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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iny Nov 21. 2019

사서 고생, 크로스핏 입문기(2)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 곳

https://brunch.co.kr/@lainydays/107


나 여기 나갈래


온몸의 세포가 바싹 곤두서며 이 곳은 위험해, 빨리 나가!라고 말하는 순간 누군가 어깨를 툭 치며 '오늘 예약하신 OOO 님이 신가요?'라고 말을 건넨다. 저승사자를 보는 게 바로 이런 느낌?


10년이 넘는 사회생활을 하며 나는 이런 곤경의 순간을 수없이 넘어왔다. '이쯤이야'라는 가벼운 생각으로 자연스럽게 어깨를 슬쩍 빼며 '아 아닙니다 제가 잘못 찾아온 것 같아요 하하'라는 말을 남기고 자연스럽게 사라지면 되는 거다. 어차피 1일 체험권은 5천 원이며 커피 한 잔 마신 셈 치면 되는 것.


하지만 상대방 역시 만만치 않은 내공의 소유자였다. 어깨를 툭 스치고 지나가던 손이 찰나 내 표정을 읽었는지 갑자기 방향을 틀어 어깨를 움켜쥐며 나의 퇴로를 사전에 차단한다. 


탈의실은 저쪽에 있어요 옷 갈아입고 나오세요


헬스장의 신성불가침 영역에서나 볼법한 잔뜩 화난 근육을 온몸에 덕지덕지 붙인 트레이너는 그러나 환한 미소와 함께 내 어깨를 옴짝달싹 못하게 꽉 붙잡으며 '잔말 말고 옷 갈아입고 나와'라고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이번 생은 여기까지인가..라는 체념과 함께 탈의실에 들어가 상하의를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미리 챙겨 온 운동화를 신고 박스로 나왔다.


약 스무 명 남짓 한 사람들이 박스에 둥글게 모여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어라? 이 정도면 괜찮은데?' 스트레칭 강도는 그리 세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이미 이런 종류의 스트레칭에 익숙한 사람들 틈에 끼어 낯선 이방인인 채 어색한 동작을 반복하는 게 싫었을 뿐이다. 쭈뼛쭈뼛..


여기서 잠깐 크로스핏에 대해 설명해보자. 일단 제목을 보고 들어온 분들이라면 크로스핏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계신 분들이겠지만 어쩌다 잘못 눌러서 들어온 분들을 위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크로스핏은 짧은 시간 동안 다양한 동작을 높은 강도로 수행하는 운동을 말한다. 그 역사가 길지는 않다.

네이버 지도에서 서울을 중심으로 검색하면 헬스장은 교회만큼이나 많이 나오는데 크로스핏 박스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아직 헬스만큼이나 크로스핏의 국내 저변은 넓지 않은 모양이다. 그도 그럴 듯이 이렇게 죽자 사자 덤비는 운동을 누가 할까..


하지만 기쁨도 잠시, 근돼(근육 돼지) 트레이너가 스트레칭을 마치자마자 갑자기 바벨을 들고 오라고 시킨다. 바벨.. 바벨이 뭐지? 헬스장 다닐 땐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아이였는데? 눈치껏 주변 사람이 하는 행동을 따라 해 본다. 회사 생활하면서 는 게 눈치 말고 뭐가 있겠어!


바벨은 역도 선수들이 드는 긴 막대 모양의 운동기구를 말한다. 모두들 바벨을 챙겨 와서 땅에 눕힌다. 초짜 티를 내지 말아야 해. 나는 이래 봬도 PT를 20회나 한 사람이야. 쪼렙이 아니라고!!


하지만 근돼 트레이너가 '오늘 워밍업 동작은 파워 스내치입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진다. '.. 뭐? 파워.. 스내치??? 스내치가 뭔데?' 이건 뭐 생전 처음 하는 게임에 접속했는데 튜토리얼도 없이 바로 본 게임으로 진입하는 느낌?


아니나 다를까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또 다른 트레이너 한 분이 오더니 'OO님은 오늘 처음이시니까 여기서 제가 자세를 잡아드릴게요' 근돼 트레이너보다 훨씬 인간다운 몸집의 트레이너가 나를 불렀다. 안도의 한숨과 더불어 PT 20회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구나라는 회한의 한숨이 나왔다. 


