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성'에 대한 좀 불편한 글

ADHD 신경다양성 미디어 캄캄호 이야기

by 그랑


브랜딩 하면서 ‘진정성’이라는 단어를 한 번이라도 써 봤다면

이 글은 당신을 불편하게 할 수 있습니다.


2015년, 합정역 한 카페에서 그는 미디어 프로덕트에 대한 오랜 생각을 정리한 글을 내게 보여주셨다. 글쓰기에 단련된 에디터에게는 서툴게 보이는 디자이너의 글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유수의 잡지들이 폐간 수순을 밟으며 저물어가던 그때 특수한 타겟으로 종이 잡지를 창간하겠다는 용감한 시도에 호기심이 생겼다. 편집장으로 합류해 달라는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창간을 앞두고 마음을 움직였던 그의 글과 말을 찬찬히 살피며 ‘세상에 없던 미디어'를 정의해 나갔다. 그러다 꼭 한 단어, ‘진정성’만은 빼자고 요청했다. 신생 미디어에 그 단어를 붙이는 순간 진정성은 희석돼 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함께 일해 보니 그는 브랜드 서사를 디자인이라는 언어로 풀어내는 감도가 탁월했다. 인하우스 편집 디자이너부터 협업 관계로 만난 디자인 스튜디오까지 다양한 디자이너들과 일한 경험이 있지만 네레티브 디자인에서 만큼은 내가 아는 가장 뛰어난 실력자였다.


그런 그도 '진정성'을 포기하지 못했다. 진정성이 아닌 다른 말을 찾기가 어렵다고 했던 것 같다. 진정성 대신 '목소리'를 제안했다. 지금은 흔한 표현이 되어 버렸지만 당시 잡지는 개개인의 목소리, 특히 보통 사람의 삶을 다루지 않았다. 연예인, 유명인, 전문가라는 타이틀이 곧 광고와 마케팅이던 시절이었다. 보통 사람과 유명인의 경계를 완전히 허무는데 우리팀은 모두 동의했다. 선정한 주제를 세상에 꺼내는데 적합한 인물인지가 제1의 섭외 기준이 되었다. 그렇게 모 저널은 창간 후 1년도 되지 않아 '진정성 있는 미디어'의 상징이 되었다. 언론과 독자가 진정성이라는 단어로 우리를 불러주었다. 평범한 사람들 목소리가 주는 울림을 담는 독립 잡지들이 다수 태어났다. 반가운 일이었다.


오래 전부터 '진정성'이라는 단어에 알레르기가 있다. 잡지 기자 시절부터 ‘진정성’이라는 문구가 들어간 브랜드 소개서나 PR 자료는 읽지도 않고 덮어 버렸다. 모두가 쓰는 단어에 청개구리 같은 심보가 작동했을 테지만 무엇보다 진정성이라는 단어를 내 입으로 말하기로 결정한 브랜드에 나는 어떤 흥미도 가질 수 없었다. 잡지 업 다음으로 자연스럽게 기업과 브랜드의 비주얼라이징과 언어를 개발하는 일을 했다. 브랜드가 쌓아 온 서사로부터 고유의 언어를 발견해 세상에 발신하는 일, 그것을 텍스트와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에 나는 꽤 재능이 있었다. 광고도 찍고 브로슈어나 책도 만들고 홈페이지 컨텐츠를 기획하기도 했다.

그렇게 만난 어떤 기업, 어떤 브랜드와 작업을 하더라도 ‘진정성’을 다른 언어로 바꾸는 것에 대해 늘 생각했다. 한 굵지의 가구 그룹의 최근 10년을 기록하는 경영 사사를 서점용 단행본으로 출간하는 목적으로 프로젝트를 맡았을 때는 의도적으로 책 표지에 그들의 성과에 대해 사용하지 않을 것을 제안했다. 대신 ‘보다’라는 감각을 꺼냈다. 40주년을 맞은 건실한 기업을 이끈 구성원들의 '시선'을 통해 기업 정체성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제목은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로 최종 결정되었다.


2015년 당시보다 더 난해한 ‘신경다양성’을 주제로 미디어 브랜드를 만드는 중이다. 최소한의 팀으로 시작한 캄캄 프로젝트는 ‘1인 미디어’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온라인 소통도, SNS 운영도 처음이라 기술도 비법도 잘 모른다. 실패에서 자유롭고 싶어서 토끼 선장이라는 페르소나를 세웠다. 앞으로도 나는 ‘진정성’이라는 단어를 절대 사용하지 않을 작정이기 때문에 오늘도 《캄캄호》 이야기를 SNS와 블로그라는 온라인 세상에 띄운다. 우리가 발신하는 메시지에 반응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고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캄캄호》 이야기가 전해지면 은하수 너머 우주까지 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품어 본다. 디자이너도, 마케터도, 사진가도, 영상 감독도 없이 혼자 구슬을 꿰다 보니 느려터졌다. 빠른 성장이 아니라 느린 생장의 의미를 이해하는 이들과 연결되면 좋겠다. 시작하는 미디어는 아무것도 팔 것이 없다. 팬심과 팔로워 숫자가 곧 힘이고 존재 이유다. 이토록 느린 캄캄호의 항해가 궁금하다면, 팔로우와 공유라는 다정함으로 천천히 지켜봐 주길.


고유성은 내가, 진정성은 타인이 만드는 것


꾸준함이 부족해서 이렇게 다짐의 글이라도 남겨 보는 캄캄호 토끼 선장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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