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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일 Aug 11. 2021

나는 낙원을 꿈꾸지 않는다

벗어나지 않는 삶에 대하여

“좋아하는 도시가 있으세요? 있으면 좀 알려주세요.”

아침에 일어나 멀뚱 멀뚱 휴대폰 화면을 보면서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도시라.. 가고 싶은 곳을 묻는 건가? 그래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으면서 생각했다. 내가 가고 싶은 곳. 나는 어디를 가고 싶을까. 누군가 어디에 가고 싶으냐고 물으면 과거의 나는 꼭 어딘가를 특정해서 말했다. 예를 들면 제주도, 예를 들면 바닷가, 예를 들면 어떤 카페. 출근 준비를 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댓글을 썼다. 저는 지금 제가 사는 곳이 좋아요.

어딘가를 가고 싶다는 말은, 지금 이 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말이었다. 생각해보면 과거의 나는 늘 살던 곳을 벗어나는 방식으로 이동했다. 어딘가에 정착했다는 말은 내게 어딘가에 매여있다는 말과 같은 말이었다. 매여 있는 공간은 늘 지옥이었고, 그 곳에서 반복되는 시간을 나는 슬기롭게 견디지 못했다. 딛고 있는 발이 아닌 늘 다른 곳을 보았다. 다른 곳에 가고 싶었다. 나를 상처 입히고 지겹게 만드는 이 곳의 시간과 이별하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지나왔던 시간과도 이별했고, 동시에 살아왔던 공간과도 이별했던 것이다.

존재했던 곳을 떠나왔고, 살았던 시간을 지나치며 나는 지금 이 곳에 왔다. 나는 이제서야 저 멀리 있는 지평선이 아닌 내 발 끝을 본다.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지금 이 곳. 더 이상 어딘가로 옮겨가는 삶을 꿈꾸지 않는 나는, 드디어 지금 여기의 시간을 제대로 살고 있는 듯 하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결국 시간과 공간이 같은 개념이란 것을 이해하게 된다. 물리학에서도 그렇다고 하던데 철학적으로 사실 그렇지가 않나,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공간이란 것은 결국 비어있기 마련이고, 결국 다시 환원되는 것은 그 공간을 채우는 시간과 사람 이야기가 되니까 말이다.

나는 이 곳에서 만족하며 잘 살아가고 있는데, 가끔 누군가 춘천에 놀러오면 갈 데가 없어서 당황하곤 한다. 이미 일상으로 들어온 삶이기에 특별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늘 특별함과 새로운 무엇을 찾아 헤매던 삶의 방향이 드디어 일상으로 돌아왔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사는 이 곳에는 기쁨과 고통과 슬픔과 분노가 존재하는 곳이지만, 그 모든 시간에 묵묵히 어떤 것들은 버티고, 어떤 것들은 견뎌내고, 어떤 것들은 마음껏 느끼는 내가 있다. 고통에는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니고, 기쁨에도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

아침 출근길에 횡단보도를 건너는 아이들을 지도하는 아저씨의 수신호를 본다. 매일 아침 마주치는 아저씨는 나에게 꼭 고개 숙여 인사를 하신다. 지나가도 된다고 주황봉을 흔들면서. 그러면 나도 짧게 목례한 뒤 엑셀을 살짝 밟는다. 아직 미처 횡단보도를 건너지 못한 아이가 뛰어나올 수도 있으니까.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아침마다 주고받는 이 짧은 교감이 하루를 감각하도록 만든다. 퇴근할 때는 소양강을 거치는 다리를 건너고, 창 밖에 흘러가는 구름과 강물을 본다. 아무리 짜증나는 하루였어도 그 풍경을 보면 마음이 거짓말처럼 정화된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운동복을 갈아입고 러닝을 한다. 차를 타고 지나다닐 때는 몰랐던 풍경과 사람과 공간을 같은 위치에서 천천히 바라본다. 발이 땅에 닿을 때마다 내가 서 있는 곳을 다시 깨닫는다.

내가 꿈꾸던 낙원이 어디 다른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나는 이제 이해한다. 괴롭고 무기력하고 또 어떤 순간에는 깊게 상처 받아야 하는 낙원. 이런 낙원조차 살아갈만하다고 생각하는 나는, 이제 더 이상 낙원을 꿈꾸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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