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삐는 내가 어릴 적 가장 좋아했던 아이였다. 삐삐는 엄청난 힘을 가졌고 똑똑하고 자유로운 소녀다. 뒤죽박죽 별장에서 혼자 살고 있고 엄마는 일찍 돌아가셨다. 아빠는 바다를 항해하는 선장이지만 폭풍우에 휩쓸려 사라졌다. 삐삐는 아빠를 기다리며 옆집에 사는 토미와 아니카 남매와 특별한 모험을 즐긴다.
삐삐가 처한 상황이 나와 매우 비슷하여 더 쉽게 동화가 된 건 사실이다. 삐삐는 일찍 엄마가 돌아가셨고 나는 아빠가 일찍 돌아가셨다. 또 삐삐의 아빠는 선장으로 언제 집에 돌아올지 모른다. 삐삐는 그런 아빠가 돌아올 것을 굳게 믿는다. 난 지방 시골장을 돌며 장사를 하는 엄마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나도 삐삐만큼은 아니었지만 또래 아이들에 비해 힘이 셌고 모험을 좋아했다. 가끔 사고를 치기도 하고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다는 점이 삐삐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삐삐가 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밤, 두 명의 도둑이 뒤죽박죽 별장에 몰래 들어왔다. 그들은 삐삐가 혼자라 쉽게 돈을 훔칠 거라고 생각했다. 도둑들은 자고 있는 삐삐를 깨웠다.
"자, 꼬마야. 일어나서 아저씨들하고 얘기 좀 하자."
삐삐가 말했다.
"싫어요. 난 자고 있단 말이에요. "
"꼬마야. 아까 부엌 바닥에 있던 돈은 어디다 두었지?"
삐삐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장롱 위에 있는 가방에요."
도둑들은 가방을 찾아 나가려고 했다.
"장난 좀 쳐볼까."
삐삐는 이렇게 말하고선 도둑 중 한 명을 장롱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또 한 명의 도둑도 마저 장롱 위에 올려놓았다. 도둑들은 삐삐가 보통 아이가 아니란 걸 깨달았지만 돈가방이 탐나서 무서움도 잊어버렸다.
"둘이 같이 덤비자."
도둑들은 장롱에서 내려와 삐삐한테 달려들었다. 삐삐가 손가락으로 도둑들을 가볍게 찌르자, 둘은 구석에 처박혔다. 삐삐는 밧줄로 도둑들을 꽁꽁 묶었다.
"제발, 제발. 아가씨,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우린 장난으로 그런 거예요. 우린 그저 음식이나 얻으러 온 사람들이에요."
삐삐는 돈가방을 장롱 위에 올려놓고
"아저씨들 폴카 춤 출래요?"
도둑들은 겁에 질려 한 명은 빗(악기)을 불고 한 명은 삐삐와 폴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삐삐는 목숨이라도 걸린 듯이 너무나 진지하게 춤을 추었다. 도둑들은 피곤이 몰려왔고 삐삐는 도둑들에게 줄 음식을 꺼내와 모두 배가 터지도록 먹어댔다. 삐삐는 도둑들에게 금화 한 닢씩 나눠 주면서
"이건 아저씨들이 떳떳하게 번 돈이에요."
라고 말했다.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의 나오는 (도둑과 함께 춤을) 이 에피소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다. 삐삐가 도둑들을 물리치는 장면은 통쾌하면서도 우습다. 자기 귓속에 우유를 조금 부으며 언제 걸릴지 모를 귓병을 예방하는 거라고 말하는 삐삐가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른의 보살핌을 받을 나이에 혼자 외롭게 언제 올지 모를 아빠를 기다리며 씩씩하게 지내는 삐삐가 나와 같은 처지라고 느꼈다.
삐삐를 보호해 줄 어른은 없었지만 삐삐의 곁을 지킨 원숭이 친구 닐슨 씨와 삐삐를 태우고 다니는 말 꼬마아저씨가 있었다. 그리고 옆집 친구인 토미와 아니카가 있었다. 난 양배추인형과 동네 아이들한테서 딴 딱지들과 구슬들이 있었고 내 친구 배성이, 은혜가 있었다. 가끔 은혜네 집에 가서 저녁을 먹기도 했고 배성이와 깐부가 되어 동네를 휘젓고 다니며 딱지와 구슬을 따오기도 했다. 삐삐처럼 씩씩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어머, 꽃님이는 엄마가 없어도 혼자서 공부도 잘하고 학교도 잘 다니네."
동네 아주머니들 사이에 나는 모든 걸 스스로 잘하는 아이가 돼있었고 동네 아이들의 본보기가 되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참 기특한 아이였다. 혼자서 학교도 잘 다녔고, 나쁜 짓도 하지 않았다. 학교와 집을 오가며 책 속의 세상을 탐험하고 상상하며 노는 걸 즐겼다. 좋은 친구들과 신나는 놀이도 하며 그렇게 자라났다.
"꽃님이가 혼자서 잘하고 있어서 정말 대견해. 엄만 네가 자랑스러워!"
엄마는 날 전적으로 믿었다. 동네 사람들에게 나에 대한 칭찬을 들을 때마다 고생한 보람이 있다고 하셨다. 어린 딸을 혼자 두고 일을 하러 타지로 가야 하는 엄마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매일매일이 걱정과 염려로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을 것이다. 그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엄마의 주름은 늘어만 갔다.
삐삐의 이야기가 나를 바른 길로 안내해 주었다. 외롭고 쓸쓸한 유년시절이었지만 늘 씩씩했고 밝았다. 삐삐를 너무나도 사랑했던 나는 어른이 된 지금도 삐삐가 보여준 순수함과 정의로움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