여기서 잠깐. 크로스핏은 정말 눈치가 중요한 운동이다. 한 타임에 20명 남짓의 사람들이 모여 운동을 하기 때문에 헬스 pt처럼 1:1로 코치가 일일이 상세하게 자세를 봐주지 않는다.


그리고 비기너의 경우 처음 한 두 번은 따로 구석에서 자세를 알려주지만 그 이후로는 정말 야생에 방치된 새끼 사자처럼 관심을 많이 주지 않는다. 적자생존의 법칙처럼 주변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적절히 따라 해야 한다. (그렇다고 아예 관심을 안주는 건 아니고 비기너의 경우 운동 내내 자세를 봐주긴 한다)


크로스핏에서 하는 운동은 헬스에서의 그것과 유사하면서도 달랐다. 헬스장에서 하는 운동은 대부분 정적인 운동이다. 고정된 기구에서 운동을 하거나, 바벨이든 덤벨이든 한 자리에 앉아서 특정 부위 근육만 자극하며 운동을 반복해서 한다.


크로스핏에도 물론 헬스장에서 하는 운동과 비슷한 동작이 많다. 데드리프트도 있고 스쾃 동작도 있다. 때문에 크로스핏을 다니기 전에 어느 정도 PT를 받아두면 그 동작을 수행함에 있어 어색하고 낯섦이 적다. 하지만 헬스장에서 해본 적이 없는 동작도 엄청나게 많다.


박스 점프, 풀업, 케틀벨 스윙, 로잉머신 등.. 주로 무산소 운동과 유산소 운동이 결합된 형태다. 헬스장을 1년을 다녔건 5년을 다녔건 충실했다면 기초체력이나 기본적인 기구 사용법은 알겠지만 크로스핏에 온다면 또다시 비기너가 된다. 운동 방법을 새로 배워야 한다. 마치 스타 1을 마스터한 프로게이머가 와우를 할 때 익숙하면서도 헤매는 것과 마찬가지.


워밍업을 간신히 마치니 이제 본격적인 와드를 하니 박스 가운데에 모여 설명을 들으라고 한다. 와드.. 뭐야 와우도 아니고. 와드는 Work Of the Day의 약자로 오늘의 운동이란 뜻이다. 매일매일 운동의 종류가 달라진다. 


정말 다양한 운동을 수없이 많이 조합하여 하루의 운동으로 만드는데 매일 출석해도 수개월 만에 한 번 반복할까 말 까니 그 경우의 수가 실로 놀라울 정도. 그리고 그 운동을 매일 화이트보드에 적어놓는데 그 모양새란...


EMOM_14MIN 5 Deadlift +5 Toes to bar

EMOM_5MIN 45Sec Plank - 15 Sec rest


... 외계어가 따로 없다. 지금도 이해가 안 가는데 처음엔 도대체 설명을 들어도 몰랐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도 어렵고 그저 앞서 얘기했듯 눈치껏 자세 따라 하고 몇 번 해야 하는지 세어 볼 뿐이다. 


그래도 앞선 스트레칭과 워밍업 운동이 자세만 어려웠을 뿐 그다지 큰 힘 들이지 않고 잘 끝냈기 때문에 이번에도 자신이 있었다. EMOM이란 정해진 동작을 1분 내에 끝내는 것으로 남는 시간엔 휴식을 할 수 있다. 


즉, "EMOM_14MIN 5 Deadlift +5 Toes to bar" 이라 함은 1분간 데드리프트 다섯 개와 기다란 막대 바에 손을 잡고 매달려 다리를 위로 차 올리는 동작 다섯 개를 하면 되는 거다. 내가 만약 이 동작 1세트를 40초만에 끝내면 남은 20초는 쉴 수 있는 것.


데드리프트 무게 세팅을 위해 트레이너가 자신이 들 수 있는 정도의 원판을 바벨에 꽂으라고 했는데 '왜 이래 나 PT만 20회 넘게 했던 사람이야'라는 자만심과 함께 두꺼운 원판을 왕창 가져와서 양 옆으로 팡팡팡 꽂아댔다. 처음 PT를 할 때와는 달리 여기선 기죽지 않겠다는 기선제압의 의미였다. 비록 주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런데 멀리서 근육 돼지 트레이너가 그 모습을 보더니 다가와 한마디 한다. 


이러면 회원님 죽어요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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