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 적도의 계절감에 대하여

반팔을 입고 맞는 열 번째 크리스마스

by 네온


싱가포르에서 10년을 살면서도 내가 여전히 이방인과 현지인 사이 그 경계에 있다고 느끼는 이유가 있다. 한국이 좋은 이유도 있겠지만, 싱가포르에는 10년을 겪어도 도무지 마음이 가지 않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계절’ 일 것이다.


한국에서는 계절의 변화와 함께 그 시절의 사건을 기억한다. "아 맞아, 재작년 가을쯤이었나?" 하는 식이다. 하지만 1년 내내 여름뿐인 이곳에서는 그 이정표가 사라진다. 이십여 년을 계절감으로 사건을 기억해 온 나에게 싱가포르에서의 기억들은 늘 순서가 뒤죽박죽으로 저장되어 있다. 그것이 언제쯤이었는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혹은 얼마나 최근이었는지 그 '몇 월'의 감각이 도무지 나지 않는 것이다. 계절이 멈춘 이곳에서 나의 시간 감각도 함께 길을 잃곤 한다.


많은 서양인은 햇빛만 보면 야외로 달려 나가 태닝을 즐긴다. 요즘은 한국 사람들도 여름을 만끽하러 동남아 여행을 자주 오지만, 나는 다르다. 나는 여전히 한국에서 눈 내리는 풍경만 봐도 노래를 부르는, 겨울이 가장 좋은 사람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내가 겨울이 없는 나라에서 10년째 살고 있다.


집에서 역까지는 내 느린 걸음으로 10분 정도 걸린다. 자외선 차단 양산은 필수지만, 아침 출근길 그 짧은 시간에도 더위를 먹어 머리가 아픈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세월이 갈수록 꽤 하얗기로 유명했던 내 피부 위로 기미와 잡티가 올라온다. 피부과를 아무리 다녀도 1년 365일 피부가 쉴 틈을 주지 않는 이 뜨거운 태양 아래서는 속수무책이다.


사실 나는 등산을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내 발로 산을 찾아가는 스타일도 아니다. 어릴 적 아빠의 빠른 걸음을 쫓아 악으로 문장대 정상까지 올라가고, 아이젠까지 신고 꽁꽁 언 겨울산을 내려오던 기억은 있지만 산에 '진심'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한국의 가을철이 되면, 잊고 지내다가도 문득 산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싱가포르에는 가을도 없고 제대로 된 산도 없어서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한국에서도 여름 등산은 최악이라 생각하지만, 적도의 끈적한 더위 속에서 맞이하는 매해 10월은 불현듯 서늘한 가을 산의 공기를 소환해 낸다.


더군다나 가장 적응 안 되는 풍경은 12월의 싱가포르 풍경이다.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한 절대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올 리 없는 이곳에서, 사람들은 트리 위에 눈 결정체와 솜뭉치 눈을 정성껏 장식한다. 그리고 오차드 거리에는 반짝이는 눈 결정체 장식들이 펼쳐진다. 심지어 가든스 바이 더 베이 같은 곳에서는 거대한 슈퍼트리 사이로 인공 눈을 뿌려주는 이벤트까지 연다.싱가포르에는 겨울이 없는데 왜 꼭 ‘겨울의 크리스마스’를 흉내 내야 하는지, 나도 웃으며 그 인공 눈앞에서 사진을 찍는 동시에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크리스마스에 비가 오면 왔지, 눈은 절대 오지 않을 곳에서 말이다.


더위만큼이나 힘든 건 이 열대 기후의 ‘동거인’들이다. 밤에 부엌에 나갔다가 마주치는 창문으로 도망가는 도마뱀, 출퇴근길 앞을 가로지르는 팔뚝만 한 쥐, 식사 중인 테이블 옆으로 태연히 기어가는 엄청난 크기의 바퀴벌레까지. 습하고 더운 이 나라는 각종 벌레에게는 지상낙원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전혀 아니다. 10년이 지나도 나는 여전히 꺅 비명을 지르며 어디선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그 동거인들을 경계하며 어깨를 움츠린 채 밤길을 걷는다. 호커센터 테이블 위로 새들이 날아와 앉아도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는 현지인들의 일상에, 나는 여전히 끼어들지 못한다.



다른 좋은 점들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감내하며 살고 있고, 여름나라에서 눈 장식이 된 크리스마스를 열 번째 맞이했다. 하지만 이 이질적인 크리스마스를 이 곳에서 앞으로 얼마나 더 맞이하고 싶은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놀랍게도 싱가포르 12월, 마리나베이샌즈 내의 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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