩함에 나는 그만 슬퍼져 버렸다.
독립적인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고 한 것은 바로 나다. ‘어른들은 각자의 일로 바쁘다’는 내가 요즘 가장 자주 하는 말이다. 한 달에 한번 있는 천문대 수업을 오늘은 쉬는 게 좋겠다고 했지만 한숨 자고 일어나더니 기어이 가방을 챙겨 나갈 채비를 하는 성실한 이 어린이. 나는 살점이 터진 입술 안쪽에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를 붙여 주었다.
아이를 보내고 뭇국에 밥을 말아 두 그릇을 먹었다. 그리고 겨울 내내 풀리지 않는 원고를 붙잡고 낙담하던 마음을 반성했다. 오늘 밤부터 나는 용감한 어린이 이도키를 본받아 두 배로 용감해지기로 했다.
어른이 아이를 배려하는 만큼 아이들도 어른을 배려한다. 부모님과 선생님이 계시는 집과 학교가 아닌 놀이터나 공원 같은 곳에서 낯선 어른에게 도와달라고 말하는 것이 어린이에게는 어려운 일일지 모른다. 놀이터에서 등하굣길에 사고가 생겼을 때 도와달라고 말하는 것은 용기이며, 어른들은 어린이들을 돕지 못할 만큼 그렇게 많이 바쁘지 않다고 말해주는 표지판이 있으면 좋겠다. 도움을 청하는 것이 "폐"가 된다고 생각하는 착하고 배려심 깊은 아이들은 정작 위급한 순간에도 혼자 감당하려고 한다. "도와줘"라는 말이 용기의 표현이라는 것을, 네 주변의 어른들이 언제나 기꺼이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알려주고 싶다.
"나는 용감하지만, 지금은 도움이 필요해요."
"어른들은 기꺼이 너를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단다."
나는 그림책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우리 집 아픈 손가락 무라카미이도키 https://brunch.co.kr/@calmcalmship/13
소리 없이 우는 작은 아이 이도키 https://brunch.co.kr/@calmcalmship/10
세상에 없던 신경다양성 브랜드 캄캄에게 수신된 첫 공식 이메일에 뛸 듯이 기쁜 마음을 담담한 척 연기하며 어린이 표지판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겸손은 개나 줘버려"라는 선배의 말에 용기를 낼 수 있었네요. 어린이를 사랑하는 브랜드, 전문가, 독자들의 제안을 모아 [2026 서울리빙디자인페어_어디에든, 어린이] 캠페인관에서 세상에 꼭 필요한 어린이를 위한 표지판들이 시각화된다고 합니다. 벌써 궁금해집니다. 2월 24일이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